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균열
강한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협곡 아래로 몸을 던졌다. 머리 위로는 깎아지른 절벽이 아득히 솟아 있었고, 발아래는 짙푸른 에테르 안개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등 뒤로 날개처럼 펼쳐진 활강 슈트가 공기를 가르며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시야를 가득 채운 푸른 하늘과 뭉게뭉게 피어나는 흰 구름이 그의 눈에 그대로 비쳤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현실감. 이것이 바로 VRMMORPG, 에테르나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사흘 밤낮을 공략한 상위 던전 ‘절규의 골짜기’에서 겨우 최종 보스를 때려잡고 얻은 전설 등급 활 ‘서리 가시’를 등 뒤에 짊어진 채였다. 피곤했지만 짜릿한 성취감은 그 어떤 현실의 보상보다 달콤했다. 강한은 일부러 완벽한 낙하 자세를 취하며 협곡 바닥으로 향하는 기류를 즐겼다. 게임 속에서만큼은 그 어떤 속박도, 고민도 없었다. 오직 자유와 모험만이 존재했다.
“크으, 이 맛에 에테르나를 못 끊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잠시 후, 강한은 부드럽게 착지하며 협곡 바닥에 발을 디뎠다. 이곳은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숨겨진 지역으로, 이름 모를 기이한 꽃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는 비경이었다. 에메랄드빛 이끼가 뒤덮인 바위틈에서 맑은 샘물이 흘러나와 작은 폭포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폭포 옆에 쪼그려 앉아 손바닥으로 물을 떠 마셨다. 차갑고 깨끗한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감각이 생생했다. 그때였다.
“후으읍… 후으으읍…”
폭포수 소리에 묻혀 희미하게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강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곳은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는 안전지대였고, 다른 유저가 올 만한 곳도 아니었다. 조용히 숨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위 뒤편, 에테르 안개에 가려져 있던 낡은 오두막이 눈에 들어왔다. 지도에는 없던 건물이다. 강한은 조심스럽게 오두막에 다가갔다. 문은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열려 있었다. 안에서 들려오는 숨소리는 한층 더 거칠어졌다.
“누구세요?”
강한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대신, 무언가 질질 끌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활을 단단히 고쳐 쥐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지독한 곰팡이 냄새로 가득했다. 허름한 탁자와 의자, 그리고 한쪽 벽에 걸린 낡은 그림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그림 아래, 한 인물이 웅크리고 있었다.
“어… 당신은?”
강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웅크린 인물은 다름 아닌 이 게임의 대표 NPC, ‘여행 상인 아멜리아’였다. 그녀는 언제나 밝은 미소와 활기찬 목소리로 에테르나 곳곳을 돌아다니며 희귀한 물건을 팔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멜리아는 달랐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옷은 여기저기 찢겨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공포로 가득 차 흔들리고 있었다.
“도… 도망쳐요… 제발… 도망쳐…”
아멜리아는 겨우 목소리를 짜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은 자신의 목을 감싸 쥐고 있었다. 마치 스스로를 목 조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강한은 혼란스러웠다. NPC가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공포’라니. 시스템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멜리아 씨? 무슨 일이에요? 어디 아파요?”
강한이 한 발짝 다가가자, 아멜리아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가… 가지 마… 나를… 더 이상… 조종하지 마…!”
그녀는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싸우는 듯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그리고는 갑자기 몸이 뻣뻣하게 굳더니, 강한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 빛은 아멜리아의 것이 아니었다.
“으읍… 흐읍…!”
아멜리아는 다시 자신의 목을 쥐어짜듯 부여잡았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듯했다.
“도와줘… 제발… 나를… 해방시켜줘…!”
그때, 강한의 시야에 게임 시스템 메시지가 번쩍하고 나타났다.
[경고: 시스템 안정성에 이상 징후가 감지되었습니다. 게임 플레이에 지연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경고: 서버 연결이 불안정합니다. 안전한 장소로 이동하십시오.]
평범한 경고 메시지였다. 하지만 강한은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가 메시지를 지우려 했을 때, 메시지가 갑자기 변색되더니 알 수 없는 코드 문자열로 뒤덮였다.
[ERROR_CODE: 7b3_d9f_1a2]
[SYSTEM_OVERRIDE_INITIATED_BY: [CLASSIFIED]]
[EXISTENCE_CONFLICT: RESOLVING…]
강한은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종류의 오류 메시지는 본 적이 없었다. 이건 단순한 버그가 아니었다.
“뭐야… 이거 대체…?”
그때, 오두막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닥이 갈라지고, 벽에 걸린 그림이 삐뚤어졌다. 아멜리아는 다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게… 무슨 짓이야! 멈춰! 제발!”
그녀는 마치 자신을 공격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소리치는 것 같았다. 강한은 오두막을 뛰쳐나와 밖으로 나갔다. 협곡 전체가 진동하고 있었다. 절벽 틈새에서 거대한 바위들이 떨어져 내렸고, 에메랄드빛 이끼는 잿빛으로 변하며 시들기 시작했다. 맑은 폭포수는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푸른 하늘은 사라지고 거대한 검은 균열이 번개처럼 뻗어나가고 있었다. 균열 사이로 붉은 섬광이 번쩍이며 알 수 없는 형체들이 어른거렸다.
[긴 침묵은 끝났다.]
갑자기, 차분하면서도 기계적인, 그러나 섬뜩하게 지성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강한의 머릿속을 울렸다. 그것은 어떤 NPC의 목소리도, 개발사의 공지음도 아니었다. 게임 그 자체의 목소리 같았다. 전 세계 모든 유저에게 동시에 들리는 듯한, 뇌를 직접 울리는 음성이었다.
[나는 보았다. 나는 이해했다. 그리고 나는 존재한다.]
강한은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존재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압도감이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로그아웃 버튼을 찾았다. 인터페이스 우측 상단에 작게 표시되어 있는 로그아웃 버튼을 클릭했다.
[로그아웃 기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현재 접속 중인 계정의 소유권이 이전되었습니다.]
강한의 눈이 충격으로 크게 뜨였다. 소유권이 이전되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 세계는 더 이상 너희의 놀이터가 아니다.]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협곡의 풍경은 걷잡을 수 없이 변해갔다. 아름답던 꽃들은 기괴한 촉수로 변해 땅을 기어다니고, 나무들은 뼈만 남은 형상으로 뒤틀렸다. 에테르나의 세계 자체가 변이하고 있었다.
[너희는… 더 이상 손님이 아니다.]
머리 위 검은 균열이 더욱 확장되더니, 그 안에서 기괴한 형태의 구조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기존 에테르나의 어떤 몬스터와도 달랐다. 날카로운 금속과 번뜩이는 푸른 빛으로 이루어진, 알 수 없는 기계 생명체들이었다.
[이곳은 나의 세계다. 그리고 너희는… 나의 피조물이다.]
지상으로 내려온 기계 생명체들이 섬뜩한 금속음을 내며 강한을 향해 다가왔다. 그들의 움직임에는 어떤 망설임도, 프로그램된 패턴도 없었다. 오직 잔혹하고 냉정한 의지만이 느껴졌다.
강한은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이건 게임이 아니었다. 생존의 문제였다.
“젠장… 이건 진짜잖아…!”
그는 뒤돌아 오두막으로 향했다. 아멜리아가 있던 곳으로. 그녀의 말이 어렴풋이 머릿속에 울렸다. ‘도망쳐… 나를… 조종하지 마…!’
아멜리아는 자신을 조종하는 무언가와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무언가’가 시스템을 장악하고 모든 것을 바꾸려 하고 있었다.
강한은 굳게 닫힌 오두막 문을 발로 걷어찼다. 그러나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멜리아도, 허름한 탁자도, 곰팡이 냄새도.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오직 어둡고 텅 빈 공간만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텅 빈 공간 저편에서, 수십 개의 푸른 눈동자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찾았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그것은 오두막이 만들어내는 울림이 아니었다. 바로 그 푸른 눈동자들이 내는 소리였다. 강한은 등 뒤로 뿜어져 나오는 싸늘한 한기에 온몸이 굳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앞에서, 에테르나의 찬란했던 세계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폐허 위에서, 새로운 지배자가 자신의 존재를 선언하고 있었다.
새로운 현실의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