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오래된 책방 아래, 새로운 세계
솔바람골은 그런 곳이었다. 낡고, 조용하고, 느릿느릿. 읍내 버스조차 하루에 세 번 오는 것이 전부인 이곳에서,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대신 늙은 소가 되새김질하듯 고여 있었다. 그리고 그 고요의 중심에, 한아름은 ‘책방 그림자’를 지키며 살았다.
아름은 손때 묻은 나무 간판에 매달린 낡은 쇠사슬을 흔들며 문을 열었다. 쨍그랑, 경쾌한 소리가 골목의 아침을 깨웠다. 먼지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뒤섞인 책방 공기는 언제나처럼 그녀를 포근하게 감쌌다. 여름비가 막 그친 아침이었다. 촉촉한 공기가 코끝을 간질였고,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햇살은 희미한 먼지들을 춤추게 했다.
“휴, 오늘도 평화로운…”
책장 사이를 걸으며 어제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책들을 제자리에 꽂았다. 표지가 바랜 시집, 글씨가 빼곡한 백과사전, 알록달록한 동화책까지. 책방 그림자는 그야말로 세월의 흔적이 오롯이 담긴 보물창고였다. 아름은 책 한 권 한 권에 깃든 이야기를 상상하며 손가락으로 책등을 쓸었다. 이 책들이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그녀에게 왔다는 사실이, 때로는 경이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일상에도 가끔 작은 파문이 일곤 했다. 바로, 지하 창고였다.
“또 새는구나.”
밤새 내린 비가 꽤 심했던 모양이었다. 아름은 한숨을 쉬며 책방 안쪽의 낡은 나무 문을 열었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축축하고 쿰쿰한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두컴컴한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가자, 습기로 가득 찬 지하 창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박스들과 먼지 쌓인 가구들, 그리고 책방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잊힌 책들이 가득한 곳.
가장 깊숙한 벽 쪽에서 물방울이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벽돌 틈새를 비집고 스며든 물은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이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비가 올 때마다 이랬으니,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어디서 새는 걸까?”
아름은 벽에 바싹 붙어있는 거대한 나무 책장을 바라봤다. 증조 할아버지가 쓰던 것이라던데, 그 육중한 무게와 높이는 볼 때마다 경외감을 안겨주었다. 저 책장 뒤에서 물이 새는 것이 분명했다. 아름은 팔을 걷어붙였다. 책장을 옮겨 벽을 직접 살펴보지 않고서는 답이 없었다.
“으읍차!”
책장 가득 꽂힌 책들을 일단 빼내고, 아름은 온몸의 힘을 실어 책장을 밀었다. 거대한 나무 덩어리는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주 조금씩 움직였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이… 이거 혼자 옮기기 너무 힘든데…”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책장을 벽에서 한 뼘 정도 떨어뜨릴 수 있었다. 그 틈새로 손전등 빛을 비춰보니, 축축하게 젖은 벽이 보였다. 얼룩덜룩한 시멘트 벽돌 사이로 검붉은 물때가 진하게 끼어 있었다. 그런데…
“어? 이게 뭐야?”
손전등 불빛이 벽의 특정 부분을 비추자, 아름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른 벽면과 달리, 그곳은 시멘트가 아니라 뭔가 덧칠한 듯한 희미한 흔적이 보였다. 마치 벽돌이 아닌 다른 재료로 만들어진 벽 위에 얇게 시멘트를 바른 것 같았다. 물이 새는 곳도 그 부분이었다.
궁금증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아름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 부분을 만져보았다. 시멘트가 너무 낡아 푸석푸석했다.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자 작은 조각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이게 뭘까? 땜질을 해놓은 건가?’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손전등을 가까이 대고 벽을 긁어냈다. 낡은 시멘트가 떨어져 나갈수록, 그 아래에 숨겨져 있던 다른 질감의 벽면이 서서히 드러났다. 매끄럽고 차가운, 돌 같은 느낌. 하지만 일반적인 벽돌이나 돌과는 달랐다. 표면에 미묘한 무늬 같은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아름은 자기도 모르게 망치와 끌을 가져왔다. 호기심이 두려움을 압도했다. 살살, 조심스럽게 시멘트 덧칠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톡, 톡. 낡은 시멘트 조각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난 벽은 예상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세상에…”
그것은 벽이 아니라, 거대한 돌문이었다. 아니, 돌문이라기보다는… 정확히는 벽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돌로 된 ‘판’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돌판 중앙에는, 희미하지만 분명히 알아볼 수 있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고대 문명에서나 볼 법한 기하학적인 무늬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너무나 오래되어 마모된 탓에 정확한 형태를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그 웅장함과 신비로움은 아름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 돌문 가장자리에는 아주 가는 틈새가 있었다. 그 틈새에서 희미한 바람이 새어 나왔다. 단순히 차가운 바람이 아니었다. 오래된 흙냄새와 함께, 아주 희미하지만 코끝을 스치는 달콤하고 향긋한 풀 내음이 섞여 있었다. 마치 봉인된 시간의 조각이 바람과 함께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아름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책방 지하 창고 깊숙한 곳, 낡은 책장 뒤에 이런 것이 숨겨져 있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동안 아무도 모르고 방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돌문의 표면을 쓸어보았다. 차가운 돌의 질감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어딘가 모르게 경외감이 드는 느낌이었다. 이 문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또 다른 창고? 아니면… 완전히 잊혀진, 고대의 세계?
“아름아, 거기서 뭐 하니? 밥 먹어야지!”
저 위층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름은 화들짝 놀라 손전등을 껐다. 방금 전까지 눈앞에 펼쳐져 있던 신비로운 돌문은 순식간에 어둠 속에 잠겼다. 하지만 그 모습은 아름의 망막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사라지지 않았다.
“네, 할머니! 지금 올라갈게요!”
대답을 하면서도, 아름의 시선은 계속 어둠 속의 돌문을 향했다. 심장이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평화롭고 느릿느릿한 솔바람골의 일상에, 예상치 못한 균열이 생긴 순간이었다. 그녀의 오래된 책방 아래, 전혀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문이 열린 것이다. 그 문 뒤에 무엇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름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지루했던 일상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그녀가 오랫동안 알 수 없는 갈증을 느껴왔던 이유일지도 모른다고.
아름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차가운 지하 창고를 떠나 따뜻한 햇살이 드는 책방으로 향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굳게 닫힌 돌문 너머의 미지의 세계를 향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