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이 유리창을 후려치는 소리가 이명처럼 귓가를 울렸다. 27층, 도시의 고층 아파트 중에서도 제법 높은 위치였지만, 밖에서 뿜어져 나오는 네온사인들의 피로한 빛은 기어코 창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거실을 음습하게 물들였다. 지혁은 낡은 홀로그램 태블릿을 끄고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억지로 잠을 청해보려 했지만, 등 뒤에 닿는 쿠션의 감촉조차 어쩐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밤이었다.
“아리스, 조명 30%.”
지혁이 낮게 읊조리자 천장의 매립등이 부드럽게 밝아졌다. 인공지능 ‘아리스’는 평소처럼 나긋한 여성의 목소리로 응답했다.
“네, 지혁님. 편안한 밤 되세요.”
하지만 그 소리가 마치 비웃음처럼 들렸다. 편안한 밤? 지난 몇 주간, 지혁의 아파트는 ‘편안함’이라는 단어와는 영원히 결별한 듯했다. 처음엔 사소했다. 리모컨이 제자리에 없거나, 분명 잠가둔 문이 열려 있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그는 피곤해서 그런 것이라 치부했다. 그러나 점차 스케일이 커지기 시작했다. 주방의 컵이 혼자 떨어져 깨지고, 침실의 서랍이 덜컹거렸다. 급기야 지난밤에는 홀로그램 스크린이 지지직거리는 노이즈 속에서 기괴한 형태로 일그러지는 걸 목격했다.
지혁은 피로에 절어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감히 잠들 수 없었다.
바로 그때, 거실 한편에 놓인 작은 인테리어 식물이 흔들렸다. 바람이 불 리 없는 실내였다.
지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식물은 멈춰 있었다. 그저 지혁의 눈이 피곤해서 잘못 본 것일 테다. 그는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진 소리는 착각이라 할 수 없었다.
‘사각… 사각….’
어디선가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손톱으로 벽지를 긁어내는 듯한 섬뜩한 소리였다.
지혁은 숨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주방이었다.
“아리스, 주방 조명 100%.”
“네, 지혁님. 주방 조명을 밝힙니다.”
환해진 주방은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다. 칼 블록은 그대로였고, 식기세척기 문도 닫혀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제자리에 있었다.
지혁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스트레스로 인한 환청일 수도 있었다.
그가 다시 소파에 기댔을 때였다.
‘콰앙!’
냉장고 문이 활짝 열리더니, 안에 들어있던 플라스틱 음료병 하나가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안에서 뿜어져 나온 냉기는 주방을 순식간에 하얗게 만들었다.
지혁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환청도, 착각도 아니었다.
“젠장…!” 그가 낮은 욕설을 내뱉었다.
“아리스, 냉장고 문 닫고, 주방 상태 점검해.”
“네, 지혁님. 냉장고 문이 열려 있습니다. 닫습니다.”
‘윙-’ 하는 소리와 함께 냉장고 문이 스르륵 닫혔다. 하지만 지혁은 알고 있었다. 아리스는 그저 시스템에 입력된 대로 반응할 뿐, 이 기괴한 현상의 원인을 찾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갑자기 거실 벽에 걸린 대형 디스플레이에 노이즈가 일기 시작했다. 선명하던 도심 야경이 자글거리는 흑백 화면으로 바뀌더니, 이내 정지된 화면에 섬뜩한 글자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나가.]
지혁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건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직접적인 메시지였다.
“누구야? 누구냐고!” 지혁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그러나 디스플레이는 묵묵부답이었다. 그저 [나가.]라는 글자만이 붉게 깜빡였다.
그 순간, 지혁의 등 뒤에서 갑자기 냉기가 훅 끼쳐왔다. 마치 누군가 바로 뒤에서 숨을 내쉬는 듯한 기분이었다. 지혁은 소름 끼치는 감각에 뒤돌아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아니, 없어. 아무것도 없어.’ 그는 필사적으로 되뇌었다.
‘틱, 틱, 틱….’
작은 전자음이 들려왔다. 시계를 확인하자 새벽 2시 13분.
소파 옆에 놓인 홀로그램 태블릿이 저절로 켜졌다. 화면에는 아무것도 뜨지 않았지만, 렌즈에서 푸른빛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마치 누군가 그를 지켜보는 눈처럼.
지혁은 손을 뻗어 태블릿을 끄려 했다. 손가락이 화면에 닿는 순간, 태블릿이 격렬하게 진동하더니 ‘삐이이이익-‘ 하는 찢어지는 듯한 경고음을 내뱉었다.
“아리스, 모든 시스템 비활성화! 네트워크 연결 끊어!” 지혁이 절박하게 외쳤다.
“네, 지혁님. 모든…”
아리스의 음성이 갑자기 끊겼다. 경고음도 멈췄다.
침묵. 그러나 그 침묵은 더욱 끔찍했다.
지혁은 주변을 둘러봤다. 아파트 전체의 조명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거실 한가운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묵직한 유리 화병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혁은 얼어붙은 듯 그 광경을 지켜봤다. 화병은 공중에서 흔들거리더니, 이내 거실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유리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지혁의 뺨에 날아든 파편이 미세한 상처를 남겼다. 따끔거리는 통증과 함께 피가 맺혔다.
이건 물리적인 공격이었다.
지혁은 숨을 헐떡이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 분노와 공포가 뒤섞여 일렁였다.
“그래, 어디 한 번 해봐! 대체 뭘 원하는 건데! 뭘 하려고 이 지랄이냐고!”
그의 목소리가 아파트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침실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안은 칠흑 같았다.
동시에, 거실 벽의 대형 디스플레이가 다시 노이즈와 함께 켜졌다.
이번에는 글자가 아니었다.
흐릿한 형체가 디스플레이에 나타났다. 처음에는 단순히 노이즈의 패턴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점차 선명해졌다.
검고 긴 머리카락, 움푹 들어간 눈, 그리고 일그러진 입꼬리.
마치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뒤틀린 악몽처럼 변해버린 듯한,
지혁과 너무나도 닮은, 그러나 너무나도 이질적인 얼굴이 디스플레이를 가득 채웠다.
그것은 지혁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그러진 입술을 움직였다.
[네가… 내… 집을… 차지했잖아….]
섬뜩한 목소리가 디스플레이에서 흘러나왔다.
동시에, 침실 안쪽에서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거대한 발톱을 드러내며 문밖으로 기어 나오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지혁은 등 뒤에 솟아나는 털들을 느꼈다.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어디로? 이 아파트의 문은 이미 그의 의지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디스플레이 속의 얼굴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은 디스플레이의 유리를 뚫고 나오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며,
지혁의 목을 향해 뻗어왔다.
차가운 공기가 그의 목을 스치는 순간, 아파트 전체의 조명이 일순간 암전되었다.
완벽한 어둠 속에서, 지혁은 섬뜩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아니, 그 웃음소리는 분명 그의 것이었다.
바로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누군가의 차가운 손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