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펑크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비는 끊임없이 내렸다. 잿빛 하늘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는 메가시티 ‘네오 서울’의 무수한 네온사인들을 지저분하게 뭉개트렸다. 고층 빌딩의 거대한 홀로그램 간판들이 번쩍일 때마다, 습기와 오염으로 얼룩진 골목길은 잠시 빛을 토해냈다 이내 다시 그림자에 잠겼다. 눅진한 공기 속에서 싸구려 전자기기에서 흘러나오는 찌릿한 오존 냄새와 축축한 금속 냄새가 뒤섞였다. 그 모든 혼돈 속에서, ‘카인’은 숨죽인 채 움직였다. 그의 사이버네틱 의안은 어둠 속에서도 빗줄기에 맺힌 미세한 전파 신호까지 잡아냈고, 강화된 척추 임플란트는 그의 등 뒤로 그림자처럼 붙어있는 초박형 해킹 장비를 전혀 무겁게 느끼지 않게 했다. 낡은 방수 재킷의 후드를 깊게 눌러썼지만, 그의 굳게 다문 입술과 날카로운 턱선은 숨겨지지 않았다. 그는 방금 막 ‘크로노스 산업’의 외곽 보안망을 뚫고 들어온 참이었다.

“젠장, 예상보다 더 구리잖아.” 카인은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전자 변조되어 듣는 이에게 어떤 감정도 전달하지 못하도록 필터링되었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제논’이었다. 한때는 형제보다 더 가까웠던 이름. 함께 이 도시의 어두운 밑바닥을 기어 다니며 온갖 불법적인 데이터 거래와 시스템 해킹으로 연명했던 동료. 하지만 그 모든 우정은 단 하나의 치명적인 배신 앞에서 산산조각 났다. 2년 전, 크로노스 산업의 핵심 데이터 코어를 함께 털기로 했던 그 밤, 제논은 카인을 팔아넘겼다. 그 대가로 그는 어둠 속에서 사라졌다가, 이제는 크로노스 산업의 보안 총책임자라는 번듯한 직함으로 나타났다.

카인의 심장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팔다리의 인공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은 분노였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나노 로봇들이 이성을 억누르려 했지만, 복수의 불꽃은 그 모든 것을 태워버릴 기세였다. 그는 이빨을 비틀어 물었다.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감돌았다. 오래된 상처가 다시 터진 것 같았다.

삑. 삑.

카인의 의안에 녹색 신호가 번쩍였다. 건너편 건물 옥상에 설치된 자동 센서 포탑의 움직임을 포착한 것이었다. 재킷 안에서 작은 무선 송신기를 꺼내들었다. 손가락이 춤추듯 키패드를 두드렸다.

“재활용도 못 할 고철 덩어리 같으니라고.”

잠시 후, 포탑의 렌즈가 흐릿해지더니 이내 방향을 잃고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카인은 느릿하게 몸을 움직여 좁은 환풍구를 통해 건물 내부로 침투했다. 내부 공기는 눅눅했지만, 바깥의 썩어가는 빗물 냄새보다는 나았다. 이곳은 크로노스 산업의 하위 데이터 보관 창고였다. 제논이 가장 공을 들이는 곳 중 하나였다.

환풍구를 기어가는 동안, 그의 의안에 과거의 잔상이 스쳤다. 제논의 미소. 항상 자신을 보며 씨익 웃던 그 가식적인 미소. 카인이 한눈을 판 사이에 칼날을 꽂아 넣었던 그 비열한 미소. 그때의 자신은 너무나도 어리석었다. 눈먼 우정에 사로잡혀 그 이빨을 보지 못했다.

환풍구 끝에 도달하자, 카인은 조용히 몸을 숙여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어둡고 긴 복도. 비상등이 깜빡이며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복도 양쪽으로는 수많은 데이터 서버 랙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서버 랙마다 작은 LED가 끊임없이 깜빡이며, 이 도시의 정보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알렸다.

“위험 감지. 접근 금지 구역입니다.”

복도 끝에서 갑작스런 기계음이 들려왔다. 키가 2미터에 육박하는 크로노스 산업의 최신 보안 로봇, ‘타이탄-07’이었다. 붉은색 시야 센서가 카인을 향해 고정되었다. 타이탄-07의 어깨에 장착된 미니 건이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를 냈다.

카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타이탄? 그냥 고철 덩어리겠지.”

그의 손이 재킷 안쪽으로 뻗어갔다. 손에 쥐어진 것은 작은 은색 칼날, ‘쉐도우 엣지’였다. 일반적인 나이프가 아니었다. 특수 합금으로 제작된 칼날은 전자기 펄스를 방출할 수 있어, 적의 시스템을 단숨에 마비시킬 수 있었다.

타이탄-07이 거대한 몸을 이끌고 카인에게 돌진했다. 육중한 발걸음이 복도를 울렸다. 동시에 어깨의 미니 건이 불을 뿜으려 했다.

*쉬이이이익— 탕!*

하지만 타이탄-07이 미니 건을 발사하기도 전에, 카인은 이미 움직인 후였다. 그의 몸은 그림자처럼 잔상을 남기며 로봇의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인간의 눈으로는 포착하기 힘들 정도의 속도였다. 강화된 근육 임플란트 덕분이었다. 쉐도우 엣지가 섬광처럼 번뜩였다.

*찌릿!*

카인의 칼날이 타이탄-07의 관절 연결부에 정확히 꽂혔다. 은색 칼날에서 뿜어져 나온 전자기 펄스가 로봇의 내부 회로망을 순식간에 휘저었다. 타이탄-07의 붉은 센서가 파랗게 변하더니 이내 끔뻑였다. 로봇의 모든 움직임이 정지했다. 거대한 몸체가 휘청거리더니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기계는 기계일 뿐.” 카인은 차갑게 내뱉었다.

그는 로봇의 쓰러진 몸체를 넘어 복도 안쪽으로 걸어갔다. 목표는 명확했다. 이 데이터 보관 창고의 메인 서버에 접속하여, 제논이 크로노스 산업의 보안 총책임자가 된 경위와 그가 감추고 있는 비밀들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터뜨려, 그가 겪었던 고통보다 더한 파멸을 안겨주는 것.

복도를 따라 걷던 카인의 의안에 갑작스러운 경고가 떴다.
[경고: 고강도 전자기장 감지. 접근 시 시스템 오류 발생 가능성.]

“흐음, 꽤나 신경 썼군. 네놈다운 함정이다, 제논.”

복도 끝에 거대한 철문이 나타났다. 그 문 위에는 크로노스 산업의 로고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고, 주변 공기는 강력한 전자기장으로 뒤틀려 있었다. 일반적인 해킹 장비로는 꿈도 꿀 수 없는 방어막이었다. 하지만 카인에게는 달랐다. 그의 손가락이 다시 한번 키패드 위를 날아다녔다. 재킷 속의 초박형 해킹 장비가 윙, 하고 낮게 울었다. 그의 의안이 복잡한 데이터 스트림으로 가득 찼다.

“네가 만든 방어막, 내가 못 뚫을 것 같았냐?”

카인의 표정은 싸늘했다. 그의 시선은 철문 너머에 있는 미지의 공간을 꿰뚫는 듯했다. 그곳에는 제논이 꽁꽁 숨겨둔 진실, 그리고 카인의 복수를 완성시킬 마지막 조각이 있을 터였다. 손가락이 멈추고, 잠시 후, 거대한 철문에서 삑, 하는 짧은 전자음이 울렸다. 전자기장이 일렁이더니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했다.

카인은 철문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그의 손바닥에 닿았다.
이 문 너머에, 제논의 모든 것이 있다.
그리고 그의 복수가 시작될 것이었다.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안에서는 기분 나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마치 지옥의 입구 같았다.
카인의 굳은 얼굴에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기다려라, 제논. 네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도 네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