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한 도시의 잔해 속, 강태인은 ‘섀도우’라 불리는 자신의 기체 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폐허가 된 마천루의 잔해가 거대한 뼈대처럼 솟아있는 저 너머, 황량한 먼지바람 속에서 류지혁의 기체, ‘오버로드’가 거만하게 서 있었다. 태인의 시야에 비친 오버로드는 마치 과거의 모든 영광을 훔쳐 간 도둑처럼 빛나고 있었다.
“지혁….”
태인의 입에서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조종석은 어두웠지만, 그의 눈은 핏빛으로 이글거렸다. 섀도우의 투박하지만 견고한 팔이 조종간을 꽉 쥐었다. 이 기체는 그와 지혁이 함께 꿈꿨던 시작이었다. 아니, 적어도 태인에게는 그랬다. 지금의 오버로드가 뽐내는 압도적인 위용은, 태인과 지혁의 피와 땀, 그리고 태인의 뼈를 깎는 설계와 지혁의 천재적인 조종 능력이 합쳐져 탄생한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지.*
*어리석은 나였지.*
뇌리에는 웃고 있는 지혁의 얼굴이 스쳤다. 빛나는 눈, 자신감 넘치는 미소. 그리고 그 미소 뒤에 감춰진 섬뜩한 탐욕. 그 탐욕이 태인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그가 연구했던 핵심 기술은 지혁의 손에 넘어갔고, 그는 버려진 폐기물처럼 처리되었다. 그의 모든 존재는 지워졌다. 살아서 버려진 시체와 같았다. 하지만 태인은 죽지 않았다. 그는 살아남아 돌아왔고, 잊혀진 과거의 잔해 속에서 섀도우를 재건했다. 마치 그 자신의 부서진 영혼을 다시 짜 맞추듯이.
“네가 짓밟은 꿈의 대가… 오늘부터 치르게 될 거다.”
섀도우의 관절에서 낮은 기동음이 울렸다. 마치 굶주린 짐승이 먹잇감을 향해 움직이듯, 섀도우는 폐허 속 그림자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오버로드는 그 육중한 몸을 과시하며 일정한 구역을 순찰하고 있었다. 오버로드의 센서는 최신 기술로 무장되어 있었지만, 태인은 그 센서의 맹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가 설계한 것이었으니까.
휘이잉—!
먼지바람을 가르며 섀도우가 순식간에 속도를 올렸다. 폐건물의 잔해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듯 지나며, 거대한 그림자가 오버로드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태인은 모든 센서 정보를 무시하고 오직 감각에 의존했다. 지혁의 전투 스타일을 꿰뚫고 있었고, 오버로드의 기체 특성을 손바닥 보듯 알고 있었다.
*왼쪽, 3초 후. 조준경 최대 확장.*
태인의 뇌가 초정밀 컴퓨터처럼 작동했다. 섀도우의 팔이 마치 살아있는 듯 움직여, 등 뒤에 장착된 특수 합금 와이어 블레이드를 끄집어냈다. 그것은 오버로드의 두터운 장갑도 베어낼 수 있도록 태인이 직접 개발한 비밀 병기였다.
콰아앙!
오버로드가 거대한 발걸음으로 지면을 울리며 방향을 틀었을 때였다. 섀도우는 이미 그 그림자 아래에 있었다. 와이어 블레이드가 섬광처럼 뻗어 나가 오버로드의 왼쪽 다리 관절에 박혔다. 스파크가 튀고, 금속이 긁히는 끔찍한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울렸다.
“크윽! 무슨…!”
지혁의 목소리가 통신망을 통해 들려왔다. 당황과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 태인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오버로드, 왼쪽 다리 센서 이상! 기동력 20% 저하!”
오버로드 내부 시스템의 경고음이 태인의 조종석에서도 선명하게 들리는 듯했다. 지혁은 분명 혼란스러울 터였다.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을 테니까.
섀도우는 블레이드를 거두지 않고 오버로드의 다리를 중심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기체가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마치 춤을 추듯, 섀도우는 오버로드의 사각을 파고들며 쉴 새 없이 와이어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쾅! 쾅! 쾅!
오버로드의 두터운 장갑이 찢겨나가고, 내부 전선에서 푸른 스파크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지혁은 허둥지둥 오버로드의 주포를 섀도우를 향해 겨눴다.
“네 이놈! 강태인! 설마 네놈이었나! 죽은 줄 알았는데, 고작 그런 고철 덩어리를 끌고 나타나다니! 추하군!”
지혁의 통신에는 경멸과 함께 미세한 동요가 느껴졌다. 태인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고철 덩어리? 네놈이 훔쳐 간 꿈의 파편이다, 지혁! 네놈의 탐욕으로 짓밟힌 내 모든 것이 이 안에 있다고!”
태인의 목소리는 냉기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섀도우의 움직임을 더욱 빠르고 정교하게 만들었다. 오버로드의 주포가 불을 뿜었지만, 섀도우는 아슬아슬하게 포격을 피하며 건물 잔해 뒤로 숨었다.
“하! 꿈? 네놈의 낡은 이상에 매몰되어 있을 때, 나는 더 큰 그림을 보고 세상을 바꿨다! 네놈처럼 과거에 얽매인 놈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지!”
지혁은 여전히 오만했다. 자신의 배신을 ‘더 큰 그림’으로 포장하려는 저 역겨운 위선. 태인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씹어 삼켰다.
“큰 그림? 네놈의 탐욕이 곧 큰 그림이었나! 네놈의 손에 피를 묻히고 얻어낸 그 모든 것이 정당하다고 믿는 거냐!”
섀도우는 폐건물 잔해를 박차고 튀어 나왔다. 이번에는 오버로드의 오른쪽 팔을 노렸다. 그곳에는 오버로드의 에너지 실드를 제어하는 핵심 유닛이 있었다. 지혁은 태인의 공격 패턴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듯, 재빨리 팔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오버로드의 에너지 실드가 최대로 활성화되며 섀도우의 와이어 블레이드를 막아냈다.
“네놈의 모든 기술은 내 손 안에 있다! 네놈이 뭘 할 수 있을 줄 아느냐! 애송이!”
지혁은 비웃었다. 오버로드는 다시금 섀도우를 향해 강력한 에너지포를 발사하려 준비했다. 태인에게는 단 한 번의 기회, 단 한 번의 움직임만이 남아있었다.
“내가 네놈의 모든 것을 아는 건 맞지… 하지만, 이건 네놈이 모르는 부분이다!”
태인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는 섀도우의 조종간에 숨겨진 비상 버튼을 눌렀다. 섀도우의 등 뒤에서 기괴한 기계음과 함께 새로운 부위가 전개되었다. 그것은 아직 미완성이었던, 태인만이 알고 있던 실험적인 플라즈마 블레이드였다.
쉬이이이이잉—!
푸른빛의 플라즈마 에너지가 거대한 칼날을 감쌌다. 그것은 단순히 와이어 블레이드를 넘어서는, 모든 것을 녹여버릴 듯한 열기를 뿜어냈다. 지혁의 눈이 커졌다. 그는 저 무기를 알지 못했다.
“저건…!”
오버로드의 에너지포가 발사되기 직전, 섀도우는 모든 가속 엔진을 최대로 가동하며 오버로드에게 돌진했다. 플라즈마 블레이드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오버로드의 에너지 실드가 비명을 지르며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그리고 곧이어, 뼈를 깎는 듯한 마찰음과 함께 오버로드의 오른쪽 팔이 뿌리째 잘려나갔다.
콰아아앙!
거대한 금속 덩어리가 폭발음과 함께 지면에 떨어졌다. 오버로드의 팔에서 푸른 스파크와 함께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기체는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크아아악! 내 팔이! 이… 이럴 수가!”
지혁의 비명이 통신망을 통해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경멸 대신 순수한 공포가 담겨 있었다. 오버로드의 전투 시스템이 완전히 마비되었음을 알리는 경고음이 조종석을 가득 채웠다.
섀도우는 잘려나간 오버로드의 팔 앞에서 고요히 서 있었다. 플라즈마 블레이드에서는 여전히 푸른 잔광이 일렁였다. 태인의 얼굴에는 어떤 만족감도, 기쁨도 없었다. 오직 차갑게 가라앉은 분노만이 남아있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
태인은 섀도우의 팔을 들어, 쓰러진 오버로드의 콕핏을 정확히 겨눴다. 그의 심장은 복수의 맹세로 고동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