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밤의 서곡
어둠은 비단처럼 미끄러웠다. 제국의 수도, 크라켄의 가장 후미진 골목에도 등불 하나 쉬이 걸리지 않는 시간이면, 그림자는 숨 쉬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특히 비늘 가득한 심해어처럼 냄새나고 습한 뒷골목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곳은 제국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곳, 혹은 애써 외면하는 곳이었다.
“젠장, 춥군.”
강휘는 낡은 외투를 여미며 벽에 기댔다. 굳게 닫힌 창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고함소리와 쇠사슬 부딪치는 소리가 그의 신경을 갉아먹었다. 제국의 심해 기사단이 야간 순찰에 나선 모양이었다. 저들은 해저 깊숙한 곳에서 끌어올린 듯한 검은 비늘 갑옷을 입고, 마치 심연의 괴물처럼 거대한 망치를 휘둘러댔다. 그 망치에 한 번 걸리면, 뼈조차 온전히 남지 않는다고 했다.
강휘의 눈은 어둠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굶주림과 공포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기 위해선 필수적인 능력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희뿌연 하늘을 올려다봤다. 언제나처럼 불길한 보랏빛이 도는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있었다. 제국의 마법사들이 수도 외곽에 세운 ‘어둠의 첨탑’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었다. 저 마력이 크라켄의 밤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길한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툭.
등 뒤의 낡은 나무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강휘는 아무 말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눅눅한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하 창고였다. 그곳에는 이미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강휘처럼 고통과 분노로 눈이 깊어진 얼굴들이었다.
“늦었군, 강휘.”
어둠 속에서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 소피였다. 그녀는 한때 뛰어난 재봉사였지만, 이제는 돋보기 없이는 바늘조차 꿰지 못할 만큼 눈이 침침해졌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 여전히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마치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듯한 섬뜩한 빛이었다.
“심해 기사단이 평소보다 삼엄했습니다. 좁은 골목까지 뒤지고 다니더군요.”
강휘는 벽에 놓인 촛대에 불을 붙였다. 희미한 불빛이 창고 안을 비추자, 모두의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들의 옷차림은 남루했고, 몸에는 굶주림의 흔적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만큼은 강렬한 불꽃을 품고 있었다.
“어제도 제물 의식이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지.”
아셀이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강휘와 비슷한 또래였지만, 날카로운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해 보였다. 그녀의 허리춤에는 녹슨 단검이 꽂혀 있었다. 언제라도 적에게 달려들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그 녀석들… 또 몇 명이나 데려갔지?”
한 젊은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눈에는 공포와 함께 깊은 슬픔이 서려 있었다.
“서른 명이 넘는다더군. 대부분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이었어.” 아셀이 답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도 분노가 섞여 있었다. “그 중에는… 칼론의 여동생도 있었지.”
모두의 얼굴에 침묵이 흘렀다. 칼론은 지난달에 제국에 저항하다가 심해 기사단의 망치에 맞아 죽은 동료였다. 그의 여동생마저 끌려갔다는 소식은 모두의 심장을 후벼 파는 비수와 같았다. 제국의 ‘정화 의식’이라는 이름의 그 잔혹한 제물 의식은 몇 달째 계속되고 있었다. 황제는 ‘세상의 균형을 위해’ 심연의 존재에게 바치는 것이라 했지만, 모두는 그것이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끌려간 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자들이 바치는 것은 균형이 아니라, 이 세계의 파멸이야.” 할머니 소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주름진 손이 촛불 위를 맴돌았다. “제국은 수백 년간 저 ‘심연의 주인’에게 영혼을 바쳐왔어. 그 대가로 이 불길한 힘을 얻었고. 황제는… 이미 인간이 아니야.”
강휘는 할머니 소피의 말에 저절로 주먹을 쥐었다. 그도 어릴 적부터 들었던 이야기였다. 제국 황가의 피에는 인간의 것이 아닌 무언가가 섞여 있다는 속삭임. 황제가 통치하는 동안 크라켄은 번영했지만, 그 번영의 이면에는 끝없는 희생과 암흑이 도사리고 있었다. 크라켄의 웅장한 건축물들은 비정상적인 각도로 솟아 있었고, 때때로 밤이면 미묘한 진동과 함께 알 수 없는 형상의 그림자들이 도시를 배회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도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강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안에 담긴 의지만큼은 흔들림 없었다. “더 이상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저 비인간적인 의식에 끌려가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그의 눈은 뜨거웠다. 제국에 대한 증오와, 더 이상 무기력하게 당할 수 없다는 절박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강휘는 어린 시절, 제국군의 수탈에 부모를 잃었다. 그리고 얼마 전, 그의 유일한 혈육이자 하나뿐인 여동생이 ‘질병’이라는 명목으로 끌려갔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질병이란 곧 제물 의식에 바쳐질 ‘흠 없는 영혼’을 지칭하는 제국의 은어라는 것을.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한 남자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제국의 군대는 셀 수 없고, 그들의 마법사들은 하늘을 갈라. 우리는… 고작 이런 허름한 창고에 숨어 지내는 쥐새끼들일 뿐인데.”
“쥐새끼들이라도 송곳니는 가지고 있지.” 아셀이 단검을 살짝 뽑아 올리며 차가운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우리가 당장 제국 전체를 뒤엎을 순 없어. 하지만 작은 구멍이라도 뚫을 순 있지. 그 구멍이 언젠가 거대한 균열이 될 때까지.”
강휘는 아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리는 작은 균열을 만들 겁니다. 오늘 밤, 우리는 제국의 보급 마차를 습격할 계획입니다. 수도 북쪽, 칼라 강변을 따라 이동하는 곡물 수송 마차입니다. 심해 기사단 세 명이 호위하고 있지만… 충분히 해볼 만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강휘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눈에는 의심과 함께 희미한 희망이 섞여 있었다. 보급 마차를 습격하는 것은 단순한 약탈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제국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그럼… 바로 실행합니까?”
“그래.” 강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손이 허리춤에 찬 낡은 낫의 자루를 쥐었다.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어. 이번 주가 지나면, 또다시 제물 의식이 시작될 거야. 오늘 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위한 싸움을 시작할 겁니다. 제국의 피로 물든 밤에, 우리의 존재를 각인시킬 겁니다.”
할머니 소피는 말없이 촛불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촛불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마치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거대한 그림자가 세상을 뒤덮는 것처럼.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심연의 파도는… 이미 거대해지고 있어. 너희의 작은 불꽃이 그 파도를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구나.”
하지만 강휘는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굳게 결심한 눈으로 창고에 모인 이들을 하나하나 바라봤다. 그들의 눈빛 속에 타오르는 작은 불꽃들이, 언젠가 심연의 어둠을 태워버릴 거대한 불길이 될 것이라 믿으며.
바깥은 여전히 핏빛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크라켄의 밤은 기이한 마력과 공포로 가득 차 있었지만, 이제 그 밤은 하나의 작은 반란의 서곡을 품고 있었다. 조용히, 그리고 거대하게. 아무도 예측하지 못할 파멸의 징조와 함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