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했다. 온 세상이 회색 먼지와 피 냄새로 절여진 지 벌써 3년. 지혁은 오늘도 무너진 도시의 잔해 속을 헤치며 먹을 것을 찾아 나섰다. 그의 등에는 낡은 배낭이, 손에는 녹슨 철봉이 들려 있었다. 철봉은 무기가 아니었다. 그저 생존을 위한 또 하나의 몸뚱이였다.
“젠장, 이것도 없어.”
부서진 편의점의 진열대는 텅 비어 있었다. 남은 것이라곤 바싹 마른 좀비 시체 두어 구와, 바닥에 눌어붙은 검붉은 흔적들뿐. 지혁은 한숨을 쉬었다. 이젠 정말 바닥이었다. 사흘째 제대로 된 음식을 입에 대지 못했다. 목마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 쓰러진 건물 더미 사이로 희미한 움직임이 보였다. ‘살점들’. 지혁은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그들은 더 이상 사람이라 불릴 수 없었다. 찢어지고 곪아 터진 살덩이들이 맹목적인 허기에 이끌려 거리를 떠돌았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지혁은 폐허의 틈새로 몸을 숨겼다.
그들의 끔찍한 울음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지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는 안 된다. 어딘가, 아직 뒤져보지 않은 곳이 있을 것이다. 그의 시선은 부서진 상가 건물들 너머, 숲처럼 우거진 고층 빌딩 사이로 삐죽 솟아오른 낡은 기와지붕을 향했다. 오래된 절터. 아무도 가보지 않을 법한 곳이었다. 위험할 수도 있지만, 이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정글처럼 변한 도시 속을 헤치고 나아갔다. 덩굴식물에 뒤덮인 도로와, 뿌리 뽑힌 채 쓰러진 가로수들을 피해가며 한 시간 남짓 걸었을까. 마침내 낡은 절의 입구가 눈앞에 나타났다. 주위는 온통 잡초로 뒤덮여 있었고, 대웅전으로 보이는 본 건물은 지붕 일부가 무너져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의외로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긴… 좀 특이하네.”
지혁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흙먼지와 세월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건물 내부는 한낮인데도 어두컴컴했고, 고요함 속에서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살점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 오래되고 고요한 장소보다는, 피 냄새와 소란이 있는 곳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지혁은 안도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부서진 불상 조각들과 낡은 불경들. 딱히 먹을 것이나 쓸 만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대웅전 한편에 비스듬히 기울어진 돌탑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은 듯,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다. 혹시 그 안에 뭐가 있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로, 지혁은 돌탑 근처로 다가갔다. 돌탑 아래는 흙바닥이었다. 그런데 어딘가 다른 곳보다 단단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이거 뭐야?”
지혁은 철봉으로 흙을 조심스럽게 파냈다. 딱딱한 감촉. 돌이 박혀 있는 줄 알았는데, 흙을 걷어내자 이질적인 문양이 드러났다. 나무도, 돌도 아니었다. 뭔가 금속 재질 같았다. 힘겹게 주변의 흙을 더 걷어내자, 마침내 그 정체가 드러났다. 바닥에 박혀 있는, 정육면체 모양의 금속 상자였다. 오래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부식되지 않은 채, 묘한 광택을 띠고 있었다.
상자 위에는 손바닥만 한 원형 구멍이 뚫려 있었다. 지혁은 망설이다 손을 뻗어 구멍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보았다. 그 순간, 차가운 금속이 손끝에 닿자마자 찌릿한 전기가 온몸을 타고 흘렀다. 동시에 상자가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상자 안에는, 낡은 두루마리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일반적인 종이 두루마리가 아니었다. 부드러운 금속 재질로 만들어진 듯, 손에 쥐자 차가우면서도 묘하게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표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의 문자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어떤 문자는 마치 살아있는 듯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지혁은 조심스럽게 두루마리를 펼쳤다. 펼쳐지는 부분마다 은은한 빛이 퍼져나가며 고대 문자들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난생 처음 보는 문양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 등 뒤에서 희미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흐으으읍…”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구 쪽에, 살점 하나가 서 있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들어온 걸까. 찢어진 옷자락과 썩어가는 피부. 눈알은 이미 멀리 떨어져 나간 지 오래, 텅 빈 안와에서 흘러나오는 검붉은 액체가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살점은 지혁을 발견하고는 서서히 다가왔다.
지혁은 움찔했다. 철봉을 쥐었지만, 이 좁은 공간에서 놈을 상대하기는 버거울 터였다. 꼼짝없이 당하게 될 상황. 그는 공포에 질려 두루마리를 꽉 움켜쥐었다.
그 순간이었다. 두루마리에 새겨진 모든 문자들이 눈부신 빛을 내뿜으며 섬광처럼 터져 나왔다. 동시에 지혁의 온몸을 꿰뚫는 강력한 에너지가 솟구쳤다. 마치 전신의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의 손에 쥔 두루마리는 맥박처럼 고동치기 시작했다.
거대한 기운이 지혁의 몸을 타고 흘러나가, 그의 주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살점은 그 기운에 닿자마자 멈칫했다. 놈의 썩어가는 몸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텅 빈 안와에서 흘러나오던 검붉은 액체가 일순간 응고되는 듯했다. 이윽고 놈은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아니었고, 분노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움직임을 멈췄을 뿐.
지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손에 든 두루마리를 바라보았다. 방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살점은 완전히 죽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미세하게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공격적인 의지가 사라진 채, 완전히 무력화된 것이다.
그때, 두루마리의 빛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지혁의 몸을 감싸던 에너지는 빠르게 소진되는 듯했고, 극심한 피로감이 밀려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는 겨우 몸을 지탱하며 숨을 골랐다.
“이게… 대체 뭐야?”
두루마리는 다시 평범한 금속 조각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혁은 알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다. 살점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던 그 힘. 어쩌면 이 절에 숨겨져 있던 고대의 마법의 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던 지난 3년. 절망과 공포만이 가득했던 세상에서, 지혁은 이제 한 줄기 새로운 가능성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 힘을 이해하고 다룰 수 있다면, 혹시 이 지옥 같은 세상에 작은 균열이라도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두루마리를 조심스럽게 배낭 깊숙이 넣었다. 아까의 살점은 여전히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지혁은 다시 한번 놈을 확인하고는, 절 밖으로 나섰다.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이전과는 다른 어떤 결의가 느껴졌다.
해 질 녘, 붉게 물든 하늘 아래 폐허가 된 도시는 여전히 지옥 같았다. 하지만 지혁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그는 이제 단순한 생존자가 아니었다. 미지의 힘을 손에 쥔 채, 혼돈의 세상 속으로 다시 발을 내딛는 새로운 존재였다. 아직 이 힘의 본질을 알지 못했다.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도, 그 끝이 어디인지도.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의 삶은, 그리고 이 세상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하…”
지혁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