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 스릴러 독립적인 단편 소설

잿빛 도시는 숨 쉬는 법을 잊었다. 잿더미가 하늘을 가린 지 꽤 오래된 날들 속에서, 유나는 오직 발아래의 파편과 머리 위를 맴도는 침묵에만 귀 기울였다. 태양은 언제나 흐릿한 오렌지색 점으로, 그저 거대한 황혼의 연장선일 뿐이었다. 먼지는 폐허의 잔해와 생존자들의 흔적을 덮고, 모든 것을 지워버렸다.

유나는 무너진 상점가 깊숙한 곳을 헤집고 있었다. 철골은 엿가락처럼 휘어져 있었고,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들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부서진 유리와 금속이 날카로운 소리를 냈지만, 유나는 그것조차 무시했다. 이미 죽은 도시에 사는 이들의 귀에 들리는 소음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살아 있는 자들의 발소리였다. 혹은, 살아있었으나 죽은 자들의 기억이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낡은 금속 탐지기는 계속해서 둔탁한 소음을 냈다. 캔 조각, 녹슨 못, 버려진 탄피… 매번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며칠째 입에 넣은 것이라고는 빗물 저장통 바닥에 깔린 흙탕물을 걸러낸 것이 전부였다. 뱃속에서는 굶주림이 날카로운 이빨을 세우고 그녀의 내장을 갉아먹는 듯했다.

“젠장.”

작게 욕설을 읊조렸다. 목이 뻣뻣했다. 마스크를 썼지만 잿가루는 기어이 목구멍 안으로 파고들어 그녀의 목소리를 긁어냈다. 지끈거리는 머리통을 부여잡고 잠시 주저앉았다. 희미한 먼지 사이로 한때 찬란했을 유흥가의 간판 조각이 보였다. 색 바랜 글씨들이 으스스하게 흔들렸다. 그 글씨들 사이에서, 유나는 자신의 그림자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절망했다. 고독은 그녀의 동반자였고, 때로는 그녀의 적이었다.

탐지기가 다시 ‘삐빅’ 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규칙적이고 강렬한 신호였다. 유나는 몸을 일으켰다. 벽장에서 튀어나온 녹슨 철판 뒤, 짓이겨진 비닐 더미 아래였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파편들을 걷어냈다. 흙먼지 속에서 드러난 것은 낡은, 그러나 밀봉된 양철 캔이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 통조림. 그것도 복숭아 통조림이었다!

유나는 숨을 멈췄다. 믿을 수 없었다. 이 잿빛 도시에서, 통조림은 금화보다 귀했다. 그것도 복숭아라니. 그녀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캔을 품에 안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피부에 닿았다. 녹이 슬었지만 뚜껑은 단단히 닫혀 있었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당장이라도 캔을 따서 달콤한 과육을 맛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성을 잃으면 안 된다. 통조림 따개를 찾아야 했다. 아니, 차라리 아껴두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며칠은 버틸 수 있는 비상 식량이었다.

그녀는 캔을 다시 한번 품에 끌어안고,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이 폐허에는 늘 다른 눈들이 숨어 있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만이 그녀를 감쌌다.

그녀가 막 몸을 돌리려던 찰나, 어둠 속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톡, 톡.’

유나의 심장이 발작적으로 울렸다. 마치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였다. 아주 작고 섬세한 소리. 이 폐허에서는 바람 한 점도 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급히 몸을 숨겼다. 낡은 상점 진열대의 깨진 거울 뒤로 몸을 바싹 붙였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손에 든 캔이 차갑게 느껴졌다.

‘톡, 톡, 톡.’

소리는 더 가까워졌다. 아니, 더 또렷해졌다. 마치 무언가 금속을 긁는 듯한 소리였다. 유나는 망설였다. 들키지 않으려면 움직여서는 안 된다. 하지만 상대가 무엇인지 확인해야 했다. 이 폐허의 모든 소리는 잠재적인 위협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거울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눈은 어둠에 익숙해져 있었고, 작은 움직임 하나 놓치지 않으려 했다.

어둠 속, 무너진 천장에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빛줄기 아래,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처음에는 동물이 아닐까 생각했다. 쥐나 길 잃은 개 같은. 하지만 그림자는 움직였다. 매우 느리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리고 그 그림자의 형체가 드러났을 때, 유나는 숨을 들이켰다.

아이였다.

열 살 남짓 해 보이는 작은 아이.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몸, 찢어진 옷, 먼지와 흙으로 범벅된 얼굴. 아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작은 돌멩이로 녹슨 철판을 긁고 있었다. ‘톡, 톡’ 소리는 그 아이가 내는 것이었다. 무의미한, 그저 시간을 때우는 듯한 몸짓.

유나는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이는 그녀를 보지 못하는 듯했다. 아니, 보는 것 같았다. 아이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유나가 비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캔을 더욱 꽉 쥐었다. 이 아이가 과연 혼자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미끼일까? 이 폐허에서 순수한 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아이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정확히 유나가 숨어 있는 곳을 향해서.

유나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들켰다.

“누나….”

아이의 목소리는 너무나 작아서, 바람 소리조차 없는 폐허 속에서 겨우 들릴 정도였다. 갈라지고 메마른 목소리였다.

“누구야?” 유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이미 옆구리에 찬 칼자루를 움켜쥐고 있었다.

아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는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아이의 눈은 유나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 속에서 유나는 자신을 보고 있는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민우…예요.” 아이는 간신히 대답했다. “배고파요.”

민우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유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 눈빛은 너무나 투명해서, 오히려 유나를 당황시켰다. 이 아이는 위협적이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위험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예측 불가능한 존재였으니까.

유나는 민우의 눈에서, 오래전 잃어버린 자신의 동생, 지은의 얼굴을 언뜻 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손에 들린 복숭아 통조림이 엄청난 무게로 느껴졌다.

“혼자야?” 유나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아빠는… 없어졌어요.”

‘없어졌다.’ 이 세상에서 사라진 모든 존재를 칭하는 흔한 말이었다. 죽었을 수도 있고, 버려졌을 수도 있고, 길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중요한 건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유나는 고민했다. 이 아이를 데리고 가면, 자신의 생존 가능성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식량은 물론, 위험으로부터 둘 모두를 지켜야 한다. 하지만… 지은의 얼굴이 계속해서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버릴 수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이리 와.” 유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 자신에게도 낯설었다.

민우는 망설임 없이 유나에게 다가왔다. 아이답지 않게 빠른 걸음이었다. 유나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민우는 유나의 손에 들린 통조림을 빤히 쳐다보았다.

“복숭아….” 민우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 속에 감춰진 굶주림이 날것 그대로 드러났다.

유나는 통조림을 움켜쥐고 고개를 저었다. “이건 나중에. 일단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해.”

민우는 아무 말 없이 유나를 따라왔다. 그의 작은 발걸음은 유나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랐다. 유나는 계속해서 민우를 의식했다. 너무나 조용한 아이였다. 아이답지 않은 침묵은 오히려 그녀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그들은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유나가 이전에 임시 거처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외부와 차단된 지하 공간. 찢어진 천과 널빤지로 겨우 입구를 가려두었다.

어둠 속으로 들어서자 민우는 작게 콜록였다. 유나는 준비해 둔 물통을 내밀었다. 몇 방울 되지 않는 귀한 물이었다. 민우는 물통을 받아들고 천천히, 아껴 마셨다.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았다.

“배고프지?” 유나가 물었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나는 한숨을 쉬었다. 결국… 그녀는 품에 든 복숭아 통조림을 꺼냈다. 돌멩이를 이용해 조심스럽게 캔을 땄다. ‘틱’ 소리와 함께 캔 뚜껑이 열리자, 달콤하고 향긋한 복숭아 향이 어두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유나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황금빛 복숭아 조각이 캔 속에 잠겨 있었다. 유나는 그것을 절반으로 나누어 민우에게 주었다.

“이것만 먹어. 나머지는 내일.”

민우는 두 손으로 복숭아를 받아들었다. 그의 눈은 마치 보석을 보는 듯 반짝였다. 그리고 아이는 천천히 복숭아를 입에 넣었다. 한 입 베어 물자, 달콤한 과즙이 흘러내렸다. 민우의 얼굴에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아이였다.

유나는 자신의 몫을 아껴 먹었다. 한 조각 한 조각이 너무나 소중했다. 달콤함이 입안 가득 퍼져 나갔다. 잊고 지냈던 감각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유나는 민우에게 낡은 담요를 덮어주었다. 민우는 금세 잠이 들었다. 하지만 유나는 잠들 수 없었다. 잿빛 도시의 밤은 늘 그랬듯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오늘은 다른 소리가 그녀를 괴롭혔다. 바로 민우의 작고 규칙적인 숨소리였다.

‘나는 왜 이 아이를 데려왔을까?’

수없이 되뇌는 질문이었다. 그녀는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감정, 동정,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 하지만 민우의 눈에서 지은을 본 순간, 그녀의 모든 원칙은 무너졌다.

그녀는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것이었다. 민우를 죽여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아니, 그녀 자신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이 폐허에서는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심지어 자신도.

며칠이 흘렀다. 민우는 유나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그는 불평하지 않았고, 질문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저 유나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가끔 먼지 속에서 작은 나뭇가지나 쓸모없는 돌멩이를 주워 유나에게 내밀었다. 마치 선물을 주는 어린아이처럼.

“이런 건 필요 없어.” 유나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하지만 민우는 실망하는 기색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의 침묵은 유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너무 완벽하게 조용한 아이였다.

어느 날, 그들은 물을 찾기 위해 외곽의 오래된 수도시설로 향했다. 그곳은 오래전 파괴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했지만, 깊은 곳에는 아직 고인 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있었다.

폐허가 된 수도시설은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거대한 파이프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고, 축축한 습기가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유나는 탐지기를 들고 앞장섰다. 민우는 유나의 뒤에서 조용히 걸었다.

“여기서 기다려.” 유나가 말했다. “내가 먼저 들어가 볼게.”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나는 좁은 통로 안으로 몸을 숙여 들어갔다. 철제 문을 열자 어두컴컴한 내부가 드러났다. 곰팡이 냄새와 썩은 냄새가 뒤섞여 올라왔다.

“유나 누나.”

민우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유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민우는 그녀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언제 따라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왜 따라왔어? 기다리라고 했잖아.” 유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 폐허에서 혼자 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

“무서워요.” 민우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유나는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래, 그럼 내 옆에 바싹 붙어 있어. 절대로 떨어지지 마.”

그들은 함께 어두운 내부로 들어섰다. 유나는 손전등을 켰다. 낡은 손전등의 희미한 불빛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벽에는 끔찍한 형상의 곰팡이들이 피어 있었고, 바닥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흥건했다.

그들이 깊숙이 들어섰을 때였다. 바닥에 놓인 낡은 철제 상자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끄으으응….’

유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굳혔다. 그 소리는 명백히 사람이 내는 소리였다.

“누가 있어!” 유나가 민우를 자신의 뒤로 밀어 넣으며 속삭였다. 그녀는 칼을 꺼내 들었다.

철제 상자 뒤에서, 그림자 속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해골처럼 마른 얼굴, 찢어진 옷, 그리고 섬뜩하게 번뜩이는 눈동자. 그는 유나를 발견하자마자, 굶주린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물… 물 좀 줘!” 남자는 갈라진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그의 손에는 낡은 쇠 파이프가 들려 있었다.

이곳은 이미 다른 생존자가 선점한 구역이었다. 유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남자는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우린 그냥 물만 찾으러 왔어.” 유나가 경고하듯 말했다. “싸우고 싶지 않아.”

남자는 그녀의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오직 유나의 허리에 찬 물통을 향해 있었다. 굶주림과 광기가 뒤섞인 눈빛이었다.

“물… 가져와!” 남자는 쇠 파이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유나는 재빨리 몸을 피했다. 쇠 파이프가 벽을 때리며 ‘쾅’ 하는 소리를 냈다. 콘크리트 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민우, 도망쳐!” 유나가 외쳤다.

하지만 민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유나의 뒤에 선 채, 멍한 눈으로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 같았다.

유나는 남자의 공격을 피하며 거리를 벌렸다. 칼을 휘둘러 남자의 팔을 스쳤다. 남자는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광기로 번뜩였다.

“감히 내 것을 건드려!” 남자가 소리쳤다. 그는 다시 달려들었다.

유나는 망설였다. 이 남자를 죽여야 하나? 이곳에서 이런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죽이지 않으면 그녀가 죽는다. 민우도 위험해진다.

그 순간, 민우가 작게 속삭였다.

“누나….”

유나는 잠시 민우를 돌아보았다. 민우는 어두운 통로 끝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에는 낡은 철제 문이 있었다. 비상구였다.

유나는 민우의 눈을 보았다. 그 속에는 왠지 모를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민우의 말을 믿기로 했다.

“이리로 와!” 유나는 남자의 공격을 다시 한번 피하며 민우를 향해 달려갔다. 남자는 집요하게 뒤를 쫓았다.

유나는 민우와 함께 비상구 문을 열었다. 낡은 문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들은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남자는 여전히 뒤를 쫓아왔다.

“거기 서!” 남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유나는 민우의 손을 잡고 달렸다. 잿빛 도시의 바깥은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들은 무너진 건물들 사이를 지나쳤다. 더 이상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달렸다.

결국 유나는 지쳐서 주저앉았다. 민우는 그녀의 옆에 조용히 앉았다.

“그 문은 어떻게 알았어?” 유나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민우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냥… 알았어요.”

유나는 민우를 쳐다보았다. 이 아이는 이상했다. 너무 조용하고, 너무 침착했다. 그리고 가끔 이렇게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녀는 지은이라면 이렇게 침착하게 행동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지은은 늘 웃고 떠들며 장난치기 바빴으니까.

그녀의 불안감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민우는 정말 누구일까? 그는 왜 혼자였을까?

그녀는 민우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를 자신에게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차가운 바람이 그들의 뺨을 스쳤다.

밤이 깊어지고, 유나는 또다시 잠들지 못했다. 민우는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무언가를 잊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의 시선은 민우의 옆에 놓인 작은 조약돌에 닿았다. 민우가 아까 주워온 것이었다. 둥글고 매끄러운 조약돌. 그녀는 무심코 그 조약돌을 집어 들었다.

조약돌의 표면에는 희미한 자국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아주 정교하게 긁어낸 문양이었다.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7.’

유나의 심장이 다시 한번 발작적으로 뛰었다. 그녀는 조약돌을 꽉 움켜쥐었다. 땀이 배어 나왔다.

‘7.’

이것은 지은이 가장 좋아하던 숫자였다. 그리고… 그녀가 지은과 마지막으로 함께 있던 날의 날짜였다.

유나의 머릿속에서 혼란스러운 기억들이 뒤섞였다. 잿빛 먼지, 무너지는 건물, 그리고 지은의 비명. 그녀는 그날 지은의 손을 놓쳤다. 수많은 파편과 먼지 속에서, 지은은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그날 이후, 지은이 죽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조약돌은 뭐지? 민우는 왜 지은의 숫자와 관련된 것을 가지고 있는 거지?

유나는 잠든 민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이의 얼굴은 평화로웠다. 너무나 평화로워서, 오히려 섬뜩했다.

그 순간, 민우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는 밤의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빛났다.

“누나….” 민우의 목소리는 잠결처럼 나른했다.

유나는 조약돌을 뒤로 숨기며 물었다. “너… 이 조약돌 어디서 났어?”

민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아까… 누나 가 있을 때 주웠어요. 예쁘죠?”

그의 미소는 너무나 순수해서, 유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그녀의 심장은 계속해서 불안하게 울렸다. 민우가 말하는 ‘누나 가 있을 때’는 그녀가 혼자 물을 찾으러 갔던 때였다.

‘그럼 민우는 내가 없던 시간에 이걸 주웠다는 거야?’

그때였다. 민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속에 담긴 것은 더 이상 순수한 아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누나, 지은이 보고 싶죠?” 민우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아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유나는 숨을 멈췄다. 그녀는 민우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은이라는 이름은 그녀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 묻어둔 상처였다. 민우는 어떻게 그 이름을 알았을까?

“누나가… 지은이 손을 놓쳤던 날….” 민우가 속삭였다. 그의 눈동자는 깊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유나는 몸을 떨었다. 민우가 그날의 일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는 그날 그곳에 없었다. 아니, 있을 리가 없었다. 이 아이는 도대체 누구지?

공포가 그녀의 심장을 짓눌렀다. 그녀는 칼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민우는 피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누나… 지은이는… 누나를 원망했어요.”

민우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유나의 귓가에는 날카로운 비명처럼 들렸다. 그녀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환각인가? 아니면 이 아이가 정말로…

유나는 비명을 지르며 민우에게 칼을 겨눴다. “닥쳐! 너는 누구야? 지은이를 어떻게 알아!”

민우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미소는 더 이상 순수하지 않았다. 오히려 섬뜩할 정도로 차가웠다.

“누나는… 지은이의 전부였잖아요. 그런데… 왜….”

민우의 목소리가 잿빛 도시의 침묵을 갈랐다. 그 속에서 유나는 자신의 나약함과 죄책감의 메아리를 들었다. 민우는 아이의 형상을 한 그녀의 가장 깊은 상처였다. 지은에 대한 죄책감,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고통이 민우의 입을 빌려 그녀를 옥죄고 있었다.

유나는 칼을 휘둘렀다. 눈앞의 민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유나가 느끼기에는, 그녀는 지금 스스로를 공격하고 있었다.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민우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그는 그저 유나의 눈을 응시할 뿐이었다.

“누나는 살아남았잖아요.” 민우가 속삭였다. “혼자서… 잘 살아남았잖아요.”

유나는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손에서 칼이 떨어졌다. 그녀는 잿빛 먼지가 가득한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꼈다. 민우는 그녀의 눈앞에서, 서서히 잿빛 안개처럼 흐려졌다.

점점 더 희미해지는 민우의 형상을 보며, 유나는 깨달았다. 민우는 지은의 환영이거나, 혹은 그녀의 죄책감이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이 폐허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녀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역할이자, 그녀의 마지막 양심을 갉아먹는 존재였다.

모든 것이 잿빛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유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귓가에는 여전히 민우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누나는 살아남았잖아요. 혼자서… 잘 살아남았잖아요.’

그것은 살아남은 자에게 내리는 축복이자,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저주였다. 유나는 잿빛 도시의 심장부에서, 산산이 부서진 자신의 영혼을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그녀는 살아남았지만, 그녀의 영혼은 이미 균열이 가 있었다. 그리고 그 균열은, 언제고 그녀를 집어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