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공무대. 세상의 모든 운명이 저 자그마한 원형 위에 걸려 있었다. 거대한 결계가 사방을 둘러싸고, 그 너머로 수만의 시선이 칼날처럼 꽂혔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 고요하지만 팽팽한 살기가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천하무결 쟁패전의 결승. 이제 단 한 경기만이 남았다.
환호와 비명, 욕설과 탄성이 뒤섞였던 이전의 열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모두가 침묵했다. 이 침묵은 경외심이자, 두려움이고, 동시에 절박한 염원이었다. 저 무대 위에서 결정될 것이 비단 무림의 서열만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무대 위에는 두 명의 그림자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한쪽은 거구의 사내, ‘혈랑’이었다. 피로 물든 짐승의 눈빛, 험악한 인상, 그리고 온몸을 휘감은 검붉은 투기(鬪氣)는 그가 걸어온 길을 웅변하는 듯했다. 혈랑. 말 그대로 피바람을 몰고 다니는 늑대였다. 그의 손에는 거대한 철퇴가 들려 있었고, 그 철퇴는 마치 지옥에서 갓 뽑아낸 듯 불길한 기운을 내뿜었다. 그가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천공무대 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의 맞은편에는 여인이 서 있었다. ‘련’. 가느다란 어깨, 바람에 흔들릴 듯 연약해 보이는 몸. 그녀가 입은 옅은 비단옷은 피와 땀으로 얼룩진 이전의 대결들을 무색하게 할 만큼 깔끔했다. 그녀의 무기는 길고 새하얀 검, ‘백화검’이었다. 마치 서리꽃이 피어난 듯 차가운 검신이 은은한 광채를 띠고 있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저 가녀린 여인이 혈랑을 상대할 수 있을까…?”
“대협문의 마지막 희망이 저리도 여리다니…”
“아니, 그녀는 이미 여덟 명의 고수를 꺾고 여기까지 왔다. 분명 뭔가 있을 게야.”
“하지만 혈랑은 달라! 그자는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이야!”
련은 관중들의 시선과 혈랑의 압도적인 기세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의 눈은 깊은 우물처럼 고요했으나, 그 안에는 흔들리지 않는 강철 같은 의지가 잠재되어 있었다.
‘운명이라….’
그녀의 뇌리에 스승의 마지막 말이 스쳐 지나갔다.
“이 대회를 멈추지 마라. 이 세상의 운명이 걸린 단 한 번의 기회다. 승자가 되어라, 련. 그리하여 잠들어 있는 그 힘을 깨워야만 한다.”
련은 자신의 손에 들린 백화검을 쥐었다. 차가운 검신의 감촉이 그녀의 손바닥에 선명하게 와 닿았다. 이 검과 함께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야만 했다.
갑자기 혈랑이 으르렁거렸다. 마치 실제 늑대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였다.
“흐하하! 계집이 여기까지 올라오다니, 가상하다! 하지만 네년을 보니 오히려 역겹구나. 감히 이 혈랑에게 도전하다니!”
그의 목소리가 천공무대를 뒤흔들었다. 련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은 혈랑을 더욱 자극했다.
“흥! 대답조차 못 하는 것이냐? 겁에 질려 오줌이라도 지렸나!”
혈랑은 비웃으며 철퇴를 한 바퀴 휘둘렀다. 콰앙! 철퇴가 허공을 가르자마자 뿜어져 나온 기류가 무대 바닥에 작은 흠집을 냈다. 그 엄청난 힘에 관중들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련은 천천히 백화검을 들어 올렸다. 검 끝이 혈랑을 향했다.
“…시작하시죠.”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어떤 비명보다도 또렷하게 혈랑의 귀에 박혔다.
혈랑의 눈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건방진 계집!”
그는 기다릴 새도 없이 맹렬하게 돌진했다. 거대한 몸집에서 나올 거라고는 믿기지 않는 속도였다. 콰콰콰쾅! 무대가 그의 발걸음에 부서지는 듯 진동했다. 철퇴가 허공을 가르며 불기둥처럼 련을 향해 덮쳐들었다.
쉬이이익!
련은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그녀의 발걸음은 마치 물 위를 걷는 학처럼 가볍고 유려했다. 핏빛 철퇴가 스쳐 지나간 자리에 강풍이 몰아쳤고, 련의 비단옷자락이 휘날렸다.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하며 련은 검을 휘둘렀다.
파팟!
백화검이 허공을 가르자마자 차가운 검기가 혈랑의 옆구리를 스쳤다. 철퇴의 강력함에 비해 검기는 보잘것없어 보였다. 하지만 혈랑의 검붉은 투기 사이로 희미한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크으읍…!”
혈랑은 예상치 못한 상처에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이 더욱 흉포하게 번뜩였다.
“네년… 제법이구나!”
그는 더욱 사납게 철퇴를 휘둘렀다. 회전하는 철퇴는 마치 검은 태풍 같았다. 련은 백화검으로 철퇴의 공격을 받아냈다.
쨍그랑! 콰앙!
금속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련의 몸이 충격에 뒤로 밀려났다. 가느다란 손목에 핏줄이 튀어 오를 듯했고, 그녀의 얼굴에는 고통의 그림자가 스쳤다. 백화검은 겨우 버티고 있었지만, 혈랑의 맹공은 쉬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돼. 저자의 힘은 너무 강해.’
련은 몸을 띄워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혈랑은 놓치지 않고 철퇴를 위로 휘둘렀다. 거대한 철퇴가 바람을 갈라 련의 발치까지 솟구쳤다. 련은 간발의 차이로 몸을 비틀어 철퇴를 피했다. 그 순간, 그녀의 시선이 혈랑의 턱을 향했다.
‘지금이다!’
련은 공중에서 백화검을 휘둘렀다. 검 끝에서 차가운 기운이 응축되더니, 여러 갈래의 서리꽃잎처럼 혈랑에게 쏟아졌다. 백화검술, ‘설화난무(雪花亂舞)’였다.
쉬이이익! 파파팟!
수십 개의 검기가 혈랑의 전신을 꿰뚫으려 했다. 혈랑은 거대한 투기로 몸을 감쌌지만, 서리꽃잎처럼 날카로운 검기는 그의 방어를 파고들었다.
“으아아악!”
혈랑의 온몸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작은 상처들이 순식간에 수십 개로 늘어났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피범벅이 된 그의 모습은 더욱 짐승 같았다.
“계집… 죽여버릴 테다…!”
혈랑은 포효하며 땅을 박찼다. 무대 바닥이 폭발하는 듯 부서졌다. 그 엄청난 속도로 혈랑은 련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철퇴를 휘두르는 대신, 거대한 주먹을 련에게 날렸다. 주먹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붉은 기운은 마치 거대한 악령의 얼굴 같았다.
련은 착지하며 자세를 낮췄다. 백화검의 끝이 바닥을 스치며 희미한 자국을 남겼다. 그녀는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는 대신, 정면으로 받아칠 준비를 했다.
관중들은 경악했다.
“미쳤나! 저 주먹을 정면으로 받는다고?!”
“저것은 혈랑의 필살기, ‘마혈강타(魔血强打)’가 아닌가!”
마혈강타. 그 이름처럼 마귀의 피가 담긴 듯한 강력한 일격이었다. 일격에 바위산도 부숴버릴 수 있다는 기술.
련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그녀의 몸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너무나 미세해서 일반적인 시선으로는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무림의 고수들은 그 빛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순수한 내공의 기운이자, 그녀의 잠재된 힘이 깨어나고 있음을 알리는 징조였다.
혈랑의 주먹이 련의 얼굴을 향해 맹렬하게 날아들었다. 공기의 흐름이 뒤틀리고, 거대한 압력이 련을 짓눌렀다.
그 순간, 련은 백화검을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혈랑의 주먹을 향하지 않았다. 대신, 련은 자신의 심장을 향해 검을 겨눴다.
“지금… 여기서….” 그녀의 입술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작은 속삭임이 터져 나왔다.
관중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자결인가?!”
“아니, 저것은…!”
혈랑의 주먹이 련의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련은 망설임 없이 백화검을 자신의 가슴에 꽂아 넣었다.
쑤욱!
피가 튀는 대신, 백화검이 련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그리고 련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빛이 순식간에 거대한 폭풍처럼 번져 나갔다. 그녀의 몸은 더 이상 연약한 비단옷을 입은 여인이 아니었다. 거대한 푸른 기운에 휩싸인, 마치 신화 속 여신처럼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다.
그녀의 눈빛은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혈랑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주먹을 멈칫했다.
“이… 이건 대체… 무슨…!”
하지만 이미 늦었다. 푸른 기운의 폭풍이 혈랑의 몸을 덮쳤다. 그의 거대한 마혈강타는 푸른빛의 파도 속으로 흡수되는 듯 사라졌다.
콰아아앙!!!
천공무대가 폭발하는 듯한 굉음과 함께 거대한 푸른 기운의 기둥이 하늘로 솟구쳤다. 결계가 흔들리고, 관중들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기운이 걷히자, 무대 한가운데에는 련이 서 있었다. 그녀의 몸에는 백화검 대신, 푸른 빛을 내는 투명한 검신이 홀연히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모든 것이 정지한 듯 고요했다. 혈랑은… 온데간데없었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련의 푸른 눈동자가 허공을 응시했다. 그녀의 입술에서 다시 작은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시작되었다.”
천공무대의 바닥에 거대한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균열 속에서 검은 안개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심연의 어둠을 품은 듯한 검은 안개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련의 푸른 검신이 그 안개를 향해 서서히 움직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