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 게임 (VRMMO)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잿빛 새벽

낡은 캡슐의 삐걱이는 문이 닫히고, 희미한 푸른빛이 시야를 감쌌다. 기계음이 낮게 울리다 멎고, 곧 정교하게 조작된 인공 감각이 내 신경을 잠식했다. 가상현실 게임, ‘낙원’—사람들은 그렇게 불렀지만, 내가 발을 딛는 곳은 결코 낙원이 아니었다. 이곳은 폐허의 연대기, 생존을 위한 지옥 같은 투쟁의 장이었다.

눈을 떴을 때, 탁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실제 같았다. 꿉꿉하고 메마른 먼지 냄새, 곰팡이와 부패한 쇠 냄새가 뒤섞인 역겨운 악취. 머리 위로는 잿빛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고, 그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것은 무너진 도시의 잔해뿐이었다. 건물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았거나, 아예 주저앉아 흙먼지에 파묻혀 있었다. 도로 위에는 녹슨 차들이 흉측한 형상으로 버려져 있었고, 깨진 유리 파편들이 햇빛을 받아 섬뜩하게 반짝였다.

“젠장, 시작부터 이렇다고?”

내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낮은 신음과도 같았다. 튜토리얼 같은 건 없었다. 친절한 시스템 메시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덩그러니, 낡은 버스 정류장 잔해 옆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HUD(헤드업 디스플레이)는 최소한으로만 정보를 표시했다. 우측 상단에 작게 표시된 [HP: 100/100], [스태미나: 100/100]. 그리고 그 아래, [장비: 없음]. [인벤토리: 빈칸].

진정한 생존 게임이었다. 어떤 ‘퀘스트’나 ‘목표’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살아남아라. 그게 유일한 규칙인 듯했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먼지 가득한 공기가 나를 더 각성시켰다. 현실에서 나는 벼랑 끝에 몰린 남자였다. 병든 어머니, 밀린 생활비, 끝없는 빚. 이 게임이 주는 ‘현실 보상’이 아니었다면, 아마 벌써 모든 것을 포기했을 것이다. 죽지 않고 게임 속에서 버티기만 해도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소문에 사람들은 미친 듯이 이 폐허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움직여야 했다. 맨몸으로 이곳에 서 있는 건 죽음을 자처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어디서든 시작해야 했다. 무너진 건물, 부서진 상점, 텅 빈 주유소. 그 모든 곳이 잠재적인 탐색 대상이자, 동시에 위험을 품고 있는 장소였다.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나마 온전해 보이는 슈퍼마켓 건물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깔린 자갈과 유리 파편들이 밟힐 때마다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내딛는 걸음마다 먼지가 피어올랐다. 주변은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했다. 살아있는 것이라면 나 혼자뿐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고요함이 주는 위화감은 오히려 나를 더 긴장시켰다.

슈퍼마켓의 입구는 이미 산산조각 나 있었다. 뼈대만 남은 자동문 잔해를 헤치고 안으로 들어서자, 시원할 리 없는 냉기가 폐허의 습한 공기와 섞여 나를 맞았다. 내부는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진열대는 쓰러져 있고, 상품들은 바닥에 나뒹굴며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천장은 곳곳이 뚫려 빛이 새어 들어왔고, 그 빛줄기 속에는 먼지 입자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음식… 물…”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유통기한 따위는 오래전에 의미를 잃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 폐허 속에서는 무엇이든 생존의 도구가 될 수 있었다. 썩지 않는 통조림, 오염되지 않은 생수, 혹은 쓸만한 도구라도.

한참을 뒤적였다. 텅 빈 선반, 부서진 냉장고, 그리고 쥐똥으로 가득한 바닥. 절망이 점차 나를 짓눌러 왔다. 이런 곳에서 과연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그때, 내 발끝에 딱딱한 것이 걸렸다. 쓰러진 진열대 아래, 먼지에 반쯤 파묻혀 있는 낡은 금속 조각이었다. 나는 몸을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녹이 슬고 날카로운 모서리는 무뎌져 있었지만, 한때는 파이프였을 법한 그 쇳덩이는 한 손에 쥐기 적당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녹슨 쇠 파이프 (내구도: 30/50)]라는 정보가 HUD에 희미하게 떴다.

최초의 무기였다. 비록 보잘것없었지만, 맨손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때였다. 내 뒤편에서 ‘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발끝까지 곤두박질쳤다. 몸을 돌리는 순간,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이미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였다.

키는 나보다 작았지만,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진 팔다리와 앙상한 몸은 공포 그 자체였다. 피부는 시체처럼 푸르죽죽했고,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갈비뼈가 끔찍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눈동자는 없었다. 그저 텅 비고 탁한 구멍이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입은 기형적으로 찢어져 있었고, 날카로운 이빨이 불규칙하게 돋아나 있었다.

*스캐빈저*. 이 폐허를 떠도는 괴물들 중 하나였다.

녀석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느릿하게, 그러나 끊임없이 몸을 흔들며 다가왔다. ‘크르륵, 크르륵’ 하는 짐승 같은 소리가 좁은 슈퍼마켓 안에 울려 퍼졌다.

도망칠까? 아니. 도망쳐 봐야 어디로 도망치겠는가. 이제 막 무기를 얻었고, 이 게임에서 살아남으려면 결국 이런 것들과 싸워야만 했다. 나는 쇠 파이프를 고쳐 잡았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지만, 이를 악물고 눈앞의 괴물을 노려봤다.

스캐빈저가 거리를 좁혔다. 녀석의 긴 팔이 기괴하게 휘두르는 것을 보고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틀었다.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손톱이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행히 직접 맞지는 않았다.

나는 반격했다. 온몸의 힘을 실어 쇠 파이프를 휘둘렀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쇠 파이프가 녀석의 어깨를 강타했다. 스캐빈저의 몸이 휘청였지만, 곧바로 비명을 지르며 다시 내게 달려들었다. 이 게임의 괴물들은 고통을 모르는 것 같았다.

녀석의 공격이 이어졌다. 빠르진 않았지만, 예측하기 힘든 움직임이었다. 한 번, 두 번. 나는 간신히 몸을 피하거나 팔로 막았다. 스캐빈저의 손톱이 내 팔을 스쳐 지나갔다. [HP: 95/100] 짧은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대미지였다.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초보 주제에 이런 괴물에게 죽는다면, 과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여기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현실의 삶도 버텨왔는데, 고작 게임 속 괴물 따위에 질 순 없었다.

“꺼져!”

나는 소리쳤다. 절박함이 섞인 목소리였다. 녀석이 다시 팔을 뻗어오자, 나는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몸을 숙여 녀석의 다리를 향해 파이프를 휘둘렀다. ‘우드득!’ 녀석의 다리에서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스캐빈저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틈이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쓰러진 녀석의 머리를 향해 쇠 파이프를 연이어 내리쳤다. ‘퍽! 퍽! 퍽!’ 역겨운 둔탁음이 슈퍼마켓을 가득 채웠다. 마지막 일격과 함께 녀석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흙먼지처럼 바닥에 스며들듯 사라졌다.

[스캐빈저 처치!]
[경험치 획득: 10]
[아이템 획득: 너덜너덜한 천 조각 (2), 썩은 고기 (1)]

나는 숨을 헐떡이며 쇠 파이프에 몸을 기댔다.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팔다리는 후들거렸고, 심장은 광란하듯 뛰었다. 간신히 첫 싸움에서 이겼지만, 얻은 것은 보잘것없는 잡템과 지독한 피로뿐이었다.

‘썩은 고기’는 어차피 먹지도 못할 것이었다. ‘너덜너덜한 천 조각’은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는 허름한 천 조각을 주워들고 인벤토리에 넣었다.

슈퍼마켓 안은 이제 더욱 고요했다. 스캐빈저와의 사투가 내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이곳은 자비 없는 곳이었다. 어떤 ‘성장’이나 ‘발전’을 논하기 전에, 당장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나는 다시 주변을 살폈다.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이젠 단순히 ‘무엇을 찾을까’가 아니었다. ‘무엇이 나를 살게 할까’, ‘무엇이 위협이 될까’.

눈을 들어 부서진 천장 너머, 잿빛 하늘을 응시했다. 저 멀리, 이 도시의 가장 높은 건물 중 하나가 보였다. 끝이 부서져 불규칙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지만, 주변의 다른 건물들에 비하면 훨씬 더 견고해 보였다. 어쩌면 그곳에는… 아직 남아있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곳이 바로 나의 다음 목표가 되었다. 살아남기 위한, 폐허에서의 첫 걸음이었다. 어떠한 미련도, 동정도 허락되지 않는, 오직 생존만이 지배하는 황폐한 세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