가상현실 게임 (VRMMO)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잿빛 하늘 아래, 첫 번째 균열

차가운 바람이 회색빛 초원을 스쳤다. 낡고 헤진 가죽 갑옷 틈새로 파고드는 한기에 카인은 저절로 어깨를 움츠렸다. 눈앞에는 진흙탕 같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거대한 민달팽이들이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녀석들의 끈적이는 몸통에서 나는 역한 냄새는 익숙했지만, 여전히 불쾌했다.

[스텀프 슬라임]
[레벨: 5]

지루하고, 지겹고, 보잘것없는 사냥. 카인의 손에 들린 녹슨 장검이 휙, 하고 허공을 갈랐다. 민달팽이의 끈적한 몸통이 갈라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시스템 메시지가 시야 한 켠에 번개처럼 스쳤다.

[스텀프 슬라임을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12 동화를 획득했습니다!]

겨우 12 동화. 이 미미한 수입으로 언제쯤 저 빌어먹을 제국의 세금을 채울 수 있을지. 카인은 거친 숨을 내쉬며 칼에 묻은 점액질을 대충 닦아냈다. 일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제국세 납부일이 코앞이었다. 이대로라면 또 다시 ‘빈곤세’라는 명목으로 남은 재산마저 털릴 터였다. ‘벨라트릭스 제국’은 평민들에게 한없이 가혹했다.

“젠장.”

낮은 욕설이 목구멍에서 터져 나왔다. 이 세계, 아르젠티아는 드넓고 신비로운 땅이었지만, 평민인 카인에게는 그저 거대한 감옥일 뿐이었다. 황량한 외곽 지역에서 허덕이며, 중앙의 풍요로운 도시로는 발 한 번 들여놓기조차 힘든 삶. 귀족들과 거대 길드원들은 찬란한 빛의 도시에서 막대한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겠지. 그들은 고작 민달팽이 따위나 잡는 카인의 삶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멀리서 검은 제복을 입은 그림자들이 보였다. 제국 병사들이었다. 그들의 헬멧에 박힌 붉은 보석이 햇빛을 받아 섬뜩하게 반짝였다. 카인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들이 왜 여기까지… 설마 오늘이 징수일인가?

병사들은 초원 외곽에 자리 잡은 작은 천막촌, ‘서리골’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카인과 같은 평민 플레이어들이 겨우 연명하는 보잘것없는 마을이었다. 그들의 거대한 그림자가 마을에 드리워지자,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이봐, 촌장! 나와!”

병사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고압적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의 가슴팍에는 금색 사자 문양이 선명했다. 제국 군부의 상징이었다.

촌장인 늙은 ‘마르코’ 영감이 천막에서 비틀거리며 나왔다. 그의 얼굴은 잿빛으로 질려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대장님. 아직… 징수일까지는 며칠 남았을 텐데요.”

“닥쳐!” 대장이 삿대질하며 마르코 영감을 위협했다. “이달부터 ‘임시 방어 세금’이 추가로 부과되었다. 제국의 안녕을 위한 것이니, 너희 같은 하찮은 것들이 불만을 가질 여지는 없다. 당장 가져와!”

마르코 영감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임시 방어 세금이라니, 들어본 적도 없는 명목이었다.

“대, 대장님… 이미 세금 때문에 허리가 휘는데… 더 이상은…”

“헛소리 집어치우고 당장 내놔! 아니면 네놈들의 천막을 모조리 태워버릴 수도 있다!”

병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철커덩, 하는 금속음이 마을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카인은 숨을 죽였다. 저항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난번, 한 평민 플레이어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대들었다가 그 자리에서 처형당하는 것을 보았다. 시스템은 단순히 `[NPC에게 적대 행위를 했습니다.]`라는 메시지만 띄울 뿐이었다.

마르코 영감은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마을의 공동 비축 창고를 열었다. 창고 안에는 그나마 모아둔 식량과 몇 안 되는 광물, 그리고 몬스터의 부산물들이 있었다. 병사들은 그것들을 탐욕스럽게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게 다냐? 고작 이 정도 가지고 제국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

대장이 으스대며 낡은 광물 자루를 걷어찼다. 자루가 터지며 흙먼지가 풀풀 날렸다. 그 사이로 작은 소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마르코 영감의 손녀, ‘리나’였다. 리나는 한 손에 인형을 든 채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할아버지… 배고파…”

그 모습에 카인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이 빌어먹을 제국. 대체 무엇을 지키기 위해 이토록 약한 이들을 짓밟는단 말인가. 그의 손이 저도 모르게 검의 손잡이로 향했다. 그러나 이내 꾹 눌러 참았다. 그는 무모한 영웅이 아니었다. 죽음은 현실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병사들이 떠났다. 그들이 남긴 것은 텅 빈 비축 창고와 절망에 빠진 마을 사람들의 탄식뿐이었다. 리나는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 계속 흐느꼈다.

카인은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마을 외곽의 낡은 게시판이었다. 평소에는 잡다한 채집 퀘스트나 실종된 가축을 찾는 내용만 올라오는 곳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종이 한 장이 삐뚤빼뚤하게 붙어 있었다. 다른 퀘스트 공고들과는 다른, 뭔가 비장한 기운이 맴돌았다.

`[의뢰: 잃어버린 희망]`

누가 붙인 것일까. 익명으로 보이는 내용이었다. 카인은 조심스럽게 게시판으로 다가갔다.

`모두가 잠든 밤, 별똥별이 떨어지는 곳에서 만납시다.`
`낡은 풍차 아래에서, 잿빛 하늘을 등지고.`
`새로운 새벽을 기다리는 자여, 이 조각을 지니고 오라.`

마지막 문장 아래에는 작은 나무 조각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단순한 퀘스트가 아니었다. ‘잃어버린 희망’, ‘새로운 새벽’. 마치 마을 사람들의 처지를 대변하는 듯한 문구들이었다. 카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숨겨진 퀘스트: 잃어버린 희망 발견!]
[퀘스트 목표: 낡은 풍차 아래에서 새로운 새벽을 기다리는 자와 접선하라.]
[보상: 미정]

미정이라는 보상이 불안하게 다가왔지만, 퀘스트 이름이 주는 알 수 없는 끌림이 있었다. 오늘, 이 모든 것을 약탈당하고 침묵해야 했던 그 분노가 이끌고 있었다.

카인은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자신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모두들 각자의 절망에 잠겨 있었다. 그는 게시판에서 조용히 쪽지를 뜯어냈다. 손끝에 닿는 종이의 질감이 마치 새로운 운명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그날 밤, 카인은 여느 때처럼 슬라임을 사냥하는 대신, 낡은 풍차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잿빛 하늘에는 별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어둠을 뚫고 나올 작은 불씨 하나가 막 피어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이 희망일지, 아니면 또 다른 절망의 시작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