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어둠이 제국의 거대한 그림자처럼 산등성이를 덮었다. 칼날 같은 겨울바람이 찢어진 초가 지붕을 스치며 휘파람을 불었다. ‘한숨골’이라 불리는 이 작은 마을은 얼어붙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제국의 감시병들이 순찰을 돌 때마다 들려오는 규칙적인 발굽 소리만이, 그들의 숨통을 조이는 듯한 공포를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낡고 허물어진 창고의 지하 저장고. 쾨쾨한 흙냄새와 함께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찔렀다. 촛불 하나가 겨우 어둠을 밀어내며 희미한 빛을 발했고, 그 빛 아래 세 사람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강하. 그는 무릎을 세우고 앉아 낡은 지도를 펼쳐놓았다. 스물셋.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에는 피로와 결의가 뒤섞여 있었다. 며칠 밤을 새운 듯 뺨은 수척했고, 거친 손은 굳은살로 가득했다. 그의 등 뒤에는 제국군과의 작은 충돌에서 얻은 흉터가 길게 뻗어 있었다.

맞은편에는 할멈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온몸에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주름이 가득했지만, 꿰뚫어 볼 듯 날카로운 눈빛은 여전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마을의 정신적 지주였다. 젊은이들이 뜨거운 피를 주체하지 못할 때마다, 그녀는 차가운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그들의 옆에는 지운이 앉아 있었다. 강하보다 겨우 한 살 어린 그는 불덩이 같았다.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리는 어깨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제국군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며칠 전, 제국군이 그의 여동생을 강제로 끌고 간 후로, 지운의 눈빛은 한 번도 평온했던 적이 없었다.

“이번 세금 징수는 전례가 없었어.” 할멈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분노가 서려 있었다. “곡식을 털어가는 것도 모자라, 우리 아이들을, 지운의 막내까지… 끌고 갔어. 광산으로 끌려가면… 살아서 돌아올 가망이 없어.”

지운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더는 못 참아, 강하 형! 이렇게 지켜만 보고 있을 순 없어! 차라리 죽는 게 나아!”

강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낡은 지도에 박혀 있었다. 지도 위에는 몇 개의 작은 표시가 희미하게 그려져 있었다. 제국군 주둔지, 보급로, 그리고 마을 어귀의 감시탑.

“지운아.” 강하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다. “너 혼자 돌진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그저 제국군의 칼날에 스러질 뿐이야. 우리는… 그렇게 무의미하게 죽을 순 없어.”

“그럼 형은 뭘 할 건데?” 지운의 목소리에는 비난과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매번 똑같은 말뿐이잖아! 기다리라고, 때를 보라고! 그런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우리의 피와 살이 다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아니면 다음엔 내 부모님마저 끌려갈 때까지?”

할멈이 지운의 어깨를 붙잡았다. “진정해라, 이 녀석아. 강하가 아무 생각 없이 이러는 줄 아느냐.”

강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지운의 분노를 이해한다는 듯한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지운아, 난 한 번도 싸우지 않겠다고 말한 적 없어. 단지… 이 싸움이 우리의 마지막이 되지 않으려면,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을 뿐이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촛불을 응시했다. 어린 시절, 제국군이 자신의 아버지를 채찍질하던 모습이 아른거렸다. 억울하게 빼앗긴 땅에서 흘러나오던 비명소리. 그 모든 기억이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건 강하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준비… 무슨 준비 말이야? 우린 가진 게 없어. 변변한 무기도, 병사도.” 지운의 목소리가 한풀 꺾였다.

“아니, 우린 더 큰 것을 가졌어.” 강하의 눈빛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잃을 것이 없는 자들의 용기. 그리고…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의 분노.”

그는 지도를 손으로 쓸었다. “제국의 힘은 거대해. 하지만 그 거대한 몸집은 동시에 약점이 될 수도 있어. 제국군은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고, 보급로는 길고 취약해.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제국의 수탈에 지쳐 우리와 같은 마음을 품은 이들이 비단 우리 마을뿐만이 아니라는 거야.”

“다른 마을에도… 우리와 같은 뜻을 가진 이들이 있단 말이냐?” 할멈의 눈이 커졌다.

“네, 할멈.” 강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간 몰래 접촉해왔습니다. ‘검은 깃발’ 아래 뜻을 모으기로 한 이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봉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운은 강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동안 강하가 ‘기다리라’고 했던 말의 진짜 의미를 이제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저 가만히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그는 물밑에서 거대한 움직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지금이 그때라는 거야?” 지운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분노가 남아 있었지만, 그와 함께 작은 희망의 불꽃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강하는 다시 지도 위에 손가락을 짚었다. “제국군은 다음 달 보름에 대규모 보급 물자를 수송할 계획이야. 그들이 가장 경계심이 풀릴 때, 가장 취약한 순간을 노릴 거야.”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어. 더는 잃을 것도 없어.”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내일 새벽, 우리는 ‘검은 깃발’을 들고 일어설 거야.”

지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할멈 역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내일 새벽이라고? 그렇게 갑자기?” 지운이 되물었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어. 제국군의 감시는 날마다 더 강화되고 있고, 다른 마을의 동지들도 더는 기다리기 힘들다고 연락이 왔어. 이대로 계속 미루다간, 모두가 지쳐 쓰러질 거야. 기회는 지금이야. 모든 것을 걸어야 해.” 강하의 시선은 촛불 너머, 어둠 속에 잠긴 마을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할멈은 말없이 강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에는 걱정과 함께, 묵묵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입가에 미세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이제 때가 되었구나. 제국의 심장에 박힌 마지막 가시를 뽑아낼 때가.”

할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서 동지들에게 전해라. 오늘 밤, 어둠이 깊어지면 모두 모여 마지막 준비를 하라고. 새벽닭이 울기 전, 우리는 이 땅의 역사를 새로 쓸 것이다.”

지운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던 분노는 이제 뜨거운 결의로 변해 있었다. 그의 눈은 더 이상 절망으로 흐려지지 않았다. 오직 타오르는 불꽃만이 가득했다.
“알겠습니다, 형님. 제 목숨을 걸고 따르겠습니다!”

강하는 지운의 어깨를 힘껏 두드렸다. 그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말없이도 서로의 각오가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촛불은 여전히 희미하게 일렁였지만, 그 빛은 세 사람의 그림자를 더욱 짙고 거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지하 저장고를 나서는 지운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더 이상 주저함도, 두려움도 없었다. 그의 등 뒤로, 강하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다짐이 새어 나왔다.

“아버지… 그리고 잃어버린 모든 이름들이여. 부디 지켜봐 주소서. 이 폭풍의 시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