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흔들리는 유리잔**
밤 열두 시, 지훈은 침묵에 잠긴 거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27층에 자리한 그의 아파트는 도시의 소음으로부터 완벽히 단절된 섬 같았다. 창밖으로는 수많은 불빛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지만, 그 빛들이 그의 공간까지 침범해 들어오지는 못했다. 고요는 무거웠고, 때로는 날카롭게 느껴졌다.
그는 테이블 위 맥주잔을 힐끗 보았다. 분명히 저쪽에 놓아두었던 잔이, 지금은 손가락 하나만큼 오른쪽으로 비껴나 있었다. 퇴근 후 마시다 남긴, 아직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잔이었다. 피곤했나? 어쩌면 자신이 옮겨 놓고도 잊어버렸을 수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는 주방으로 향했다. 따뜻한 물이라도 한 잔 마시고 잠자리에 들 생각이었다.
식탁 의자가 삐걱거렸다.
지훈의 발걸음이 멈췄다. 낡은 나무 의자에서 날 법한 소리였다. 이사 온 지 반년 된 새 아파트에는 그런 낡은 의자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거실을 살폈지만, 식탁 의자는 원래의 자리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람이 강했나? 설마. 27층은 바람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주방으로 걸어갔다.
냉장고 문이 미세하게 열려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살짝 덜 닫혀’ 있었다. 지훈은 늘 완벽주의자였다. 물건을 제자리에 두는 것은 물론, 문단속에도 철저했다. 특히 냉장고 문은 닫을 때마다 ‘딸깍’하는 소리가 나야 안심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 소리를 못 들었을 리 없었다. 그는 의아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보거나 기억을 왜곡하는 건 아닐까? 아니면… 룸메이트가 있었던 착각에 빠진 걸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물을 한 잔 마시고 침실로 돌아왔다.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충전 케이블은 팽팽하게 당겨진 채, 콘센트에 꽂힌 충전기마저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누가 장난이라도 친 것처럼.
“이게… 뭐지?”
지훈은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피로 때문이라고 치부하기 어려웠다. 휴대폰은 보통의 진동으로는 떨어지지 않는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케이블이 저렇게 팽팽할 정도면, 단순히 ‘떨어진’ 것이 아니라 ‘끌어당겨진’ 것처럼 보였다.
등골에 낯선 한기가 스쳤다. 그는 서둘러 휴대폰을 주워 들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머리맡 스탠드의 불빛 아래에서, 그는 애써 태연한 척 눈을 감았다. 너무 예민한 거야. 그래, 분명 과로가 부른 착각일 거야. 심리학 책에서 읽었던 ‘선택적 지각’ 현상 같은 걸지도 모른다. 아니, 그게 더 말이 안 되잖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이 들었는지조차 모를 순간, ‘쨍그랑!’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지훈은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듯한 충격에 눈을 번쩍 떴다. 주방이었다. 분명 주방에서 난 소리였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망설였다. 그냥 무시하고 다시 잠들어야 할까? 아니면, 가서 확인해야 할까? 본능은 도망치라고 외쳤지만, 이성(아니, 어쩌면 단순한 호기심일지도 모르는)은 그의 몸을 일으켰다.
주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마치 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거실을 지나 주방 입구에 다다랐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모든 이성적인 설명을 무너뜨렸다.
싱크대 위에 놓여 있던 유리컵, 그가 가장 아끼던, 얇고 투명한 디자인의 맥주컵이었다. 그 컵이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떠밀린 것처럼, 미끄러지듯 서서히 카운터 끝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하지만 멈추지 않고.
지훈은 숨을 멈췄다. 얼어붙은 듯, 컵이 위태롭게 카운터 끝자락에 멈춰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단 일 센티미터만 더 가면, 바닥으로 떨어질 터였다.
그 순간, 컵은 다시 몇 센티미터 뒤로 미끄러져 돌아왔다.
마치 누군가 놀려대듯, 줄다리기를 하는 것처럼.
지훈의 입에서 “헉!” 하는 숨 넘어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는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피가 식는 것 같았다. 이건 착각이 아니었다. 꿈도 아니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명백한 현실이었다.
“누, 누구세요…?”
떨리는 목소리가 겨우 튀어나왔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방금 전까지 고요하던 아파트 내부의 공기가 갑자기 차갑게 변했다. 마치 한겨울 새벽의 칼바람이 불어 닥친 것처럼.
거실 창가의 얇은 커튼이, 창문이 굳게 닫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유령의 팔에 흔들리는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지훈은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손끝이 얼음장 같았다. 누구에게 전화해야 할까? 경찰? 119? 아니,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제 유리컵이 혼자 움직이다가 다시 돌아왔어요!”라고?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게 뻔했다.
그때, 그의 귓가를 스치는 듯한 아주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마른 나뭇잎이 바닥을 스치는 듯한, 혹은 낡은 책장이 넘겨지는 듯한 부스럭거림이었다. 그것은 분명한 언어가 아니었지만, 마치 어떤 존재가 곁에 서서 그를 관찰하고 있다는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라져라. 제발. 꿈이라고 해 줘.
다시 눈을 떴을 때, 유리컵은 또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주저함 없이, 카운터 끝을 넘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쨍그랑!***
귀청을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유리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지훈은 비명을 질렀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끌어낸, 인간이 공포에 질렸을 때 내는 본능적인 절규였다.
그 순간, 아파트 전체의 불이 일제히 꺼졌다. 암흑이 그의 시야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낮고 깊으며, 끈적이는 듯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크흐흐흐흐…”
그 웃음소리는 분명 그의 머리 위, 천장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