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감긴 시간, 되살아난 증오**
숨이 턱 막혔다. 폐부를 찢는 듯한 고통에 눈을 번쩍 떴을 때, 천장은 낯설면서도 지독하게 익숙했다. 오래된 형광등의 깜빡임. 희미하게 들려오는 이웃집 아이의 울음소리. 쾨쾨한 먼지 냄새와, 땀에 절은 이불의 눅진한 감촉. 이 모든 것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아니, ‘어제’ 일이었다. 정확히 15년 전의 어제.
이진우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꿈? 악몽? 아니, 그는 알고 있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는 기묘한 빛에 휩싸였고, 눈을 다시 떴을 때 이곳이었다. 과거.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의, 그 끔찍한 배신이 싹트기 전의 시간.
“하… 하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광기 어린 웃음이었다. 온몸의 근육이 경련하듯 떨렸다.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거친 손. 굴곡진 삶이 남긴 흔적이었다. 그러나 거울 속의 자신은 달랐다. 앳된 얼굴, 생기 넘치는 눈빛. 아직 배신의 칼날에 꿰뚫리기 전의 자신이었다.
“한성호…”
낮게 읊조린 이름에 목구멍이 찢어지는 듯했다. 복수의 핏물이 다시 심장을 끓어오르게 했다. 15년. 그는 15년을 지옥에서 보냈다. 한성호, 그의 유일한 친구라고 믿었던 그놈에게 모든 것을 잃었다. 사업 아이템을 빼앗기고, 회사에서 쫓겨나고, 가족마저 풍비박산 났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까지… 그의 손아귀에 놀아나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마지막 순간, 병원 침대에 누워 죽어갈 때, 한성호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진우야, 미안하다. 네가 가진 건 너무나 빛났거든. 난 그게 늘 부러웠어. 그러니까… 이제 내 것이 되어야지.”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명했다. 그 빌어먹을 미소도.
“이번엔 다를 거다.”
이진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피 한 방울 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기억 속의 미래는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선택을 하는지.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오래된 구형 스마트폰. 액정에는 먼지가 뿌옇게 앉아 있었다. 날짜를 확인했다. 2008년 11월 12일. 정확히 그 날이었다. 그의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날.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낡은 노트북을 켰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팅되는 노트북 화면을 노려봤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돈이었다. 복수에는 막대한 자본과 권력이 필요했다. 과거의 그는 재능은 있었지만 돈이 없었고, 그 때문에 한성호에게 이용당했다.
이진우는 키보드를 두드렸다. 검색창에 특정 키워드를 입력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앞으로 몇 달 안에 전 세계를 강타할 기술 혁명의 조짐이 이미 여기서 시작되고 있었다. 과거의 자신은 그 기회를 알아보지 못하고, 한성호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엉뚱한 곳에 투자했다가 모든 것을 날렸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는 망설임 없이 특정 회사들의 주식 정보를 찾아봤다. 아직은 무명에 가까운 작은 기업들. 하지만 15년 후, 그들은 거대한 공룡이 되어 있을 터였다. 그는 계산기를 두드렸다. 지금 당장, 그가 가진 모든 돈을 끌어모아 이 주식들에 투자한다면… 엄청난 수익이 예상됐다.
“미안하다, 엄마.”
중얼거렸다. 그가 가진 돈은 부모님이 그를 위해 어렵게 모아둔 전 재산이었다. 과거의 그는 이 돈을 한성호가 추천한 ‘유망한’ 사업에 투자했다가 홀랑 날려버렸고, 그 충격으로 부모님은 몸져누웠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이 돈은 복수를 위한 씨앗이 될 것이었다.
그는 낡은 지갑을 꺼내 열었다.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몇 장과 신분증. 그리고… 한 장의 사진. 앳된 얼굴의 자신과, 옆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한성호. 과거의 이진우는 이 사진을 보며 우정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었다. 지금은 역겨움에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사진을 찢어버리려다 멈칫했다. 아니. 아직은 아니었다. 이 사진은 그가 복수를 잊지 않게 할 증거였다. 그는 사진을 다시 지갑 깊숙이 넣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표시를 확인한 이진우의 눈매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한성호]
피식,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정확히 이맘때쯤, 한성호는 그에게 연락을 해서 중요한 ‘사업 제안’을 할 터였다. 그리고 그 제안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 치명적인 독이었다.
“여보세요.”
최대한 평소와 같은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지만, 목소리 끝에는 미세한 떨림이 서려 있었다. 한성호는 눈치채지 못할 터였다. 그는 이진우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착각했으니까.
“진우야! 잘 지냈냐? 연락 한 번 없이 살더니, 잘 지냈으면 다행이다. 나야, 성호!”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과거와 똑같이 활기찼다. 그 특유의 능글맞은 친근함. 이진우는 그 목소리에 담긴 가시를 이제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성호? 오랜만이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웬일이야?”
“하하, 별일 있겠냐! 그냥 오랜만에 친구 목소리도 듣고 싶고… 사실은 중요한 얘기가 좀 있어서. 너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되냐?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밥이라도 한 끼 같이 하자고.”
‘중요한 얘기.’ 그 ‘중요한 얘기’는 그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을 기만적인 제안이었다.
“이번 주말? 글쎄… 갑자기 잡힌 일정이 좀 있어서.”
이진우는 일부러 뜸을 들였다. 과거의 그는 한성호의 연락에 기뻐하며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달려나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한성호가 조급해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어? 그래? 바쁜가 보네… 아쉽다. 정말 중요한 건데 말이야.”
한성호의 목소리에 실망감이 섞였다. 동시에 미묘한 조바심도 느껴졌다. 이진우는 그의 표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을 터였다.
“뭐, 그렇게 중요한 일이면… 평일에 잠깐 만나던가. 저녁 식사는 좀 힘들 것 같고, 점심은 잠깐 시간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오! 그래? 좋아, 좋아! 그럼 점심으로 하자! 내가 예약할게. 너 회사 근처로 갈까? 오랜만에 네 얼굴도 보고 싶고, 궁금한 것도 많고… 아, 그전에 혹시 무슨 일 생겼냐? 네 목소리가 좀 가라앉은 것 같아서.”
능숙한 연기였다. 걱정하는 척하며 그의 상태를 파악하려는 수작. 이진우는 코웃음 쳤다.
“별일 없어. 그냥 잠을 좀 설쳐서 그런가 보지. 걱정해줘서 고맙다.”
“야, 친구 사이에 당연한 거지! 그럼 날짜 정해지면 다시 연락할게! 꼭 보자, 진우야!”
전화가 끊겼다. 이진우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손끝에서부터 차가운 냉기가 흘러나왔다. 한성호. 친구의 가면을 쓴 살인마. 그의 눈앞에서 서서히, 고통스럽게 무너뜨려야 할 존재.
“친구? 하… 그래. 친구.”
이진우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그 미소에는 냉혹한 결의만이 담겨 있었다.
과거의 자신은 한성호의 ‘중요한 사업 제안’을 듣고 모든 것을 걸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이번에는 그 사업 제안을 역이용할 차례였다. 그는 한성호의 제안에 담긴 맹점을 알고 있었다. 한성호는 그 맹점을 이용해서 그를 파멸로 몰아넣을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그 맹점이 이진우에게 역전의 기회가 될 터였다.
그는 다시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다. 주식 차트와 그래프가 눈앞에서 춤을 췄다.
‘내일 당장 은행에 가서 돈을 인출하고…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어.’
이진우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복수를 위한 첫 단추는 이미 끼워졌다. 이제 되감긴 시간 속에서, 그는 조용히 칼날을 갈고 있었다. 세상은 아직 그의 변화를 알지 못했다. 한성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전히 순진한 친구, 이진우를 손쉽게 속일 수 있다고 믿을 터였다.
그 착각이야말로, 그가 치르게 될 가장 혹독한 대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