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하 미궁, 그림자의 울림
“서연아, 넌 진짜 미쳤어.”
현우가 돋보기로 고문서의 깨진 문양을 살피던 나를 향해 낮게 으르렁거렸다. 평소 같으면 냉철함을 잃지 않는 녀석의 얼굴에는, 지금 짜증과 함께 희미한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미쳤다는 건 네 뇌가 할 말을 잃었다는 은유겠지.”
나는 태연히 대꾸하며 낡은 종이 위에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먼지 쌓인 아르카나 학원 고문서 보관실. 이곳은 원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지만, 현우의 치밀한 사전 작업과 내 요란한 소음 마법 덕분에 잠시 ‘비밀의 화원’이 되어 있었다.
“은유든 뭐든, 우린 지금 선을 넘고 있어. ‘그곳’에 대해 조사하는 건 금기야. 지난번에도 말했잖아, 30년 전 ‘피의 재앙’ 이후로….”
“그 30년 전 재앙에 대해선 학원 기록에도 딱 세 줄만 적혀 있어. ‘지하 구역 봉쇄. 원인 불명. 사망자 다수.’ 이게 전부야. 심지어 희생자 명단조차 제대로 없어. 뭔가 숨기고 있다는 뜻이잖아.”
나는 현우의 말을 잘라먹으며 책상 위 지도에 손가락을 짚었다. 지도는 아르카나 학원 지하 구조를 대략적으로 나타낸 것이었는데, 유독 한 구역만이 붉은색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절대 접근 금지’라는 경고 문구와 함께.
“민준이 실종된 곳이 어디라고 했지?”
내 질문에 현우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답했다.
“…구 도서관 별관 지하 입구 근처. 그 망할 금지 구역 바로 옆이지.”
민준은 우리보다 한 학년 아래의 후배였다. 마법 실력은 평범했지만 호기심 많고 명랑해서 선후배들 모두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런 민준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학원은 ‘야간 통행 금지를 어기고 무단 이탈했다’는 시덥잖은 소문만 흘릴 뿐, 적극적인 수색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너무 불길했다.
“이거 봐. 며칠 전에 민준이 방에서 발견된 거야.”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황동 나침반을 현우에게 내밀었다. 정교한 마법 세공이 돋보이는 나침반은 바늘이 온통 부서져 너덜거렸지만, 희미하게 푸른빛을 내고 있었다. 학원생들이 마법 에너지를 감지하거나 특정 마법진을 찾는 데 사용하는 ‘마력 추적 나침반’이었다.
“바늘이… 온통 부서졌는데?”
현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정확히 말하면, *아래를 향해 부서졌어*. 어떤 강력한 마법 에너지에 휘말려 바늘이 녹아내리면서도, 마지막까지 가리키던 방향은 바로… 지하야.”
내 말에 현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민준이 그 ‘금지된 지하 구역’에 휩쓸렸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그리고 학원이 필사적으로 감추려 했던 진실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서연아, 제발. 섣부른 행동은 위험해.”
“민준이가 사라졌어. 섣부른 행동이 아니라, 최소한의 인간적인 도리라고 생각해.”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내 안에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의구심이 들불처럼 번져 있었다. 학원 곳곳에 스며든 음습한 기운과, 가끔씩 밤이면 들려오던 불분명한 속삭임들. 그 모든 것이 이 지하 금지 구역과 연결되어 있다는 직감이 날 사로잡았다.
“어차피 나 혼자 갈 생각이었어. 넌 여기 남아서 내가 혹시라도 돌아오지 못했을 때….”
“닥쳐! 네가 혼자 가서 엉뚱한 짓을 저지를 걸 아는데, 내가 가만히 있겠냐? 이 멍청한 재능 덩어리야!”
결국 현우는 포기한 듯 두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걱정과 불길함이 가득했다. 우리는 최소한의 비상 마법 도구와 학원 지도를 챙겨, 아무도 없는 밤을 틈타 구 도서관 별관으로 향했다.
별관은 오래되고 낡아 있었다. 먼지와 거미줄이 자욱했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소리가 귀를 거슬렸다. 창문 하나 없는 탓에 어둠은 더욱 짙었고, 우리는 오직 마법 램프의 희미한 빛에 의존해야 했다.
“이쪽이야.”
민준의 나침반이 마지막으로 가리켰던 곳. 낡은 책장들을 이리저리 밀어내자, 벽 한가운데 거대한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육중하고 오래된 철문에는 녹이 슬어 있었고, 기이한 형상의 문양이 복잡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게… 지하 입구인가?”
현우가 램프를 바짝 들고 문양을 살폈다.
“고대 봉인 마법진이야.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는 뜻이지. 이 안에는 분명…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아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거야.”
내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동시에 묘한 흥분감에 손끝이 저릿했다.
“내가 열게. 넌 뒤에서 내 마법을 보조해.”
철문에 손을 대자, 소름 끼치는 냉기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봉인 마법진이 흐릿하게 빛나며 저항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집중했다. 나의 마법 에너지가 봉인 마법진을 덧씌우자, 철문이 서서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굉음과 함께 봉인 마법진이 깨지고, 묵직한 철문이 안쪽으로 밀려 열렸다.
새로운 어둠이 우리를 맞았다. 램프 불빛조차 제대로 흡수하는 듯한, 먹먹한 어둠이었다. 안쪽에서 불어오는 공기는 눅눅하고 축축했으며, 역겨운 흙비린내와 함께 코를 찌르는 곰팡이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
툭. 툭. 툭.
무언가가 벽에 부딪히는 듯한, 혹은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불규칙한 소음이었다.
“가자.”
나는 현우를 돌아보지도 않고 먼저 발을 디뎠다. 내 발밑에서 눅진한 흙이 짓밟히는 소리가 났다. 현우가 내 뒤를 따르며 조심스럽게 마법 보호막을 펼쳤다.
입구는 완만한 경사의 돌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계단은 끝없이 아래로 이어지는 듯했고, 양쪽 벽은 거친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벽 곳곳에는 이끼가 피어 있었고, 축축한 물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우리는 묵묵히 내려갔다. 십 분이 넘게 걸었을까, 마치 땅속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기온은 점점 더 차가워졌고, 공기는 더욱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툭. 툭. 툭.
그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졌다. 이제는 둔탁한 금속성 소리로 변한 듯도 했다.
“서연아, 잠시만.”
현우가 내 팔을 붙잡았다. 녀석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뭔가… 느껴져. 아주 강력하고 불쾌한 마법 에너지야.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 말을 듣자 나 또한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평소 현우는 감각 마법에 능했다. 그가 ‘살아있는 것처럼’이라고 표현할 정도라면, 단순한 봉인 마법진의 잔류 에너지가 아닐 터였다.
계단이 끝나고, 우리는 넓은 공간에 다다랐다.
그곳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이었다. 천장은 불분명한 높이로 솟아 있었고, 거대한 돌기둥들이 불규칙하게 솟아 있었다. 램프 불빛이 닿는 범위 너머로는 어둠이 심연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툭. 툭. 툭.
소리는 이제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소리의 근원지를 향했다.
그리고 곧, 우리는 그곳에서 끔찍한 광경을 마주했다.
거대한 돌기둥 중 하나에, 뭔가 덩어리진 것이 붙어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검붉은 곰팡이나 이끼 덩어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램프를 더 가까이 비추자, 그것은 곰팡이가 아니었다.
수십, 수백 개의 눈알들이었다.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인 눈알들이 마치 젤리처럼 벽에 들러붙어 있었다. 어떤 눈은 노랗게 썩어가고 있었고, 어떤 눈은 핏발이 서서 끔찍하게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눈꺼풀 없는 그것들은 끔찍한 고통에 일그러진 채, 기괴한 방향으로 제각각 흔들리고 있었다.
툭. 툭. 툭.
그 소리는 다름 아닌, 그 눈알들 중 일부가 돌기둥에서 떨어져 바닥에 굴러떨어지는 소리였다. 바닥에는 이미 깨지거나 터져버린 눈알들이 끔찍하게 널려 있었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현우는 이미 질겁한 듯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생명체의 눈알이었다. 아니, 살아있었던 생명체의 눈알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고통스럽게, 하지만 우리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그때, 저 안쪽 어둠 속에서 아주 낮은 울림이 들려왔다.
쉬이이이익—
마치 거대한 숨을 내쉬는 듯한, 혹은 차가운 바람이 벽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듯한 소리.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섬뜩한 정적이 공간을 지배했다. 눈알들의 끔찍한 움직임마저도 일시 정지한 듯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눈알들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심연에는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훨씬 더 거대하고 끔찍한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것을.
내 심장이 발악하듯 쿵쾅거렸다. 온몸의 세포가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차마 발걸음을 돌릴 수 없었다. 내 안의 호기심이, 민준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이 끔찍한 공포를 짓누르고 있었다.
쉬이이이익—
다시 한번 울림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가까이, 마치 우리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현우가 얕은 비명을 지르며 나를 잡아끌었다.
“서연아, 안 돼! 이건… 이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때, 어둠 속에서 끔찍한 형체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길고 검은 촉수… 아니, 팔인가?
너무나도 빠르게 지나가서,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찰나의 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보았던 모든 생명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말 그대로 ‘이계의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형체가 지나간 자리, 돌기둥에 붙어 있던 수많은 눈알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돌아봤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묶인 것처럼.
그리고 그 모든 눈알들의 시선 끝에는, 단 하나의 존재가 있었다.
어둠 속,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무언가*.
차가운 비늘이 비벼지는 듯한 소리, 뼈가 삐걱거리는 듯한 소리가 저 깊은 곳에서부터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졌다.
쉬이이이익—
울림은 이제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가운 바람을 타고 우리 내면으로 파고드는, 끈적하고 눅진한 목소리였다.
*…들어왔구나…*
그 목소리는 수천 개의 다른 목소리들이 한데 엉겨 붙어 속삭이는 듯했다.
*…너희들의… 어둠이… 깊어지는구나…*
나는 공포에 질려 숨조차 쉴 수 없었다. 현우는 이미 공포에 질린 채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어둠 속의 존재가 한 발짝,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램프 불빛이 미미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꺼질 듯이 약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눈앞의 돌기둥에 붙어 있던 눈알들 중 가장 크고 섬뜩한 핏발 선 눈 하나가, 번뜩 빛을 내더니 일제히 팽팽하게 찢어지며 갈라졌다.
그 틈새로 보이는 것은… 우리의 눈이 감히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광경이었다.
붉고 검은 실핏줄이 복잡하게 얽힌 심연. 그 속에서 불분명한 형체들이 일그러지고 변형되는 모습.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섬광처럼 터져 나오는 끔찍한 웃음소리가 우리를 덮쳐왔다.
끼이이이이익— 꺄하하하하하하!
마치 온 세상의 비명과 고통이 한데 엉켜 터져 나오는 듯한, 광기 어린 웃음소리였다.
우리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도망쳐!”
현우가 소리쳤지만, 이미 내 다리는 돌처럼 굳어 있었다.
내 시선은 찢어진 눈알 틈새, 그 다른 차원의 심연에 못 박혀 있었다.
그 순간, 섬뜩한 어둠 속에서 기괴하고 거대한 그림자가 느릿하게 움직이며 우리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그림자의 한가운데에서, 민준의 마력 추적 나침반이, 아까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끔찍한 푸른빛을 내며… **산산조각 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