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비가 피처럼 쏟아져 내렸다.
단죄령. 천하에서 가장 사악한 기운이 응축된 곳, 태고적부터 수많은 마물들이 봉인되어 온 금기의 땅이었다. 그 절벽 너머의 심연에서,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맹렬한 검은 기운은 봉인을 간신히 지탱하는 고대의 결계마저 뒤흔들고 있었다.
“청풍아, 저 마광(魔光)이 터져 나오기 전에 봉인진을 완성해야 한다! 늦으면 수천 년 동안 쌓아 올린 봉인이 무너진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벗, 현무의 목소리는 여전히 굳건하고 믿음직스러웠다. 천하문의 쌍벽. 청풍과 현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영기를 타고났으며, 같은 스승 아래에서 도를 닦고, 같은 꿈을 꾸었다. 수많은 전투에서 서로의 등을 맡겼고, 위기의 순간마다 서로의 목숨을 구해냈다. 천하문 문주는 물론, 강호의 모든 이들이 우리 둘을 두고 “푸른 바람과 검은 거북이가 함께하면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다”며 칭송하곤 했다.
나는 현무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우리의 등 뒤로는 천하문의 수많은 제자들이 필사적으로 마물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우리에게 거는 절대적인 신뢰가 담겨 있었다. 봉인진의 중심에 선 나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내 몸 안의 금단(金丹)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푸른색 영기(靈氣)를 뿜어냈다. 그 푸른 기운은 밤하늘을 가르며 단죄령 심연 위로 거대한 봉인진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간다, 현무!”
외침과 동시에 나는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영기를 쏟아부었다. 온몸의 경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지만, 천하를 수호한다는 사명감 아래 모든 것을 견뎌냈다. 봉인진은 완벽하게 그려졌고, 이제 남은 것은 현무가 마정(魔晶)을 박아 봉인을 영원히 굳건히 하는 일뿐이었다.
그때였다.
날카로운 칼날이 나의 등을 꿰뚫는 듯한 섬뜩한 감각.
“크윽…!”
피와 함께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 몸을 꿰뚫은 것은 마물의 공격이 아니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영기, 너무나도 익숙하고 따뜻했던… 현무의 영기였다.
“현무… 네가…?”
나는 비틀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현무는 서늘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나의 등 뒤에 박혔던 비수, 내가 오래전 그에게 선물했던 그의 법보, ‘흑룡비수(黑龍匕首)’가 들려 있었다. 칼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붉은 핏방울이 차가운 빗물과 섞여 흩어졌다.
“청풍아.”
현무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냉정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네가 너무 강했어. 네가 없었다면, 아마 내가 천하문의 유일한 태양이 되었을 텐데.”
그의 눈빛에는 내가 알던 현무의 온기라고는 단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얼어붙은 증오와 뒤틀린 욕망만이 번뜩였다.
“네놈이… 지금 무슨 짓을…?”
나는 이를 악물고 물었다. 금단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온몸의 기운이 한순간에 흐트러졌다. 봉인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깨달아서 다행이다.”
현무는 싸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내 기억 속 모든 아름다운 추억들을 송두리째 짓밟는 듯했다.
“천하문이 네놈을 칭송할 때마다, 네놈이 공적을 세울 때마다, 내 안은 썩어 들어갔지. 나는 너보다 약하지 않다. 아니, 나 또한 강하다! 그런데 왜, 언제나 네놈의 그림자에 가려져야 하는가!”
그의 목소리가 점점 광기로 물들었다. 흑룡비수가 섬광처럼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내 가슴팍, 금단이 자리한 곳을 향했다. 막으려 했지만, 등 뒤의 상처와 봉인진을 유지하느라 소진된 힘은 이미 바닥이었다.
“네 금단은, 이제 내 것이다.”
콰직!
끔찍한 소리와 함께 흑룡비수가 나의 가슴을 꿰뚫었다. 푸른 영기가 한순간에 폭주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내 금단이, 수십 년간 수련해 온 나의 모든 것이, 마치 유리잔처럼 산산조각 나는 고통이 온몸을 찢어발겼다. 영혼마저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통증에 나는 무릎을 꿇었다. 시야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크아아악!”
나는 피를 토하며 절규했다. 금단이 파괴된 충격으로 영기가 폭주하자 봉인진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단죄령 심연에서 억압되어 있던 사악한 기운이 거대한 검은 파도처럼 솟아올랐다.
“잘 가라, 나의 오랜 친구여. 이 모든 것은 나 현무가 이루는 새로운 천하의 초석이 될 것이다.”
현무는 냉혹하게 선언하며 내 등 뒤를 발로 차 심연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끝없이 깊은 나락 속으로 추락했다. 찢겨진 육신, 산산조각 난 금단, 그리고 배신당한 영혼. 내 몸의 모든 것이 고통으로 타들어 가는 와중에도, 나의 시선은 마지막까지 단죄령 위에서 냉소를 짓는 현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현무… 네놈…’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서, 나는 내가 지켜온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봉인진이 완전히 파괴되고, 단죄령의 흑암(黑暗)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천하문의 제자들이 비명과 함께 마물들에게 찢겨 죽는 모습이 아득하게 보였다. 모든 것이, 내가 지키려 했던 모든 것이 현무의 손에 의해 파괴되고 있었다.
몸은 산산조각 나는 듯했고, 의식은 아득한 어둠 속으로 침잠했다. 하지만 그 절망의 나락 속에서, 나는 하나의 생각만을 붙잡았다.
‘살아남는다… 반드시 살아남아… 네놈을…’
수십 년간 쌓아 올린 영기가 사라지고, 금단은 한줌의 모래처럼 흩어졌지만, 내 안에 남은 것은 오직 불타는 증오와 복수심뿐이었다. 그 감정은 차가운 심연의 어둠 속에서도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나는 추락하고, 또 추락했다. 끝도 없는 어둠 속으로.
차가운 바위가 내 몸을 때렸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피가 쏟아져 내렸다. 의식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죽을 수 없었다. 죽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이대로 죽는다면 현무의 뜻대로 될 뿐이었다.
‘나는… 죽지 않는다…’
마지막 남은 혼신의 힘으로 이를 악물었다. 나는 현무가 나의 배신을 후회하며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 것이다. 천하문 문주와 강호의 모든 이들이 나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현무를 새로운 영웅으로 칭송하는 그때, 나는 지옥에서 기어 올라와 그들을 모두 파멸시킬 것이다.
피가 흐르는 눈을 겨우 뜨자, 아득한 어둠 속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깜빡였다. 그것은 영기라기보다는, 마치 나의 모든 증오가 응축된 듯한 싸늘한 광채였다.
나는 그 빛을 향해, 나의 모든 증오를 응축한 채,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이것은 끝이 아니었다.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지옥 같은 복수의 서막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