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차가운 심연의 끝에서
철컹, 철컹.
쇠사슬이 부딪치는 소리가 축축한 어둠 속을 갈랐다. 이진은 차가운 돌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미동도 없었다. 며칠째인지, 몇 달째인지도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찢어진 기억의 조각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지하 감옥의 공기는 썩은 흙냄새와 피비린내, 그리고 희미한 절망의 냄새로 가득했다. 한때 제국 대하(大河)를 수호하는 용맹한 장군이라 불렸던 그의 몸은 이제 뼈와 가죽만 남은 앙상한 몰골이 되어 있었다.
“흐읍…”
갈라진 목에서 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른 입술을 혀로 축여 보려 했지만, 이미 감각조차 무뎌진 지 오래였다. 손목과 발목에 채워진 쇠고랑은 살을 파고들어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었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고문과 굶주림은 그의 정신마저 서서히 잠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육신의 아픔이 아니었다. 그의 심장을 갉아먹는 것은 한순간도 잊히지 않는 배신감과 지독한 억울함이었다.
강휘. 그 이름 세 글자가 떠오르자 이진의 핏발 선 눈동자에 걷잡을 수 없는 증오가 불타올랐다.
강휘. 그는 이진의 유일한 벗이자,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전우였다. 어린 시절부터 모든 것을 함께 나누었던 형제 같은 사이. 이진이 장군이 되자 그는 기꺼이 부관이 되어 그림자처럼 따랐다. 변방의 오랑캐를 무찌르고, 반역 세력을 진압하며 수많은 전장을 함께 피로 물들였다. 승리의 밤, 땀과 피로 얼룩진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나눴던 그 뜨거운 눈빛과 굳건한 맹세들은 모두 거짓이었단 말인가.
“하… 하하…”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광기 어린 웃음이었다.
그날은 제국이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던 북방 오랑캐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하던 날이었다. 백성들의 환호와 병사들의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이진은 승리의 여신이 안겨준 월계관을 쓰고 당당히 황궁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황제의 칭찬도, 백성들의 축하도 아니었다.
**”이진, 네 이놈! 감히 역심을 품고 제국의 근간을 흔들려 하였는가!”**
황제의 진노 어린 목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이진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때,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던 강휘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의 손에는 이진이 은밀히 주고받았던 서신 몇 통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 서신은 황제의 명이 담긴 비밀 지령이었고, 다른 내용은 없었다.
“이진 장군이 역적들과 내통하여 황제를 폐위하고 스스로 황위에 오르려 했습니다! 여기 그 증좌가 있습니다!”
강휘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확신에 차 있었다. 그 서신들은 정교하게 위조되어 있었다. 이진의 필체와 인장이 완벽하게 모방되어, 역모를 꾸미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진은 반박하려 했지만, 이미 모든 것이 준비된 함정이었다. 강휘는 그의 모든 행적을 꿰뚫고 있었고, 그 정보들을 교묘하게 짜깁기하여 완벽한 역모의 증거를 만들어냈다.
믿을 수 없었다. 어째서. 도대체 어째서 그는 이진에게 이토록 잔혹한 칼날을 들이밀었는가. 이진은 반항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세운 제국의 병사들이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모습에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강휘는 그에게 죽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죽음은 너무나 쉬운 도피처가 아니겠는가? 네놈은 살아남아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똑똑히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것이 강휘가 자신에게 속삭이던 마지막 말이었다. 그의 눈빛은 뱀처럼 차가웠고, 비릿한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었다. 그 순간, 이진은 깨달았다. 강휘는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해왔음을. 그의 모든 미소와 칭찬은 껍데기에 불과했으며, 그 속에는 독이 든 칼날이 숨겨져 있었음을.
철컥.
무거운 철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익숙한 발소리였다. 간수였다.
“자, 역적 놈아. 오늘 너에게 줄 마지막 선물이다.”
간수는 흙이 뒤섞인 죽 한 그릇을 이진 앞에 던졌다. 질퍽한 소리를 내며 그릇이 바닥에 놓였다.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김조차 더럽게 느껴졌다. 이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배고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이 감옥의 어둠 속으로 영원히 잠식되어버릴 것 같은 무력감만이 그를 지배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웅크린 몸을 들어 올리려던 이진의 시야에 바닥에 놓인 죽 그릇의 놋쇠 부분이 언뜻 스쳤다. 얼핏 비친 흐릿한 형상. 그것은 오랜 시간 굶주려 앙상하게 변한 자신의 얼굴이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와 푹 파인 뺨, 푸르죽죽한 입술.
그 형상 속에서 이진은 문득 강휘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만하게 비웃던 그 비릿한 미소를. 강휘는 분명 이진이 이대로 비참하게 죽어가기를 바랄 것이다. 자신이 쌓아 올린 명예가 모두 짓밟히고, 모든 것을 잃은 채 감옥의 어둠 속에서 스러져 가기를.
*…과연 그럴까?*
피폐해진 이진의 뇌리 속에서 한 줄기 섬광이 번뜩였다. 강휘는 그에게 죽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 ‘살아남아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똑똑히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 말은 곧, 강휘 자신 또한 이진이 끝까지 고통받기를 바란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이진은 죽어서는 안 되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진의 눈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흐릿했던 초점이 맞춰지고, 그의 동공은 마치 심연의 밑바닥에서 피어나는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손목을 짓누르는 쇠사슬의 무게가 다시 느껴졌다. 뼈마디가 쑤시고 근육이 당기는 고통이 생생하게 전해져왔다.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이진은 힘겹게 손을 뻗어 죽 그릇을 움켜쥐었다. 더러운 죽을 한 숟가락 퍼서 입에 넣었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강휘. 네가 내 모든 것을 빼앗아갔으니.
이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하 감옥의 좁은 창살 너머로 희미한 달빛 한 조각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 빛은 너무나 약해서 감옥의 어둠을 밝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이진의 눈빛은 그 달빛을 삼키고도 남을 만큼 강렬하게 타올랐다.
*강휘… 네가 내 모든 것을 앗아갔으니, 나는 네 모든 것을 부술 것이다.*
그의 입술 사이에서 으스러지는 듯한 맹세가 터져 나왔다. 피를 토하듯 처절하고, 심장을 찢는 듯한 고통이 실린 맹세였다. 더 이상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지 않으리라. 비록 지금은 감옥에 갇힌 초라한 역적에 불과하지만, 반드시 이 지옥에서 벗어나리라.
그리고 그에게 이 모든 고통을 안겨준 자에게, 백 배 천 배로 되갚아주리라.
이진의 눈빛은 복수심으로 번들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절망이나 무기력함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차가운 살의만이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차가운 심연의 끝에서, 한 마리 굶주린 짐승이 깨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