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두 시가 훌쩍 넘은 시간, 강민은 낡은 회색 소파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하루 종일 모니터와 씨름하다 지친 눈꺼풀은 천근만근이었다. 삑, 삑, 삑. 건조한 디지털 시계 소리가 적막한 아파트 실내를 가늘게 찢었다. 202호. 겉보기엔 여느 신도시 아파트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곳이었지만, 사실 이 건물은 낡은 증기 도시의 유산 위에 간신히 세워진 껍데기에 불과했다. 곳곳에 스며든 녹슨 철의 냄새와 벽 너머에서 가끔 들려오는 수상한 마찰음은 그 증거였다.
“젠장, 또 시작이네.”
강민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귀에는 언제부터인가 익숙해진 낮은 울림이 감지되고 있었다. 미세한 진동. 마치 저 멀리 어딘가에서 거대한 톱니바퀴가 천천히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웅웅거리는 소리였다. 처음엔 위층에서 들려오는 소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소리는 일정하지 않았고, 어떤 날은 천장에서, 어떤 날은 벽에서, 또 어떤 날은 마루 바닥에서 불쑥 솟아나는 듯했다.
털썩.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리모컨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민은 귀찮다는 듯 눈만 들어 그것을 내려다봤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아니면 손에서 놓쳤나.’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다시 리모컨을 주워 들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싱크대에 놓아두었던 머그컵이 스르륵 미끄러지더니, 쨍그랑!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강민은 벌떡 일어났다. 이젠 착각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는 분명히 컵이 미끄러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컵을 민 것처럼.
“뭐야…?”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어젯밤에는 잠결에 침대 발치에 두었던 스탠드가 갑자기 ‘탁!’ 소리를 내며 꺼지더니, 혼자서 ‘윙-‘ 하고 다시 켜지는 기현상을 겪었다. 새벽녘에는 거실에 놓인 낡은 태엽 시계의 추가 갑자기 미친 듯이 흔들리며 ‘째깍, 째깍, 째깍!’ 하고 굉음을 내기도 했다. 그 시계는 이사 올 때부터 고장 나 멈춰 있던 것이었다.
“혹시… 환기통에 쥐라도 들어가서 컵을 떨어트렸나?”
강민은 애써 현실적인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그는 고장 난 태엽 시계를 노려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시계는 여전히 멈춰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초침이 당장이라도 튀어 오를 것 같은 섬뜩한 기운을 풍겼다.
그때였다. 거실 천장의 형광등이 ‘지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깜빡이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불빛은 점점 더 불안정해지더니, 이내 마치 누군가 전선을 흔드는 것처럼 미친 듯이 번쩍였다. 방 안은 희미한 불빛과 어둠이 불규칙적으로 교차하며 기괴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낡은 건물 특유의 고질적인 문제라기엔 너무 과격한 현상이었다.
“이게… 대체…”
강민은 벽에 기댄 채 굳어버렸다. 어둠 속에서 벽에 걸린, 황동으로 된 액자가 천천히 기울어지는 것이 보였다. 삐그덕, 삐그덕. 액자를 지탱하는 낡은 못에서 섬뜩한 마찰음이 울렸다. 그리고 액자는 기어코 벽에서 떨어지기 직전까지 기울어지더니, 갑자기 크게 덜컹! 흔들렸다. 그 순간, 방 전체에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었다. 에어컨을 켜지도 않았는데 한겨울 찬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한기에 강민은 저절로 팔을 감쌌다.
웅웅거리는 진동음이 더욱 선명해졌다. 이제는 둔탁한 기계음처럼 들렸다. 마치 거대한 기계 장치들이 그의 벽 속에서 숨 쉬고 있는 것 같았다. 강민은 본능적으로 가장 진동이 심한 거실 벽에 귀를 가져다 댔다.
‘틱… 틱… 틱…’
시계 소리와는 다른, 훨씬 깊고 묵직한 규칙적인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쇠와 쇠가 맞물리며 돌아가는 듯한 ‘철컥, 철컥’ 하는 소음, 그리고 ‘쉬이이익-‘ 하고 빠져나가는 증기음까지. 환청이 아니었다. 분명히 그의 아파트 벽 안에, 오래된 기계 장치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갑자기 벽 한쪽에 작게 나 있던 환기구에서 희미한 녹색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은 마치 심해의 야광 생물처럼 어둠 속에서 오묘하게 반짝였다. 강민은 홀린 듯 그쪽으로 다가갔다. 낡은 철제 환기구 안쪽으로는 섬세한 톱니바퀴와 황동 파이프 같은 것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벽 속에서 불어오는 찬 공기에는 희미한 기름 냄새와 쇠 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이 건물… 대체 뭐야?’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때, 거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낡은 황동 기압계가 갑자기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늘은 눈금을 맹렬하게 오르내리며 거의 수직으로 솟구쳤다. 마치 미친 듯이 에너지를 흡수하는 것처럼. 기압계의 둥근 황동 케이스는 뜨겁게 달아올라 희미하게 증기를 뿜어내는 듯했다.
쾅!
순간, 벽 안쪽에서 쇠붙이가 부딪히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아파트 전체가 거대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격렬하게 흔들렸다. 선반 위에 놓여 있던 책들과 잡동사니들이 사정없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접시가 깨지고, 화병이 넘어지며 물을 쏟았다. 녹색 빛은 더욱 강렬하게 번쩍였다. 환기구 안쪽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팔이었고, 다리였고, 그리고 톱니바퀴와 밸브로 이루어진 형체였다.
“으아악!”
강민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그것은 유령이 아니었다. 벽 속에서 기이한 증기음과 함께 깨어나고 있는 것은, 오래된 증기 도시의 유산이 만들어낸, 살아 있는 기계 장치였다. 그의 아파트는 그저 그 거대한 기계 장치의 껍데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멈춘 듯 고요해진 순간, 그의 귓가에 또렷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어서… 돌려…’
그것은 마치 증기가 빠져나가는 소리처럼, 기계음이 섞인 듯한 섬뜩한 목소리였다. 강민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벽을 노려봤다. 벽 안에서, 아직도 무언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기척이 느껴졌다. 그의 손이 닿을 듯한 거리에, 벽지가 살짝 찢어져 드러난 낡은 콘크리트 틈새로, 번쩍이는 황동 톱니바퀴의 날카로운 이빨이 섬뜩하게 드러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