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은 늘 그랬듯이 퇴근 후 축 늘어진 몸을 이끌고 1102호 현관문을 열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쨍한 형광등 불빛 아래로는 보이지 않던 이질감이 코끝을 스쳤다. 곰팡이 냄새 같기도 하고, 쇠붙이가 녹스는 비릿한 냄새 같기도 한, 불쾌한 기운이었다.
“젠장, 환기를 안 시켰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스위치를 눌렀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거실의 등이 켜져야 하는데, 희미한 깜빡임만 몇 번 반복하다가 이내 먹통이 되었다.
“뭐야, 전구가 나갔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거실로 들어섰다. 이상했다. 분명 아침에 나갈 때 깨끗하게 정리해두었던 식탁 위에는 며칠 전 먹다 남긴 인스턴트 커피 봉투가 널브러져 있었고, 소파 위에는 어제 벗어던진 양말 한 짝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내가 이렇게 건망증이 심했나?”
피곤해서 착각하는 거겠지, 애써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방으로 향했다. 침실 문을 열자 싸늘한 공기가 지훈을 맞았다. 에어컨을 켜지도 않았는데 한겨울처럼 서늘한 기운에 몸을 으스스 떨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젠장, 정말 이상한데.”
그날 밤, 지훈은 잠자리에 들었지만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침대 머리맡의 시계가 똑딱거리는 소리마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새벽 두 시쯤이었을까, 거실에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지훈은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발바닥까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도둑인가? 아니, 이런 아파트에 도둑이 들 리 없지. 게다가 그 소리는 무언가가 떨어진 소리가 아니라, 무언가가 *움직인* 소리에 가까웠다.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어둠 속에서 거실이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달빛이 베란다 창을 통해 아주 약간 스며들었지만, 사물을 분간하기는 어려웠다.
“누구… 없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그 순간, 부엌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접시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다 벽에 부딪혔다.
“젠장, 뭐야! 뭐야, 대체!”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살폈다. 부엌 쪽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그림자가 보였다. 사람의 형상은 아니었다. 키가 크고 왜곡된, 마치 투명한 막대기 여러 개가 합쳐진 듯한 형태의 그림자였다. 그것은 천천히, 마치 주저하는 듯이 거실로 나왔다.
그림자가 달빛을 등지고 나타나자, 지훈은 그제야 그것의 실체를 희미하게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의 오래된 거실 스탠드였다. 그런데 스탠드는 스스로 발이 달린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고, 심지어 전선은 허리띠처럼 조여든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전등갓은 마치 거대한 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지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스탠드가 앞으로 훅 다가왔다. 그리고 그 빛이 없는 전구에서 차가운 공기가 뿜어져 나오며 지훈의 얼굴을 때렸다. 동시에, 스탠드의 금속 다리들이 ‘탁, 탁, 탁’ 소리를 내며 바닥을 짚고 빠르게 움직였다. 마치 거미가 기어 다니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지훈은 혼비백산하여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손잡이를 잡아 돌리려는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안쪽으로 움푹 들어갔다. 철제 문이 마치 진흙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문고리는 아예 떨어져 나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럴 수가…!”
이제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스탠드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금속 다리들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했다. 지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장 가까운 방인 서재로 뛰어들어 문을 잠갔다.
그러나 서재 안도 안전하지 않았다.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서류들이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가 흐트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책꽂이의 책들이 한 권씩 뽑혀 나와 벽에 부딪혔다. 지훈은 공포에 질려 벽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던 낡은 지구본이 스스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릿느릿 돌던 지구본은 점점 속도를 높여갔다. 그러다 갑자기,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지구본의 축이 부러지더니, 지구본 표면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은 마치 작은 블랙홀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빛이 점점 강렬해지며 방 안의 사물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류들은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책들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벽에 걸려 있던 그림 액자는 종잇장처럼 구겨지더니 빛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어갔다.
“안 돼! 안 돼!”
지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절규했다. 빛은 이제 지훈의 몸까지 휘감는 듯했다.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온몸의 세포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는 비명을 질렀지만, 그 소리는 빛 속으로 스며들어 희미해졌다.
눈을 다시 떴을 때, 지훈은 더 이상 자신의 서재에 있지 않았다.
차가운 돌바닥이 발아래에 깔려 있었다. 주변은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바람 소리가 기괴한 공간임을 알려주었다. 벽은 축축했고, 코를 찌르는 곰팡이 냄새가 진동했다. 천장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그의 눈앞에는 익숙한 서재의 책상이 아니라, 이끼 낀 거대한 돌덩이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녹슨 칼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등 뒤에서 ‘스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낡고 삐걱거리는 문이 보였다. 그 문은 분명, 아까 전까지 지훈의 서재 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거대한 덩굴에 휘감긴 채,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의 입구처럼 변해 있었다. 문틈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새어 나왔고, 그 안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거렸다.
지훈은 깨달았다. 자신의 아파트는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라… 변했다. 기괴한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그의 아파트를 삼키고,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변형시켜버린 것이다. 이곳이 바로 그 모든 혼란의 원인, 살아있는 던전이었다.
“젠장…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그의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손에 땀을 쥐며 녹슨 칼을 뽑아들었다. 칼날은 희미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문 안쪽, 빛이 깜빡이는 어둠 속에서, 마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철컥, 철컥…*
그것은 발소리였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존재의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훈은 숨을 헐떡이며 칼을 꽉 움켜쥐었다. 이제 도망칠 곳도, 돌아갈 곳도 없었다. 남은 건 오직, 이 기괴한 던전 속에서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