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새벽, 지상의 모든 숨결이 잠들어 있을 법한 시간에도 ‘검은 골목’이라 불리는 빈민가 시장은 이미 부산했다. 싸구려 등불의 희미한 불빛 아래,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국수 가판대 앞에는 아침 일찍부터 허기를 채우려는 인부들이 줄을 섰고, 저마다 바쁜 손길로 오늘의 생계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활기 넘치는 곳은 유하의 빵 가게였다. 갓 구운 빵 냄새가 좁은 골목을 가득 채우며 지나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유하는 능숙하게 뜨거운 빵을 식힘망에 올리며, 계산을 기다리는 손님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은 유난히 손님이 많네, 유하.”
맞은편 좌판에서 채소를 다듬던 노파, 옥분 할머니가 툴툴거렸다. 하지만 옥분 할머니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 골목의 모든 이들은 서로의 작은 성공에 기꺼이 기뻐해 주는 법이었다.
“그러게요, 할머니. 다들 일찍부터 서두르나 봐요.”
유하의 목소리에도 피곤함보다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그 활기는 곧 차가운 그림자에 덮였다.
시장 입구 쪽에서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국 병사들의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이 골목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하면서도 가장 혐오스러운 소음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향했고, 활기 넘치던 시장의 공기는 순간 얼어붙었다.
병사들은 시장 통로를 가로지르며 걷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은 오만하고, 발걸음은 거만했다. 선두에 선 자는 번쩍이는 은제 견장을 단 장교였다. 그의 뒤를 따르는 병사들은 쇠로 된 몽둥이를 바닥에 끌며 위협적인 소음을 만들어냈다.
“오늘부터 ‘푸른 이끼’ 징수량이 두 배로 늘어난다! 각 가구는 해가 지기 전까지 할당량을 채워라! 적발 시, 즉시 압수 및 벌금 부과다!”
장교의 고함이 시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푸른 이끼’. 축축하고 어두운 지하 수로에서 자라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끼였다. 불과 몇 달 전부터 제국은 이 ‘푸른 이끼’를 대규모로 징수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중위생 개선’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끼가 실제로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징수량이 점점 늘어난다는 것과, 기한 내에 채우지 못하면 가혹한 처벌이 따른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절망과 분노가 스쳤다. 푸른 이끼는 냄새나고 위험한 지하 수로에 들어가 직접 채취해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온종일 매달려도 겨우 한 가구의 할당량을 채울까 말까 했는데, 이제 두 배라니.
“말도 안 돼…! 두 배라니! 사람 죽일 작정인가!”
한 노인이 중얼거렸다. 그의 말은 곧 주변의 웅성거림으로 퍼져나갔다.
“이게 다 무슨 짓인지… 대체 그 이끼를 어디에 쓰려고 이렇게 혈안인 거야?”
옥분 할머니의 목소리에도 분노가 서렸다.
유하는 무심한 표정으로 빵을 구웠지만, 그녀의 눈은 날카롭게 장교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거만하게 시장을 누비며 가판대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유하의 시선이 장교의 망토 끝자락에 멈췄다.
짙은 남색 제복의 망토 끝에 희미하게 붙어 있는, 작지만 선명한 ‘푸른 이끼’ 조각. 그것은 유하가 매일 지하 수로에서 이끼를 채취하는 이웃들에게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종류의 이끼였다. 좀 더 진한 푸른색을 띠고 있었고, 묘한 반짝임마저 느껴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이끼 조각은 너무나도 깨끗했다. 마치 방금 채취한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조심스럽게 다뤄진 것처럼.
‘왜… 저 장교의 옷에 저런 이끼가 붙어있지? 그것도 이렇게 깔끔하게…?’
유하는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보통 지하 수로의 이끼는 흙탕물과 먼지로 뒤덮여 있기 마련이다. 저렇게 깨끗하고 선명한 푸른색을 띠는 이끼는 극히 드물었다.
저녁이 깊어갈 무렵, 시장의 한 귀퉁이에 있는 낡은 창고 안. 유하는 가장 믿음직한 친구들 몇 명과 함께 모여 있었다. 덩치 큰 철공소 인부 한, 날카로운 눈을 가진 직물 상인 미나, 그리고 약재상 일을 돕는 소년 진. 그들은 이 골목의 불안한 심장과도 같은 이들이었다.
“결국 두 배로 늘었어. 다들 아우성이다.” 한이 투박한 손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함께 지쳐 보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미나는 싸늘하게 비웃었다. “아우성만 치면 뭐 해? 달라지는 건 없어. 세금이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 리가 있나. 이번엔 푸른 이끼, 다음엔 또 뭘 뜯어가려 들까?”
“이번엔 좀 이상해.” 유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오늘 장교의 옷에서 특별한 푸른 이끼 조각을 봤어. 깨끗하고, 색깔도 훨씬 진했지. 보통 지하 수로에서 채취하는 것과는 달랐어.”
“특별한 이끼라니?” 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그걸로 뭔가 만드는 건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제국이 이 푸른 이끼를 모으는 진짜 이유가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를 수도 있어.” 유하는 생각에 잠긴 듯 턱을 괬다. “내 생각에, 이 이끼는 단순한 ‘위생용’이 아니야. 어쩌면 그들이 숨기고 있는 어떤 거대한 계획의 일부일지도 몰라.”
“거대한 계획?” 미나가 코웃음 쳤다. “이런 더러운 골목에서 뭘 찾아낸다고? 쥐나 바퀴벌레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그 장교의 망토에 붙어있던 이끼는… 마치 보석 같았어. 그리고 그 이끼 조각,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유하의 눈이 희미한 등불 아래에서 번뜩였다. “아주 오래전, 우리 할아버지께 들었던 이야기에서.”
진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유하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이야기요? 무슨 이야기인데요?”
“수십 년 전, 제국이 이 도시를 세울 때, 지하 깊은 곳에서 특이한 광물을 발견했다고 했어. 그 광물은 특정 식물과 반응해서 밝은 푸른색을 띠고,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한다고 했지. 사람들은 그걸 ‘심연의 눈물’이라고 불렀어. 하지만 그 이야기는 제국에 의해 철저히 금지되었지.” 유하의 목소리가 점차 낮아졌다.
한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심연의 눈물…? 설마 그게 지금 우리가 모으는 푸른 이끼와 관련이 있다는 건가?”
“어쩌면. 그리고 그 장교의 망토에 붙어있던 이끼는… 심연의 눈물이 자라는 환경에서만 발견되는 특유의 색과 광채를 띠고 있었어.” 유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 한구석에 있는 낡은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먼지 앉은 낡은 서류뭉치와 희미한 그림들이 그려진 종이들이 들어있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제국이 금지한 모든 지식과 기록들을 몰래 모으셨어. 이 안에, 뭔가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
미나는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지만, 유하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강한 확신에 그녀의 마음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유하. 우리가 뭘 해야 하는데?” 한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분노 대신 결의가 담겨 있었다.
유하는 서류뭉치 중 하나를 꺼내 펼쳤다. 낡고 바랜 종이 위에는 알아보기 힘든 희미한 그림과 알 수 없는 기호들이 가득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종이 위를 스치자, 먼지가 흩날렸다.
“우리는 제국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아내야 해. 그들이 왜 그토록 이 이끼에 집착하는지, 그리고 그 ‘심연의 눈물’이 대체 무엇인지. 그 진실이 밝혀진다면, 우리는 이 모든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진정한 무기를 얻게 될 거야.”
그녀의 말은 작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지는 창고의 어둠 속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강렬했다. 네 명의 그림자가 희미한 등불 아래에서 서로에게 기댔다. 그날 밤, 잿더미 아래 묻혀 있던 작은 속삭임은 마침내 거대한 제국에 맞설 불씨가 되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