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독립적인 단편 소설

잿빛 도시는 침묵하고 있었다. 아니, 침묵하는 척할 뿐이었다. 사실은 끊임없이 삐걱거리고, 부서지고, 무너져 내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재하는 낡은 스코프를 통해 폐허가 된 백화점 건물의 옥상을 살폈다. 며칠째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해 입술은 바싹 말라붙었고, 희미한 눈빛은 오직 생존만을 갈구하고 있었다.

“젠장, 아무것도 없어.”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어제 겨우 찾아낸 통조림 하나로 연명했지만, 오늘은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도시는 너무나도 텅 비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너무나도 위험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림자들’이라고 불리는 무리들, 그리고 알 수 없는 변이 생명체들. 재하는 이 모든 것들을 피하며 숨 쉬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낡은 배낭을 고쳐 메고, 부러진 자동소총 개머리판을 망치 삼아 비틀린 철문을 부쉈다. 먼지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콜록거리며 안으로 들어서자, 한때는 화려했을 진열대들이 뼈대만 남아 앙상하게 서 있었다. 바닥에는 깨진 유리 조각들과 정체 모를 잔해들이 뒹굴었다.

“하다못해 물이라도….”

그는 작은 희망을 품고 구석구석을 뒤졌다. 녹슨 식료품 코너, 옷가지가 썩어 문드러진 의류 코너. 아무것도 없었다. 절망감이 목을 조르는 듯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묘하게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계단 입구였다. 지하로 통하는 길이었다. 대부분의 지하 시설은 침수되거나 완전히 붕괴되었기에, 그는 지하를 탐색하는 것을 꺼렸지만,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번 보지 뭐.”

반쯤 무너진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코를 찌르는 곰팡이 냄새와 습기가 온몸을 감쌌다. 낡은 손전등을 켜자, 한때 번화했을 지하 상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이 정적을 갈랐다. 그는 굳게 닫힌 상점들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빈집털이범처럼 느껴졌지만, 그런 양심은 진작에 사치품이 되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발이 멈췄다. 벽 한쪽에, 다른 상점들과는 이질적인 문이 보였다. 낡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견고해 보이는 금속 문. 문 위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재하는 직감적으로 이곳이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호기심보다는 절박함이 앞섰다.

“이런 곳에…?”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삐걱이는 소리도 없이 문은 스르륵 열렸다. 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손전등 빛이 닿자 숨 막히는 광경이 펼쳐졌다.
원형의 방. 벽면에는 역시 고대 문자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고, 그 문자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중앙에는 석조 제단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제단 위에는….

“이게 뭐야…?”

재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은 돌이 제단 위에 놓여 있었다. 매끄럽고 완벽한 구형. 흡사 잘 다듬은 흑요석 같았지만, 돌 안쪽에서부터 희미하게 푸른빛이 깜빡였다. 그 빛은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주기적으로 수축하고 팽창했다. 돌 표면에는 은색의 가는 선들이 복잡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그 선들 역시 돌 안의 빛과 동기화되어 번뜩였다.

재하는 홀린 듯 돌에 다가갔다. 알 수 없는 힘이 그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그는 손을 뻗어 돌에 닿았다.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강렬한 차가움이 손끝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수많은 이미지가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고대 문명, 알 수 없는 존재들, 그리고… 힘. 순수한 힘의 개념이 그의 의식 속에서 춤을 추었다.

“크윽…!”

재하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떼어냈다. 돌은 여전히 제단 위에 놓여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방 안의 공기는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묵직하고… 생생한 기운이 방을 가득 채웠다.

그는 진정하기 위해 애썼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벽에 기댔다. 저 돌은 대체 뭐지? 그저 신기한 돌멩이일 리 없었다. 방금 전의 경험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그때, 천장에서 ‘쩌저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동과 함께 천장 한 귀퉁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재하는 반사적으로 돌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금이 가는 소리가 멈췄다. 천장의 균열 사이로 희미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마치 시간을 되감은 것처럼 균열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물기 시작했다. 완전히 복구된 것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안정화되었다.

“말도 안 돼….”

재하는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자신이 한 행동이라고는 그저 돌을 향해 손을 뻗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돌에서 느껴졌던 그 미지의 힘이 그의 몸을 타고 흘러나와 천장에 작용했다. 그는 다시 돌을 바라봤다. 아까보다 빛이 희미해진 것 같았다. 마치 에너지를 소모한 것처럼.

망설일 틈도 없이, 재하는 돌을 집어 들었다. 돌은 생각보다 차가웠고, 묵직했다. 하지만 불안한 느낌보다는 알 수 없는 안도감이 그를 감쌌다. 그는 돌을 배낭 깊숙이 숨겼다.
이곳에서 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이 힘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재하는 서둘러 지하 상가를 빠져나와 폐허가 된 도시의 거리로 나왔다. 여전히 희뿌연 하늘, 무너진 고층 건물들, 그리고 그림자처럼 도사리는 위험들. 그는 이전과는 다른 무게감을 느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서 비릿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실려 왔다. 익숙하면서도 끔찍한 냄새. 굶주린 것들, 변이된 늑대 무리였다. 그는 황급히 몸을 숨겼지만, 이미 늦었다.

“크르르릉…!”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거대한 짐승 세 마리가 그의 은신처를 둘러쌌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초록색 눈동자, 축 늘어진 혀에서는 독액이 뚝뚝 떨어졌다. 재하는 낡은 소총을 들어 올렸지만, 탄창은 비어 있었다. 남은 것은 녹슨 단검뿐이었다.

“젠장…!”

그는 등 뒤의 벽에 등을 기댔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세 마리의 괴물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공포가 온몸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 그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배낭 속의 돌을 움켜쥐었다. 손끝에서 다시금 그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사용하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사라져…!”

재하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절규했다. 동시에 손안의 돌에서, 그리고 그의 몸에서 푸른빛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주변의 공기가 뒤틀렸다.
눈을 떴을 때, 그의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굶주린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다만, 그들이 서 있던 자리의 콘크리트 바닥이 마치 고열에 녹아내린 것처럼 움푹 파여 있었다.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재하는 주저앉았다.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간 듯했다. 배낭 속의 돌은 빛을 완전히 잃은 채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은 현실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이것은 단순한 돌멩이가 아니었다.
이것은… 마법이었다.
고대의, 숨겨진, 그리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힘.

재하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시선은 폐허가 된 도시의 저 너머를 향했다.
이제 그는 단순한 생존자가 아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세상을 바꿀 수도, 혹은 파괴할 수도 있는 거대한 힘의 조각이었다.
황폐해진 세상에서, 그의 생존은 이제 막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작은, 알 수 없는 위험과 무한한 가능성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숨을 고르고, 돌이 들어있는 배낭을 고쳐 멨다.

“이게 대체… 나에게 뭘 준 거지?”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그 안에선 이전에는 없던 미약한 희망, 혹은 알 수 없는 결의가 싹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