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한 대지는 검은 핏물이라도 뿌린 듯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먼지 대신 검게 바싹 마른 흙가루가 바람에 흩날렸고, 쩌렁쩌렁 울리던 천지의 기운은 마치 죽은 듯 침묵했다. 그 속을 한 사내가 걷고 있었다. 누더기가 된 도포 자락이 초라하게 펄럭였고, 앙상하게 드러난 턱선은 고통스러운 인내를 말해주었다. 그의 이름은 류진. 황폐해진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 순간 발버둥 치는 자였다.
며칠 밤낮을 쉬지 않고 걸었을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이전의 황무지와는 또 다른 지옥이었다. 끈적한 회색 늪지가 끝없이 이어지고, 썩어가는 시체 냄새와 알 수 없는 독초의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늪지 위로는 기괴하게 뒤틀린 나무들이 뼈대만 남긴 채 솟아 있었고, 그 가지마다 마치 피를 빨아먹은 듯 붉고 질척한 이끼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젠장… 끝이 없군.”
류진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의 등 뒤에는 빛바랜 검 한 자루와 영약 몇 개,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건조 식량만이 전부였다. 이미 며칠째 식량을 입에 대지 못해 손끝이 떨렸다. 하지만 그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이곳에 온 목적이 있었다. 이 잿빛 늪지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자란다는, 희귀한 영초, ‘자정화(子定花)’를 찾기 위함이었다.
자정화. 이 파멸의 시대에서 그나마 잔존한 천지 기운을 흡수하여 독기를 정화하고, 심신을 안정시키는 효능이 있다고 전해지는 유일한 약초였다. 류진은 그 자정화가 그의 스승을 살릴 마지막 희망이라고 믿었다. 독기에 물들어 사경을 헤매는 스승의 얼굴이 떠오르자, 류진은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늪지 위로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끈적한 진흙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늪지 곳곳에 널브러진 짐승의 뼈들은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무언의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멀리서 기분 나쁜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류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수없이 많은 마물과 싸워왔고, 수없이 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더는 공포에 굴복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던 그때, 류진의 발밑에서 무언가 튀어 올랐다.
쉬이이익-!
“젠장!”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늪지에서 튀어나온 것은 뱀도, 벌레도 아닌, 기괴하게 길고 검은 촉수였다. 촉수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류진의 발을 노렸다. 류진은 재빨리 검을 뽑아 휘둘렀다. 쩌억-! 하는 소리와 함께 촉수 일부가 잘려나갔지만, 이내 잘려나간 부위에서 검은 액체가 뿜어져 나오며 공중에 고약한 독기를 퍼뜨렸다.
“독수초(毒水草)인가….”
류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독수초는 늪지 식물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존재였다. 뿌리부터 줄기까지 온몸이 독으로 뒤덮여 있고, 땅속 깊이 뻗어 나간 뿌리는 어지간한 천지 기운마저 흡수하여 주변을 불모지로 만든다고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이 촉수는… 일반적인 독수초보다 훨씬 강했다. 놈은 잘려나간 촉수 옆에서 또 다른 촉수를 솟구쳐 올리며 류진을 위협했다.
류진은 검을 고쳐 잡았다. 기혈을 운행하여 내면의 영력을 끌어올렸다. 비록 황폐해진 세상에서 영력을 모으는 것이 예전보다 수십 배는 더 어려워졌지만, 류진은 꾸준히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검은 은은한 푸른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나와라, 이 기생충 같은 것들!”
류진은 포효하며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맹렬한 검기가 허공을 갈랐고, 독수초의 촉수들이 정신없이 날아들었다. 마치 수십 마리의 뱀이 동시에 공격하는 듯했다. 류진은 민첩하게 몸을 움직이며 촉수들을 베어 넘겼다. 검과 촉수가 부딪치는 소리가 늪지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독수초는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늪지 곳곳에서 검은 촉수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류진은 순식간에 수십 개의 촉수에 둘러싸였다. 등 뒤에서 날아온 촉수가 그의 어깨를 강타했다. 억 소리 나는 통증과 함께 몸의 균형이 무너졌다. 류진은 간신히 무릎을 꿇지 않기 위해 버텼지만, 독기가 스며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팔뚝에 시커먼 얼룩이 퍼져나갔다.
“크으…!”
잠시라도 방심하면 그대로 붙잡혀 늪지 아래로 끌려들어 갈 터였다. 류진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빛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이제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천광검류(天光劍流), 육성(六閃)!”
류진의 검에서 푸른빛이 더욱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그의 검은 단순한 검이 아니었다. 혼돈의 시대 이전, 고대 신선들이 사용했다는 ‘천광검결’의 일부분을 스승에게 전수받은 것이었다. 비록 파편적인 지식에 불과했지만, 그 위력은 실로 엄청났다.
번쩍!
류진의 몸이 마치 여섯 개의 잔상으로 나뉜 듯이 보였다. 그의 검이 춤추듯 허공을 가르자, 마치 빛의 그림자가 빠르게 움직이는 듯했다. 휘두를 때마다 독수초의 촉수들이 숭덩숭덩 잘려나갔다. 검은 독액이 사방으로 흩뿌려졌지만, 류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온 신경은 오직 검 끝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나, 둘, 셋… 수십 개의 촉수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하지만 그 기세는 잠시, 늪지 한가운데에서 거대한 물결이 일더니, 류진을 압도하는 거대한 촉수 하나가 솟아올랐다. 마치 고대 거목의 뿌리처럼 굵고 시커먼 촉수는 그 끝에 날카로운 이빨이 박힌 거대한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것은 독수초의 ‘본체’였다.
쉬이이이익-!
본체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독기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했다. 주변의 모든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에 류진은 저절로 숨을 참았다. 독수초 본체는 류진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돌진했다. 류진은 온몸의 영력을 끌어모아 검 끝에 집중했다. 그의 몸에서 푸른빛의 검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죽어라!”
류진은 지면을 박차고 솟아올라 거대한 촉수의 머리를 향해 검을 내리찍었다. 모든 영력과 기력을 쏟아부은 일격이었다.
콰아앙!
푸른빛 검기가 독수초 본체의 거대한 머리를 관통했다. 쩌렁쩌렁한 파열음과 함께 검은 독액이 하늘로 치솟았고, 본체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요동쳤다. 늪지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류진은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땅에 착지했다. 그의 팔다리는 후들거렸고,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독수초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거대한 몸뚱이가 힘없이 늪지로 쓰러졌다.
류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독기가 가득한 늪지 한가운데에 서서, 그는 마치 자신이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짊어진 듯한 피로감을 느꼈다. 어깨의 상처는 더욱 시커멓게 변해있었고,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희미하게 남아있던 천지 기운의 흔적을 쫓아 독수초 본체가 쓰러진 자리에 다가갔다. 그곳은 독수초의 뿌리가 가장 깊이 박혀있던 곳이었다. 끔찍한 독기가 휘몰아치던 자리, 그 한가운데에…
놀랍게도, 눈부시게 푸른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자정화…!’
류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늪지의 지독한 독기 속에서, 그 모든 것을 정화하며 고고하게 피어있는 푸른 꽃. 꽃잎마다 영롱한 이슬이 맺혀 있었고, 은은한 향기가 폐부를 감싸자 지쳤던 몸에 미미하게나마 생기가 돋는 듯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꽃에 손을 뻗었다. 그의 손길이 닿자 꽃잎은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희망. 이 절망적인 세상에서 겨우 움켜쥔 한 줄기 희망이었다. 류진은 조심스럽게 자정화를 뿌리째 뽑아냈다. 따뜻한 온기가 그의 손바닥을 감쌌다.
그 순간이었다.
우르르르릉!
저 멀리, 잿빛 늪지 너머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천둥소리 같은 울림이 들려왔다. 단순한 천둥소리가 아니었다. 온 대지를 흔들고, 류진의 심장을 짓누르는 듯한, 압도적인 기세였다. 류진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잿빛 황무지의 검은 실루엣 너머, 하늘과 땅을 잇는 거대한 존재의 윤곽이 드러나는 듯했다. 그것은 마치 잠들어 있던 고대 신이라도 깨어난 듯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류진의 손에 들린 자정화가 순간적으로 강하게 빛났다.
류진은 아찔한 공포감에 휩싸였다. 스승을 살릴 자정화를 얻었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는 차원조차 다른 거대한 위협이 나타난 것이다. 이 황폐해진 세상의 심연에는 대체 또 어떤 존재가 도사리고 있는 것인가. 류진은 자정화를 꽉 움켜쥐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눈은 그 거대한 그림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살아남아야 한다. 반드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