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류한은 망토의 깃을 더욱 바싹 여미며 잿빛 황야를 횡단했다. 발아래 부스러지는 지면은 한때 푸른 생명이 넘쳤으리라 짐작할 뿐, 이제는 쩍쩍 갈라진 상처투성이의 대지에 불과했다. 하늘에는 항상 먼지구름이 낮게 깔려 있어 햇빛조차 희미하게 걸러냈다. 이곳이 언제부터 이토록 피폐해졌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그저 살아남은 자들이 과거의 영광을 어렴풋이 기억하며 숨 쉬는 것 자체가 투쟁인 삶을 이어갈 뿐이었다.
“오라버니, 저쪽에… 뭔가 반짝여요.”
뒤따르던 아린이 작은 손가락으로 저 멀리 지평선 끝을 가리켰다.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진 입술만큼이나 건조했다. 류한의 시선이 그녀의 손끝을 좇았다. 먼지 안개 너머, 희미하게 빛나는 작은 점. 저곳까지 얼마나 걸릴지, 그리고 그 빛이 희망일지 아니면 또 다른 함정일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자.”
류한은 짧게 대답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린은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류한은 왼손을 들어 손바닥에 희미하게 영기를 모았다. 고작해야 손바닥 안에서 간신히 한 줌의 기운을 응축할 수 있는 정도. 예전 같으면 코웃음 칠 수준의 미약한 힘이었지만, 이 황폐한 세상에서는 이조차도 생존의 중요한 무기였다. 그의 오감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주변의 미세한 공기의 흐름, 저 멀리서 들려오는 정체 모를 소리, 대지에서 피어나는 불안정한 영기까지 모든 것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몇 시간을 더 걸었을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폐부에서 긁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물은 이미 어제 바닥이 났고, 마지막으로 입에 넣은 건 삼 일 전, 겨우 발견한 마른 풀뿌리 몇 개였다. 그들이 바라보던 빛은 이제 조금 더 선명해졌다. 그것은 무너진 고대 건물의 잔해 사이에서 피어나는 영광초(靈光草)였다. 노란색으로 빛나는 작은 꽃잎은 주변의 음습한 기운을 밀어내며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영광초예요! 오라버니, 저거 하나면 며칠은 버틸 수 있을 거예요.” 아린의 얼굴에 희미한 생기가 돌았다.
류한의 눈빛도 흔들렸다. 영광초는 이 황량한 세계에서 극히 드물게 발견되는 영물이었다. 미약하지만 영기를 회복시키고 허기를 달래주는 효능이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도 따르는 법.
“서두르지 마. 이런 곳에 저런 게 함부로 피어있을 리 없어.”
그는 주위를 더욱 경계하며 천천히 영광초가 있는 폐허로 접근했다. 건물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져 있었고, 녹슨 철근과 부러진 석상 조각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다. 공기 중에는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들을 노리고 숨어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류한의 귀에 낮게 깔리는 쉰 소리가 들렸다. 발밑의 지면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아린, 뒤로 물러서!” 류한은 거의 동시에 외쳤다.
그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폐허의 잔해 더미가 우르르 무너져 내리며 거대한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철갑 지룡’이었다. 이름과 달리 용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도마뱀에 가까웠지만, 온몸을 뒤덮은 단단한 검은 비늘과 맹독을 품은 듯한 녹색 눈은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적이었다. 지룡은 굶주린 눈으로 영광초를 노리던 류한과 아린을 향해 길고 날카로운 혀를 날름거렸다. 그 혀끝에서는 녹색 액체가 방울져 떨어졌고, 지면에 닿자 작은 연기와 함께 시커먼 흔적을 남겼다.
“젠장, 이런 곳에 이놈이 있을 줄이야!” 류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철갑 지룡은 단순히 영광초를 노린 것이 아니었다. 영광초 주변에 흐르는 미약한 영기는 종종 이런 변이된 괴물들을 끌어모으곤 했다. 녀석의 목표는 이제 영광초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었다.
“오라버니!” 아린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불렀다.
류한은 아린을 자신의 뒤로 밀어내며 왼손에 응축된 영기를 더욱 단단히 뭉쳤다. 손바닥 안에서 희미하게 푸른빛이 감돌았다.
“걱정 마! 아직 끝난 거 아니야!”
철갑 지룡이 으르렁거리며 거대한 몸을 이끌고 돌진했다. 녀석의 움직임은 둔해 보였지만 예상보다 빨랐다. 류한은 몸을 틀어 간신히 첫 공격을 피했다. 녀석의 꼬리가 그가 서 있던 자리를 강타했고, 쩍 갈라진 지면에서 먼지가 솟아올랐다.
류한은 후퇴하며 오른손에 차고 있던 낡은 단검을 뽑아 들었다. 놈의 단단한 비늘을 뚫을 수는 없겠지만, 시선을 분산시키는 데는 쓸 수 있을 터였다. 그는 몸을 낮추고 지룡의 옆구리를 노려보며 달렸다.
“아린! 준비해!”
아린은 두려움 속에서도 류한의 명령에 따라 두 손을 모았다. 그녀는 류한보다 훨씬 약했지만, 짧은 순간이나마 영기를 한곳에 모으는 작은 술법을 쓸 수 있었다. 그것은 적의 움직임을 잠시라도 묶어두는 데 효과적이었다.
철갑 지룡이 다시 류한에게 달려들었다. 녀석의 거대한 턱이 벌어지며 역겨운 입김을 내뿜었다. 류한은 간발의 차이로 몸을 숙여 피했고, 동시에 왼손의 영기를 지룡의 앞발에 내리쳤다.
콰앙!
작은 폭발음과 함께 지룡의 앞발 비늘이 약간 깨져나가며 파편이 튀었다. 녀석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잠시 주춤했다. 그 순간, 아린의 입에서 짧은 영창이 터져 나왔다.
“속박의 실!”
그녀의 손끝에서 희미한 빛의 실타래가 뿜어져 나와 지룡의 다리를 휘감았다. 빛의 실은 녀석의 거대한 힘 앞에서는 얇고 부서지기 쉬웠지만, 단 몇 초라도 녀석의 움직임을 붙잡는 데는 성공했다.
“지금이야!” 류한은 외쳤다.
그는 지룡의 비늘이 깨진 앞발 상처 부위를 향해 단검을 내리찍었다. 쩌적! 단단한 비늘을 뚫지는 못했지만, 류한은 단검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고 온몸의 영기를 단검 끝으로 집중했다.
“영기 폭발!”
단검 끝에서 푸른 영기가 폭발하며 지룡의 상처 부위를 파고들었다. 녀석은 다시 한번 괴로운 비명을 질렀고, 빛의 실이 끊어짐과 동시에 거대한 몸뚱이가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류한은 다시 한번 왼손에 영기를 모아 녀석의 눈을 향해 던졌다.
쉬익!
류한의 영기 뭉치는 정확히 지룡의 녹색 눈에 명중했다. 녀석은 눈을 움켜쥐고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거대한 몸을 마구 휘두르며 주변의 폐허 잔해를 파괴했다. 그러나 류한은 알고 있었다. 이 정도로는 녀석을 완전히 죽일 수 없다는 것을. 다만 잠시 동안 놈의 공격을 무력화시킬 뿐이었다.
“아린! 영광초!”
아린은 류한의 외침에 정신을 차리고 영광초를 향해 달려갔다. 지룡의 몸부림이 잦아들기 시작하면 다시 공격해 올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더 이상 싸울 여력이 없었다.
아린은 조심스럽게 영광초를 뿌리째 뽑았다. 뽑히자마자 영광초의 빛은 약간 희미해졌다. 류한은 숨을 헐떡이며 지룡을 주시했다. 녀석은 여전히 눈을 움켜쥐고 있었지만, 슬슬 움직임이 안정되고 있었다.
“서둘러!” 류한은 아린의 팔을 붙잡고 폐허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친 듯이 달렸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지룡의 맹렬한 포효가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지만,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계속해서 발을 내디뎠다.
한참을 달려 폐허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그들은 겨우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류한의 팔은 찢어져 피가 흘렀고, 아린의 옷자락은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손에는 어렵게 얻어낸 영광초가 들려 있었다.
“후우… 겨우 살았다…” 아린이 주저앉으며 말했다.
류한은 망연히 영광초를 바라봤다. 노란색 빛은 더욱 희미해졌지만, 그들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귀한 것이었다.
“그래도… 얻었잖아.” 류한은 간신히 미소 지었다. “이거 하나로 며칠은 더 버틸 수 있을 거야. 최소한, 목숨은 부지할 수 있겠지.”
아린은 류한의 상처 난 팔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팔… 치료해야 하는데.”
“괜찮아. 이 정도는 늘 있는 일이지.” 류한은 피가 흐르는 팔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의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훈장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먼지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언제쯤 이 지긋지긋한 생존 투쟁이 끝날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앞을 향해 나아갈 뿐이었다.
“우리가 찾으려는 곳은… 정말 있는 걸까요?” 아린이 조용히 물었다.
류한의 시선은 저 멀리, 또 다른 폐허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을 향했다. “모르지.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순 없어. 분명 어딘가엔… 이 세상을 다시 되돌릴 힘이 남아있을 거야. 우리가 찾지 못했을 뿐.”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해가 저물기 전, 안전한 은신처를 찾아야 했다. 류한과 아린은 서로에게 의지한 채, 끝없이 펼쳐진 잿빛 황야 속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등 뒤로, 피 냄새를 맡은 또 다른 위험들이 스멀스멀 몰려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