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풍이 불어왔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앙상한 뼈대만 남은 빌딩 숲 사이를 헤치고 지나는 바람은, 메마른 비명처럼 스산하게 귓가를 스쳤다. 강철은 오래된 철골 더미 위에 웅크리고 앉아 황혼이 짙게 깔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노을은 언제나처럼 이 망가진 세상에 기괴한 아름다움을 덧씌웠다. 마치 피를 토한 대지의 마지막 한숨처럼.
“젠장, 아무것도 없어.”
건조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에서 겨우 새어 나왔다. 이틀째, 제대로 된 먹을거리는 고사하고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등 뒤의 낡은 배낭은 텅 비어 있었고, 허리춤에 찬 녹슨 단도만이 그의 유일한 벗이었다. 발아래 펼쳐진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폐허, 한때는 ‘도시’라 불렸던 거대한 묘지였다.
강철은 온몸을 덮은 누더기 옷을 여몄다. 체온은 자꾸만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겨울이 오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이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나야 했다. 겨울은 이 대재앙 이후,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숨통을 조이는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낡은 작업화가 발아래 부스러진 콘크리트 조각들을 으스러뜨렸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짐승 울음소리가 그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이 망가진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변이된 짐승들도, 무너진 건물더미도 아니었다. 바로 인간이었다.
사흘 전, 그는 한 무리의 약탈자들에게 쫓기다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때 얻은 상처는 아직도 옆구리에서 지끈거렸다. 강철은 한때 무림의 정파 문파에서 검을 배웠던 자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 지금, 그의 검술은 그저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도구일 뿐이었다. 화려한 초식도, 거창한 명분도 없었다. 오직 베고, 찌르고, 막아내는 본능적인 움직임만이 남았다.
그는 눈앞에 우뚝 솟은,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낡은 공장 건물을 바라보았다. 저곳이라면 혹시, 하는 희망이 실낱처럼 그의 가슴을 간질였다. 하지만 동시에 불길한 예감이 똬리를 틀었다. 저런 곳은 분명 다른 이들의 눈에도 띄었을 터.
“그래도 가봐야지.”
강철은 마른침을 삼켰다. 한 걸음, 한 걸음, 지독한 허기와 싸우며 발걸음을 옮겼다. 공장 내부로 들어서자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코를 찔렀다. 널브러진 기계 잔해들과 먼지가 수북이 쌓인 선반들이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어둠 속을 더듬어 들어가던 그의 눈에 한 줄기 빛이 스쳤다. 천장의 구멍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 아래, 오래된 작업대 위에 놓인 것이 보였다. 작은 캔 하나. 통조림이었다.
강철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었다. 이 폐허에서, 그것도 통조림이라니. 그는 망설일 틈도 없이 그것을 향해 달려갔다. 캔을 움켜쥐는 순간, 그의 손끝에 단단한 감촉이 전해졌다. 녹슬었지만, 아직 찌그러지지는 않은 멀쩡한 통조림이었다. 고기 통조림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음식의 향기가 환각처럼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캔을 따서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싶었지만,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얻은 경고음이 그의 뇌리에서 울렸다.
*경계해라. 너무 쉽게 얻는 것은 언제나 더 큰 대가를 요구한다.*
강철은 주변을 경계하며 캔을 품에 안았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철컥 소리.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형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허름한 옷차림에 얼굴에는 온통 흙먼지가 뒤덮여 있었고, 앙상한 손에는 녹슨 쇠꼬챙이와 날카로운 조각칼이 들려 있었다. 약탈자들이었다.
“흐흐, 제법이잖아? 그렇게 귀한 걸 찾다니.”
앞쪽에 선 자가 비틀린 웃음을 흘렸다. 그의 눈동자는 굶주린 짐승처럼 번뜩였다.
“그거, 우리 거야. 곱게 내놔.”
강철은 통조림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이 자들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굶주림과 광기를 직감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자들이었다.
“이건 내가 찾은 거다.” 강철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다. “탐내지 마라.”
“오호라? 배짱도 두둑하군.”
뒤편의 약탈자가 비웃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 그는 쇠꼬챙이를 바닥에 찍으며 위협적으로 몸을 흔들었다.
“어차피 혼자선 다 못 먹을 거 아니냐? 우리랑 나눠 먹자고.”
“나눠 먹을 생각이라면 애초에 이런 식으로 튀어나오지 않았겠지.”
강철은 품속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금속이 부딪히는 긁힌 소리가 공장 안에 날카롭게 울렸다. 낡은 단도였지만, 그의 손에 들리자마자 마치 살아있는 독사처럼 번뜩였다.
“흥, 그까짓 녹슨 칼로 뭘 하겠다는 거야?”
앞선 약탈자가 쇠꼬챙이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강철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의 시야는 지극히 좁은 하나의 점에 집중되었다. 상대의 움직임, 호흡, 미세한 근육의 떨림까지.
*휘익!*
쇠꼬챙이가 그의 머리를 노리고 맹렬하게 날아왔다. 강철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여 간발의 차이로 공격을 피했다. 동시에 그의 단도가 섬광처럼 움직였다. 약탈자의 팔뚝을 노린 정확하고 빠른 찌르기.
“크악!”
약탈자가 비명을 지르며 팔을 움켜쥐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강철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다음 움직임을 준비했다. 이 세상에서 망설임은 곧 죽음이었다.
뒤편의 약탈자가 눈이 휘둥그레져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이, 이놈이!”
그가 들고 있던 조각칼을 허공에 휘두르며 달려들었지만, 그의 움직임은 앞선 약탈자보다도 훨씬 엉성하고 느렸다. 강철은 재빠르게 몸을 숙여 칼날을 피하고는 그대로 약탈자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그의 팔목을 붙잡아 비틀자, 약탈자의 손에서 조각칼이 떨어져 나갔다.
“이, 이거 놔!”
강철은 비틀린 팔목을 한 번 더 비틀어 약탈자를 바닥에 무릎 꿇렸다. 그리고는 단도를 그의 목에 겨눴다. 차가운 쇠붙이의 감촉이 피부에 닿자 약탈자는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만해! 항복, 항복이다!”
피를 흘리며 주춤거리고 있던 첫 번째 약탈자도 다급하게 외쳤다. 그의 눈빛은 이미 투쟁심을 잃고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강철은 그들을 번갈아 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굶주림과 비굴함, 그리고 생존을 위한 처절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어쩌면 그들 역시 자신과 다르지 않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가련한 존재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강철은 어떤 자비도 베풀 여유가 없었다. 자비는 이 폐허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감정이었다.
“꺼져.”
강철의 입에서 짧고도 단호한 말이 튀어나왔다.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띄지 마라. 다음번엔 목숨을 보장할 수 없을 테니.”
두 약탈자는 기침을 컥컥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철이 칼을 거두자마자,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부상당한 팔도 잊은 채 폐허의 어둠 속으로 도망쳐 사라졌다.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강철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는 다시 작업대 위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그곳에 놓인 고기 통조림. 캔을 다시 움켜쥐자, 이번에는 안도감과 함께 깊은 허기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강철은 폐허가 된 공장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캔을 열자, 고소하고 짭짤한 냄새가 후각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숟가락도 없이 손가락으로 통조림을 파먹기 시작했다. 차갑고 뻑뻑한 고기였지만, 그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진수성찬이었다.
한 입, 두 입. 굶주렸던 위장이 서서히 채워지는 것을 느끼자, 그의 온몸에 힘이 돌아오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홀로 먹는 통조림은 처절한 생존의 증거이자, 내일을 살아갈 작은 희망이었다.
텅 빈 캔을 바닥에 내려놓고 나서야 강철은 몸을 기댔다. 차가운 벽이 그의 등골을 파고들었지만, 통조림 하나로 얻은 온기는 그 모든 것을 잊게 할 만큼 값졌다.
창밖의 달빛은 더욱 창백해졌다. 잿빛 폐허는 밤의 장막 아래 잠들어 있었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이 그림자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강철은 잠시나마 평화를 느꼈다. 이 밤이 지나면 또다시 굶주림과 싸우고, 위험과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 밤, 그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내일도, 그는 살아남을 것이다.
강철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빛에는 지쳐 보이는 피로와 함께,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강철 같은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이곳이 바로, 대재앙이 휩쓸고 간 세상의 새벽이었다.
생존은 가장 원초적인 무협이었다.
그리고 강철은, 그 무협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