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엔젤”의 조종석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오직 전방의 홀로그램 스크린만이 차가운 푸른빛을 토해내며 미지의 도시 외곽을 비추고 있었다. 강민준의 손은 조작 패드 위에서 미동도 없이 굳어 있었다.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의 시선은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심장이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고동쳤다. 이 침묵은 언제나 폭풍 전야였다.
폐허가 된 도시는 죽음처럼 고요했다. 바람조차 숨죽인 듯, 무너진 고층 빌딩의 앙상한 뼈대만이 달빛을 받아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며칠 전, 이곳에서 정체불명의 집단이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습격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 뒤를 쫓아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단순한 추적이 아니었다. 놈들의 흔적은 너무나도 익숙했고, 그 익숙함은 민준의 심장을 조여오는 족쇄와 같았다.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리며 스크린에 붉은 점들이 일제히 떴다. “확인, 세 기. 접근 속도 양호.” 민준의 목소리는 기계적인 필터를 거쳐 평온하게 들렸지만, 그의 안에는 이미 살의가 끓고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먹잇감에 대한 굶주림.
오른손의 조작 레버를 틀자, “아크엔젤”의 거대한 몸체가 유기체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등에 장착된 추진기가 불을 뿜으며 기체를 공중으로 솟구치게 했다. 아래로는 폐허가 된 건물의 잔해가 점점이 펼쳐져 있었다. 적기는 표준형 경량 전투 메카, ‘스파르탄’이었다. 현우 놈이 애용하던 모델 중 하나. 그 자식은 늘 가벼운 기체로 상대를 농락하는 걸 즐겼지. 역겨운 기억이 민준의 뇌리를 스쳤다.
‘이현우.’ 이름 석 자가 입안에서 쓴맛으로 굴러다녔다. 한때는 그 이름이 세상의 전부이자 가장 굳건한 방패였다. 그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그가 내 등에 칼을 꽂았던 날, 세상은 무너져 내렸다. 내 모든 것을 빼앗고, 나를 지하 깊숙한 곳으로 던져 넣었던 그날. 내가 쓰러진 자리에 보란 듯이 서서, ‘강민준, 너는 이미 끝났어.’라고 비웃던 그 잔인한 미소가 생생했다. 그리고 이 손으로, 이 기체로 다시 기어 올라오는 데는 지옥 같은 세월이 걸렸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친구가 아니었다. 그저 파괴해야 할 대상, 그의 존재 자체를 소멸시켜야 할 숙적일 뿐.
“목표, 락온. 사격 허가.”
민준은 조작 패드의 버튼을 누르는 대신, 직접 왼손의 조종간을 잡아당겼다. “아크엔젤”의 왼쪽 팔에 내장된 고밀도 플라즈마 캐논이 번뜩이며 붉은 섬광을 뿜어냈다. 첫 번째 ‘스파르탄’은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몸통 한가운데가 녹아내리며 고철 덩어리가 되어 추락했다. 폭발음은 폐허 속에서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두 번째, 세 번째 기체는 동시에 기동하며 민준을 향해 기관포를 난사했다. 굉음과 함께 수많은 탄환이 “아크엔젤”의 단단한 외갑을 강타했지만,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민준의 기체는 단순한 전투 메카가 아니었다.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이 개조되고 강화된, 살아있는 증오 그 자체였다. 그 어떤 공격도 “아크엔젤”의 진격을 막을 순 없었다.
“하찮은 놈들.”
민준은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아크엔젤”은 맹렬한 속도로 돌진하며 두 번째 ‘스파르탄’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스쳐 지나가는 찰나, 그의 오른팔에서 예리한 칼날이 튀어나와 적기의 관절부를 정확히 꿰뚫었다. 철이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스파르탄’은 제동력을 잃고 뱅글뱅글 돌며 추락했다. 조종사는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마지막 ‘스파르탄’은 겁에 질린 듯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했다. 무너진 건물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며 민준의 추격을 뿌리치려 애썼다. 하지만 민준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추격은 순식간이었다. “아크엔젤”은 거대한 발로 도주하는 ‘스파르탄’을 짓밟았고, 조종석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기체는 완전히 침묵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민준은 “아크엔젤”을 멈춰 세웠다. 정적이 다시 찾아왔지만, 그의 마음속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쓰러진 ‘스파르탄’들의 잔해를 스캔하자, 예상대로 특정 소속 마크가 감지되었다. ‘새벽의 파수꾼.’ 현우 놈이 수장으로 있는 용병단의 표식이었다.
“결국 이 길로 들어섰군, 현우.” 민준은 낮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조롱이 섞여 있었다. “네가 감히 발을 들여서는 안 될 곳이었다.”
스캔 보고서가 계속 올라왔다. 파괴된 기체 중 한 대의 통신 기록에서 의미심장한 암호화된 메시지가 발견되었다. 민준은 즉시 복구 작업을 지시했다. 몇 초 후, 흐릿한 음성이 조종석을 채웠다. 간헐적으로 끊기는 음성은 조급함과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기체 파괴. 세 대 모두… 제압당했습니다. 통신 두절… 목표는… 확실히 강민준입니다. 그의 기체는… 우리의 표준 사양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보고합니다. ‘정의의 기사’ 출격… 현우 대장님께서 직접…”
민준의 심장이 철렁했다. ‘정의의 기사’. 현우가 직접 조종하는 기체의 이름이었다. 망각의 늪 속에서 그의 뇌리에 선명히 각인된 그 이름. 그가 가장 아끼던, 그리고 가장 강력했던 기체. 복수의 칼날을 갈던 내내, 가장 마지막에 베어버릴 최종 목표였다.
스크린에 새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이번에는 거대한 에너지 반응이 감지되었다. 접근 속도는 이전의 ‘스파르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단순한 전투 메카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거대한 맹수가 사냥감을 향해 돌진하는 것과 같은 폭발적인 속도.
“놈이 온다.” 민준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증오와 기대, 그리고 어딘가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던 미묘한 감정이 뒤섞인 미소였다. “이현우, 네가 직접 나올 줄은 몰랐는데. 반갑다, 친구.”
“아크엔젤”의 메인 엔진이 더욱 맹렬하게 불을 뿜기 시작했다. 거대한 메카의 그림자가 폐허가 된 도시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이제 피할 수 없는 대결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과거의 그림자가 현재를 삼키러 왔다. 그리고 민준은 그 그림자를 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는 그 그림자 속에서 춤을 추려 하고 있었다. 복수의 칼날을 든 채.
“오랜만이다, 이 배신자 새끼야.”
민준의 손이 다시 한번 조작간을 굳게 쥐었다. 모든 계기판이 최대치로 치솟았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