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가 된 세계의 새벽은 늘 회색이었다. 잿빛 먼지가 가득한 공기는 옅은 산성비라도 내릴 것 같은 먹구름과 뒤섞여 숨통을 조였다. 높이 솟았던 빌딩들은 앙상한 뼈대만 남긴 채 하늘을 긁고 있었고, 그 그림자 아래로 예지의 작고 지친 그림자가 미끄러졌다. 낡고 해진 후드티의 소매 끝은 여러 번 꿰맨 흔적이 역력했다. 한때 화려했을 법한 교복 치마는 무릎까지 오는 길이로 잘려 거친 천으로 기워져 있었고, 얼룩진 운동화는 찢어진 곳을 덕테이프로 겨우 붙여 놓은 모양새였다.
“젠장, 아무것도 없어.”
예지는 낮게 욕설을 읊조렸다. 텅 빈 편의점 선반은 절망 그 자체였다. 그녀가 찾던 물건은 통조림 하나, 하다못해 유통기한이 훨씬 지난 에너지바라도 좋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온통 찢겨지고 부식된 포장재 뿐이었다. 배에서는 익숙한 통증이 울렸다. 굶주림은 이제 그녀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자 가장 지겨운 적이었다.
그녀의 손목에 감긴 낡은 통신기가 작게 울렸다. 삑, 삑. 위험 신호였다. 지면이 약하게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예지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고 귀를 기울였다. 진동은 규칙적이지 않았다. 마치 땅을 긁어내며 움직이는 무언가처럼 불규칙하게 울렸다.
“젠장, 또야?”
그녀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했다. 한 손으로 허리춤에 매달린 녹슨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다른 손에는 검게 그을린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그 장갑은 그녀의 ‘힘’을 쓰는 통로였다. 그녀는 가볍게 폐허 속으로 숨어들었다. 부서진 벽돌 틈새로, 기울어진 간판 뒤로, 그녀의 움직임은 그림자처럼 민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모습이 드러났다. 그것은 ‘그림자 사냥꾼’이라고 불리는 변이체였다. 곤충과 동물의 기형적인 조합. 거대한 턱은 쇠붙이마저 으스러뜨릴 듯 강력했고, 여섯 개의 다리는 녹슨 철근도 구부리며 움직였다. 끈적거리는 검은 액체를 흘리는 놈의 눈은 예지를 정확히 향하고 있었다. 녀석은 먹이를 찾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예지는 이를 악물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건물 잔해 위로 뛰어올랐다. 사냥꾼의 턱이 그녀가 방금 서 있던 자리를 굉음과 함께 박살냈다. 철근이 비명을 지르며 꺾였다.
“너무 느려, 바보 녀석!”
그녀는 공중에서 몸을 비틀며 장갑 낀 손을 앞으로 뻗었다. 손바닥에서 푸른빛이 희미하게 피어오르더니, 이내 손톱만 한 크기의 투명한 결정들이 돋아났다. 그것들은 공기 중에서 순식간에 성장하여, 손목을 스치는 순간 날카로운 칼날처럼 빛났다.
“결정 파편!”
예지는 외침과 함께 빛나는 결정들을 사냥꾼에게 쏘아 보냈다. 파편들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실에 묶인 것처럼 정확하게 사냥꾼의 끈적이는 피부에 박혔다. 촤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피가 튀었다. 놈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틀거렸다. 예지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사냥꾼의 등 위로 착지했다.
놈의 등은 억센 갑옷처럼 단단했다. 그녀의 발밑에서 진동이 전해졌다. 예지는 다시 한번 손에서 결정 파편을 만들어냈다. 이번에는 파편들을 하나로 뭉쳐 창처럼 길고 뾰족하게 만들었다. 푸른빛이 더욱 강렬하게 빛났다.
“이걸로 끝내주마!”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창을 사냥꾼의 등껍질 가장 약한 부분, 목과 등 사이의 연결 부위에 꽂아 넣었다. 꿰뚫리는 소리와 함께 놈의 몸이 격렬하게 경련했다. 사냥꾼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거대한 몸뚱이가 주변 잔해들을 무너뜨렸다. 예지는 간신히 균형을 잡아 뛰어내렸다.
끈적이는 검은 액체가 주변을 더럽혔다. 사냥꾼은 몇 번 더 발작하더니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예지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전신에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손끝이 저릿했고, 허기는 이제 속을 뒤틀리게 할 지경이었다. 그녀의 마법은 늘 그녀의 생체 에너지를 대가로 요구했다.
“젠장, 이러다 내가 죽겠네.”
그녀는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눈을 감자 어렴풋한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반짝이던 소녀들의 미소, 화려했던 옷들, 그리고 세상이 아직 온전했던 시절의 어렴풋한 푸른 하늘. 그 기억들은 이제 빛바랜 사진처럼 희미했다. 그녀는 더 이상 정의를 위해 싸우는 마법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생존자였다.
목이 말랐다. 며칠째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폐허 속에서 발견하는 물은 오염되기 십상이었다. 정수 필터는 진작에 망가졌다. 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죽은 사냥꾼의 몸뚱이는 식량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놈의 고기는 독성이 강했다.
그녀는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저 멀리, 한때 번화했을 쇼핑몰 건물의 앙상한 실루엣이 보였다. 어쩌면 그곳에, 한두 개쯤 남은 통조림이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오염되지 않은 빗물을 모아놓은 흔적이라도.
예지의 눈은 지쳐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발밑에는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별처럼 흩어져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한때 찬란했던 세계의 마지막 눈물 같았다. 그녀는 그 유리 조각들을 밟으며, 또 다른 새벽을 향해 나아갔다. 그녀의 심장만이, 이 황폐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꺼지지 않는 마법처럼 쿵쾅거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