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한 도시는 잠들지 않는 거대한 야수 같았다. 사방을 짓누르는 고층 빌딩 숲에서 빛들이 뿜어져 나왔고, 그 빛들 중 하나가 민지네 아파트 창문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고단한 하루였다. 푹 꺼지는 소파에 몸을 던진 민지는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죽겠다, 죽겠어.”
천장 조명이 깜빡이는 것 같았지만,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언제나 똑같은 풍경, 똑같은 냄새, 똑같은 정적이 흐르는 익숙한 공간이었다. 적어도 방금 전까지는 그랬다.
늦은 저녁을 간단히 해결하고 식기를 정리하는데, 거실 쪽에서 ‘툭’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민지는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베란다 문을 안 닫았나? 바람에 뭔가 떨어졌나? 설마. 모든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뭐지?”
물을 뚝뚝 흘리는 손을 대충 닦아내고 거실로 향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제자리에 있어야 할 작은 화병 하나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쨍그랑하고 깨지지는 않았지만, 제법 높이 있던 선반에서 떨어졌는데도 멀쩡한 게 이상했다.
“아, 깜짝이야. 떨어졌네.”
별일 아니라고 애써 태연한 척 중얼거렸다. 어쩌다 툭 건드렸겠지, 아니면 고양이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혼자 사는 집에 뭐가 있겠어. 다시 화병을 제자리에 올려놓고 부엌으로 돌아섰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오싹.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지만, 거실은 여전히 조용하고 비어 있었다. 방금 올려놓은 화병도 제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정신 차려, 김민지.”
자신을 다독이며 설거지를 마쳤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오니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며 작은 볼륨으로 뉴스를 켰다. 오늘의 피로를 잊게 해줄 편안한 밤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드라이어가 갑자기 ‘픽’ 하고 꺼졌다. 민지는 짜증 섞인 한숨을 쉬며 콘센트를 확인했다. 제대로 꽂혀 있었다. 다시 전원 버튼을 눌렀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분명히 아침까지 잘 쓰던 거였는데.
“고장 난 건가?”
찝찝한 기분을 뒤로하고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꾹꾹 눌러 닦았다. 축축한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는 느낌이 싫었다.
그때, 방금 전 꺼진 드라이어가 ‘쉬이이잉-‘ 하는 소리를 내며 혼자 작동하기 시작했다.
민지는 숨을 헙 들이켰다. 손에 든 수건을 떨어뜨릴 뻔했다.
드라이어는 세면대 위에 놓여진 채로 강한 바람을 뿜어내고 있었다. 전원 버튼은 여전히 꺼져 있었고, 플러그도 뽑혀 있었다.
“거… 거짓말.”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손을 뻗어 플러그를 뽑으려 했지만, 이미 뽑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손을 움츠렸다.
드라이어는 마치 민지를 비웃기라도 하듯, 바람 소리를 내며 윙윙거렸다. 마치 누군가 그 안에 숨어 장난치는 것처럼.
그때, 화장실 문이 ‘끼이이익’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분명히 잠그고 나왔는데.
민지는 공포에 질린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드라이어는 여전히 소리를 내고 있었고, 열린 문틈 너머로 어둠이 시야를 잠식했다. 복도 끝, 현관문이 있는 곳까지 어둡고 싸늘한 기운이 뻗어 나가는 것 같았다.
“누구… 누구세요?”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민지는 혼자가 아니라는 섬뜩한 확신에 사로잡혔다.
갑자기, 거실 쪽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쨍그랑!’ 하고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민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귀청을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화장실 안의 드라이어가 ‘푹!’ 하고 꺼졌다.
이제 남은 건 오직 정적, 그리고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바닥에 흩뿌려진 차가운 광경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그림자가 보였다. 민지의 눈은 그 그림자를 쫓았다. 현관 쪽에서 거실을 가로질러 주방으로 향하는 거대한 검은 그림자.
“으… 윽!”
다리가 풀려 주저앉으려는데, 문득 눈길이 닿은 곳이 있었다.
거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였다.
분명히 아침까지 걸려 있던 액자가 깨진 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액자가 걸려 있던 자리에는 붉은색 글씨로 무언가가 쓰여 있었다.
핏빛 같은 글씨는 마치 피가 흘러내린 것처럼 벽을 타고 번지고 있었다.
‘혼자’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그 글씨는 ‘혼자’가 아니었다.
글씨의 획 하나하나가, 마치 가느다란 머리카락들로 엮인 것처럼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 수많은 머리카락들이 모여 만들어진 문장은 바로 이것이었다.
‘혼자가 아니야.’
그 순간, 민지는 깨달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서 있던 화장실 문이, ‘끼이이익’ 소리를 내며 활짝 열리는 것을.
그리고 그 안에서, 차가운 손이 뻗어 나오는 것을.
그 손은… 분명히 자신의 손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차갑고, 창백하며, 핏기 없는 손이.
민지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흐읍!”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
그 차가운 손이 민지의 발목을 잡고 화장실 안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아니다. 이건 꿈이 아니다. 절대로 꿈일 리가 없다.
민지는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세면대를 잡으려 했지만, 미끄러운 손은 헛바퀴만 돌았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이 맨발에 스치며 살갗이 찢기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나… 나는… 혼자가 아니야.’
그 문장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화장실 안의 어둠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민지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우리… 함께….”
몸은 점점 더 화장실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발목을 잡은 손의 힘은 엄청났다.
마지막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거실의 불빛은, 점멸하듯 깜빡이고 있었다.
마치 이곳에 홀로 남겨진 민지의 마지막 희망처럼, 그렇게 스러져 가고 있었다.
“안… 안 돼…!”
민지의 비명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잠식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아파트에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섬뜩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남았다.
아니, 누군가가 남았다.
민지의, ‘새로운’ 동거인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