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아파트 1402호는 미나에게 완벽한 도피처였다. 낡은 원룸의 꿉꿉한 냄새도, 옆집의 시끄러운 다툼 소리도 없는, 갓 지은 건물 특유의 뽀송하고 고요한 공간. 넓은 창문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촘촘히 박힌 밤 풍경은 꼭 크리스털 같았다. 미나는 이 공간이 자신의 새로운 시작을 축복하는 듯 느껴졌다.
이사 온 첫 주,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다만, 가끔 아주 사소한 일들이 미나의 눈을 갸웃하게 만들었다. 분명 침대 옆 협탁에 올려두었던 안경이 아침에는 식탁 위에 놓여 있다거나, 굳게 닫아두었던 베란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아, 내가 깜빡했나? 이사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미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워낙 건망증이 심한 편이었고, 이사 피로가 겹쳐 정신이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새집증후군 때문인지 가끔 묘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지만, 환기를 하면 금세 사라졌다.
두 번째 주에 접어들자, 미나는 조금씩 잠을 설쳤다. 밤마다 아파트 어딘가에서 ‘툭, 툭’ 하고 작은 돌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위층이나 옆집의 생활 소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리는 점점 더 집 안에서 나는 것처럼 가까워졌다. 가끔은 마치 누군가 무언가를 긁는 듯한 ‘스륵, 스륵’ 하는 소리도 들렸다.
어느 날 밤, 잠이 오지 않아 거실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고 있는데, 주방 쪽에서 ‘달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나는 움찔했다. 도둑? 그러나 현관문은 이중 잠금장치까지 완벽하게 걸려 있었다.
조심스럽게 주방으로 가보니, 싱크대 위에 놓여 있던 컵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 있었다. 깨진 유리 파편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젠장… 뭐야, 대체?”
미나는 소름이 돋았다. 컵은 싱크대 가장 안쪽에 놓여 있었고, 굳이 떨어질 이유가 없었다. 더 이상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어려웠다.
그때부터 미나는 아파트가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거실의 스탠드 불빛이 아무 이유 없이 깜빡였다. 욕실의 거울에는 그녀가 닦아내도 금방 다시 뿌옇게 김이 서렸다. 밤이면 침대 발치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기곤 했다. 가끔은 흐릿한 시야 끝에서 검은 형체가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지만, 눈을 똑바로 뜨면 아무것도 없었다.
미나는 오랜 친구인 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연아, 나 요즘 너무 이상해. 우리 집이… 뭔가 이상하다고.”
수화기 너머 지연의 목소리에는 걱정보다는 피로가 섞여 있었다.
“미나야, 또 잠 못 잤어? 너 이사하고 나서 스트레스 엄청 받는 것 같더라. 너무 예민해진 거 아니야?”
“아니야, 진짜라니까! 어제는 컵이 저절로 떨어져서 깨졌어! 누가 던진 것처럼!”
“야, 설마. 네가 뭘 잘못 놓았겠지. 새로 지은 아파트에 무슨 유령이라도 붙어 있겠어? 불면증 심하면 병원에 가봐. 응?”
지연의 차분한 목소리는 미나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녀는 혼자였다. 이 아파트에서, 이 기이한 현상들과 함께.
미나는 현관문에 부적을 붙여볼까, 소금을 뿌려볼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자신이 정말 미쳐가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웠다. 대신 방마다 향초를 켜고, 밝은 음악을 틀어놓았다. 그러나 촛불은 바람도 없는데도 흔들렸고, 음악 속에서도 스륵거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 오후, 미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는 방금 따라놓은 따뜻한 커피 한 잔이 김을 내뿜고 있었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닫고 몇 초나 지났을까.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나는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후다닥 뛰어나와 보니, 커피잔은 바닥에 나뒹굴고, 뜨거운 커피는 소파 커버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잔을 쳐서 떨어뜨린 것 같은 광경이었다.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미나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완벽한 정적. 공포가 그녀의 뇌를 잠식했다.
그날 밤, 미나는 아예 잠을 잘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만 응시했다. 밤은 깊어지고, 집 안의 어둠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때였다. 거실에서 ‘쿵…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무거운 가구가 바닥에 질질 끌리는 듯한 소리였다.
미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발밑까지 내려앉는 듯했다.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거실에서, 복도를 지나, 그녀의 방문 앞으로.
‘쿵… 쿵… 드드득…’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미나는 숨을 죽였다. 더 이상 상상의 산물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그녀의 방문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삐걱거리며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으로 어둠이 길게 늘어졌다. 미나는 침대 머리맡에 놓인 스탠드를 황급히 켰다.
환한 불빛이 방을 채웠지만, 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그러나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거실의 모든 가구가 제자리를 벗어나 뒤죽박죽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소파는 뒤집혀 있었고, 식탁은 벽에 박혀 있었으며, 의자들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마치 거대한 힘이 이 모든 것을 휩쓴 것 같았다.
미나는 헛구역질이 났다. 이제 도망쳐야 했다. 지금 당장.
그녀는 현관을 향해 내달렸다. 하지만 현관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밀고 당겨도, 잠금장치를 풀어도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의 입이 닫힌 것처럼.
“열어! 열라고! 제발…!”
미나는 울부짖으며 문을 주먹으로 두들겼다. 그때, 등 뒤에서 차가운 기운이 확 밀려왔다. 마치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는 듯한 섬뜩한 감각이었다. 동시에, 집 안의 모든 불이 ‘파직!’ 소리와 함께 꺼졌다.
완벽한 어둠.
미나는 숨을 멈췄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귓가에 차갑고 스산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아주 가까이에서, 마치 낡은 기계가 마찰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여… 기… 있어…”
갈라지고 찢어지는 듯한, 인간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목소리. 등 뒤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에 미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몸은 이미 공포에 마비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파트 1402호는 다시 고요해졌다. 다만, 어둠 속에서 미나의 흐느낌만이 희미하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등 뒤에서, 무언가 차가운 것이 그녀의 목덜미를 휘감는 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날 밤,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크리스털처럼 반짝였지만, 1402호의 창문은 어떤 빛도 품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