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니온 마법 학원, 고색창연한 대리석 복도에 별빛이 부서지듯 쏟아져 내렸다. 밤이 깊어지자 도서관 열람실은 한산해졌지만, 한쪽 구석에선 여전히 두 그림자가 웅크리고 있었다.
“유나, 그만 좀 해. 벌써 자정이야. 내일 실기 시험 망칠 일 있어?”
서하의 차분한 목소리에는 인내심의 한계가 묻어 있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은발은 언제나처럼 흐트러짐이 없었고, 뾰족한 눈꼬리는 유나가 펼쳐 놓은 고문서 더미를 향해 날카롭게 쏘아졌다.
“쉿, 서하. 드디어 찾았어!”
유나는 눈을 반짝이며 낡고 바랜 양피지 조각을 내밀었다. 평소라면 교칙 위반에 엄격한 서하였지만, 유나의 저런 광기 어린 열정 앞에서는 종종 무력해지곤 했다. 유나의 붉은 머리칼은 열람실의 희미한 마법 등불 아래서 불꽃처럼 흔들렸다.
“이게 뭔데?”
서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양피지를 들여다보았다. 희미한 마법 문자들이 알아보기 힘들게 새겨져 있었고, 중앙에는 학원 본관 지하를 표시하는 듯한 조악한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가장 깊은 곳, 보통은 접근할 수 없는 ‘별의 심연’이라고 불리는 구역에 붉은색 잉크로 커다란 X자가 쳐져 있었다.
“‘별의 심연’에 대한 기록이야. 학원에서는 단순한 고대 유물 보관소라고 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아.” 유나가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100년 전, 학원 역대 최연소 수석 졸업생이었던 ‘엘레나 드 루시엔’ 선배의 일지 파편이야. 그녀는 졸업 직전, 학원 지하에 숨겨진 ‘끔찍한 진실’을 발견하고 사라졌다고 해.”
“그건 단순한 소문일 뿐이야, 유나.” 서하가 차갑게 잘라 말했다. “교수님들은 늘 말씀하셨잖아. ‘별의 심연’은 고대 마법 연구의 잔해로 가득한 위험한 구역이며, 함부로 접근하는 것은 금기라고. 거기서 발견된 유물들은 너무 강력해서 외부로 노출되는 것조차 위험하대.”
“위험해서?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왜 굳이 ‘별의 심연’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인 걸까? 단순한 유물 창고라면 ‘지하 보관고’면 충분하잖아.” 유나는 흥분으로 상기된 얼굴로 서하를 똑바로 응시했다. “엘레나 선배는 기록했어. ‘그곳에선 별이 울고 있다’고. 대체 뭐가 울고 있다는 거야? 유물이?”
서하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유나의 지나친 호기심은 종종 서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직감은 항상 놀랍도록 정확했다.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오늘 밤, 확인하러 가는 거야.” 유나는 결심에 찬 눈으로 말했다.
“미쳤어? 유나! 들키면 바로 퇴학이야! 우리의 마법사가 되려는 꿈은 어떻게 하고?” 서하가 낮은 목소리로 격분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진실을 알아야 해, 서하. 이 학원은… 뭔가 숨기고 있어.” 유나가 서하의 손을 덥석 잡았다. “너도 궁금하지 않아? 명문 세르니온 학원의 지하에 묻힌 금기가 뭔지?”
결국, 서하는 유나의 끈질긴 설득과 반짝이는 눈빛에 굴복하고 말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새벽 2시, 본관 지하 통로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마법사들이 수련에 쓰는 ‘별빛 회랑’을 지나, 학생들은 접근이 금지된 낡은 강철 문 앞에 섰다. 문은 두꺼운 마법 자물쇠로 잠겨 있었고, 주변 공기는 이상하리만치 무거웠다.
“이건… 그냥 마법 자물쇠가 아니야. 이건… 봉인 마법이 걸려 있어.” 서하가 문에 손을 대자 푸른빛의 마나 파장이 퍼져 나갔다. 그녀의 표정은 경직되어 있었다. “강력한 결계야. 단순히 침입을 막는 걸 넘어, 뭔가… 안에 있는 것을 가두고 있어.”
“봉인 마법이라니… 엘레나 선배의 기록대로잖아.” 유나는 주머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안에는 보랏빛 액체가 일렁이고 있었다. “이건 마법 감응력을 일시적으로 증폭시켜주는 약이야. 교수님 서재에서 몰래 가져왔어.”
서하가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유나! 남의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잔소리는 나중에. 일단 이것부터 해결하자.”
유나는 약을 한 모금 마신 후, 이마에 손을 얹고 집중했다. 붉은 마나의 기운이 그녀의 몸을 감쌌고,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그녀는 손을 들어 강철 문에 대고 섬세한 마법 진동을 보냈다. 봉인 마법의 미세한 틈새를 찾아 파고드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서하는 옆에서 그녀의 마나 흐름을 보조하며 불안하게 주위를 살폈다.
*쉬이이익…*
고요하던 복도에 마나의 흐름이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강철 문에 새겨진 봉인 문양이 섬광처럼 번쩍이더니, 이내 연기처럼 스러져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 안쪽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찌르고 들어왔다. 코끝에 희미하게 쇠 냄새와… 곰팡내, 그리고 뭔가 알 수 없는 끈적한 단내가 섞여 풍겼다.
“이런… 대체 얼마나 오래 닫혀 있었던 거야?” 서하가 코를 막았다.
유나는 마법 등불을 공중에 띄워 올렸다. 등불이 뿜어내는 푸른빛이 좁고 구불구불한 통로를 비췄다. 벽은 오랜 시간 물에 젖어 얼룩덜룩했고, 천장에서는 간간히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길고 긴 계단을 내려가자, 통로는 더욱 넓고 거대한 공간으로 이어졌다.
거대한 지하 공간의 중앙에는 투명한 유리벽으로 된 원통형 구조물이 서 있었다. 유리벽 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너머에서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빛은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주기적으로 강해졌다 약해지기를 반복했다.
“이게… 별의 심연인가?” 서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쿵. 쿵. 쿵.
아주 낮은 곳에서 울리는 듯한, 거대하고 둔중한 진동이 발밑에서부터 전해져 왔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심장을 뛰는 소리 같기도, 혹은… 거대한 무언가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했다. 소리는 유리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이게 뭐야…?” 유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들이 유리벽에 더 가까이 다가가자, 진동은 더욱 선명해졌다. 그리고 그 둔중한 소리 사이로, 희미하게 무언가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인간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아니면… 무언가 고통받는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한.
유나는 손을 뻗어 차가운 유리벽에 댔다. 그녀의 손바닥에 닿는 유리벽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유리벽 안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무언가가 더욱 강렬하게 빛을 발했다. 빛은 푸른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오묘한 색을 띠고 있었고, 마치 수많은 별들이 한데 뭉쳐 있는 듯한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빛은 기이하게도, 심연의 어둠 속에서 고통스럽게 꿈틀거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 빛 너머로, 끔찍한 형체가 흐릿하게 드러났다.
형체는 거대했다. 수많은 촉수들이 뒤엉켜 있는 듯했고, 그 촉수들 사이에서… 희미하게 인간의 얼굴 같은 것이 여러 개 박혀 있는 듯 보였다. 형체는 빛 속에서 고통스럽게 뒤틀리고 있었고, 그 움직임에 맞춰 쿵. 쿵. 쿵. 하는 진동이 격렬해졌다.
“이게… 대체… 뭐야…?” 서하가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얼굴은 공포로 질려 있었다. “별이 울고 있다는 게… 저걸 말한 거였어?”
유나의 눈은 고통스럽게 빛나는 형체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것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아니, 고통받는 무언가였다. 그것은 마법 에너지의 거대한 근원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그 에너지는 비명과 절규로 이루어진 듯했다.
*쉬이이익!*
갑자기 유리벽 중앙에서 엄청난 마법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지하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천장에서 먼지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봉인 마법이 일시적으로 약해지거나, 아니면 안에 갇힌 무언가가 격렬하게 저항하는 것 같았다.
“젠장! 들킬 거야! 경보가 울릴 거야!” 서하가 다급하게 유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유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유리벽 속에서 고통스럽게 발버둥 치는 형체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저것은 이 학원의… 아니, 어쩌면 이 세상의 근간을 이루는 마법 에너지의 원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원천은 끔찍하게도, 희생과 고통 위에서 유지되고 있는 듯했다.
그때, 유리벽 안의 형체가 유나를 향해… 아니, 허공을 향해 마치 도움을 청하는 듯한, 절규 어린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은 수많은 별들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듯한 아픔을 담고 있었다.
유나의 뇌리에 엘레나 선배의 마지막 기록이 스쳐 지나갔다.
*‘이 별의 요람은… 피로 자라는 꽃과 같다. 그 아름다움 아래, 끔찍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별이 아니었다. 별의 심연에 갇힌 것은… 별을 꿈꾸는 존재들의 고통스러운 잔해였다.
유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 학원이, 그토록 찬란하게 빛나는 마법의 힘을 어디서 얻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진실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잔혹했다.
바로 그때, 멀리서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려왔다. 순찰 마법사들이었다.
“젠장! 유나, 도망쳐야 해!”
서하가 다시 한번 유나를 잡아끌었고, 이번에는 유나도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은 탈출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이 본 ‘끔찍한 금기’는, 과연 어떤 파장을 불러올 것인가? 유나의 심장은 격렬하게 울렸다. 학원의 빛나는 명성 아래, 어둠 속에 감춰진 절규가… 이제 막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