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빛 도시, 유나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벨라움 도시의 최하층 구역은 습한 흙냄새와 사람들의 한숨으로 가득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음에도 낡은 목조 건물들 사이로 피어나는 희뿌연 연기는 이곳의 하루가 얼마나 일찍 시작되는지 말해주는 듯했다. 사람들은 묵묵히 좁은 골목을 오가며 각자의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언제나 낮게 깔려 있었고, 그 위에 드리워진 잿빛 하늘처럼 희망 또한 침전되어 보였다.
유나는 익숙한 움직임으로 거친 밀가루 반죽을 치댔다. 손바닥 아래에서 뭉쳐지는 끈적한 감촉은 늘 한결같았지만, 오늘따라 유나의 마음은 천근만근이었다. 맞은편 평상에 눕듯 기대어 있는 어린 동생, 미나의 마른기침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쿨럭… 쿨럭…”
미나는 열에 들뜬 얼굴로 얕은 숨을 몰아쉬었다. 창백한 뺨 위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밤새도록 이어진 기침에 잠결에도 가슴이 쓰렸던 유나는 미나의 이마를 짚었다. 뜨거웠다.
“괜찮아, 미나. 언니가 곧 따뜻한 죽 끓여줄게.”
유나의 목소리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불안하게 흔들렸다. 미나는 고개를 힘없이 끄덕일 뿐이었다. 가늘어진 팔을 보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유나는 애써 울음을 삼켰다. 울어봐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엄마는 이미 새벽부터 일터로 나간 뒤였다. 크롬 제국의 성벽을 쌓는 공사 현장에서 온종일 돌을 나르고 흙을 팠다. 뼈를 깎는 고된 노동이었다. 그마저도 제국이 부과하는 터무니없는 세금과 공물 때문에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했다.
그때였다. 쩌렁쩌렁 울리는 쇠붙이 소리가 골목 어귀에서부터 들려왔다.
“철기병이다…!”
누군가의 나지막한 속삭임이 순식간에 골목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유나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설마, 설마 오늘 또.
검은색의 육중한 강철 갑옷으로 무장한 철기병들이 좁은 골목을 가득 메우며 나타났다. 그들의 발소리는 흡사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을 울렸고, 차가운 헬멧 틈새로 보이는 눈빛은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선두에 선 기병대장이 허리에 찬 칼을 뽑아들고 하늘로 치켜들었다.
“제국 법령이다! 오늘부로 벨라움 하층민 구역의 가구별 특별 세금이 1.5배 인상된다! 역병으로 인한 생산량 감소는 제국에 대한 기만에 불과하다! 반항하는 자는 반역으로 간주하여 즉결 처형할 것이다!”
기병대장의 음성은 마치 훈련된 맹수처럼 거칠고 위협적이었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몸을 떨었다. 역병으로 마을이 신음하는데, 생산량이 줄어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제국은 그 책임을 고스란히 백성에게 전가했다. 특별 세금 1.5배 인상이라니. 그건 이들에게 사망 선고나 다름없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어떤 노인이 울부짖듯 외쳤다. 수십 년을 이 땅에서 살아온 이였다. 노인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지만, 철기병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시끄럽다!”
가장 앞에 있던 철기병이 망설임 없이 손에 든 둔기로 노인의 어깨를 후려쳤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노인이 바닥에 쓰러졌다.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지만, 아무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그저 피를 흘리며 쓰러진 노인을 보며 이를 악물 뿐이었다.
유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미나의 고통스러운 기침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저들은 미나가 죽어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방해물이라고 치워버리려 할 것이다.
“모두의 집을 수색하여 세금을 징수한다! 저항하는 자는 현장에서 처형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철기병들이 각 집으로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가 살림살이를 뒤엎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유나는 급히 미나를 끌어안고 낡은 식료품 창고 구석으로 숨었다. 바스락거리는 마른풀 더미 뒤에 몸을 웅크렸다.
잠시 후, 유나의 집 문이 발로 걷어차이며 열렸다. 강철 부츠 소리가 거실 바닥을 울렸다.
“아무것도 없군! 이게 다냐? 식량도, 은화 한 푼도 없어!”
한 철기병이 거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굶주린 맹수처럼 빛났다.
“저기, 병사님… 저희 아이가 열이 심해서… 약이라도 좀 구할 수 있게… 오늘만은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유나의 엄마가 아침에 놔두고 간 작은 약초 주머니를 본 철기병이 비웃듯 물었다.
“약? 네놈들이 가질 수 있는 건 오직 흙바닥에 깔린 먼지뿐이다. 병든 아이? 그래, 제국에 쓸모없는 것들은 병들어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들은 집을 엉망으로 만들고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듯 짜증 섞인 욕설을 내뱉으며 떠났다. 강철 부츠 소리가 멀어지고, 골목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유나는 미나를 꼭 끌어안은 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이 미나의 머리카락을 적셨다.
‘죽는 것이 마땅하다니…!’
그들의 말은 유나의 가슴에 칼날처럼 박혔다. 힘없는 자들은 그저 죽어가는 것이 제국이 바라는 것이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는 미나가 죽을 것이다. 엄마가 뼈 빠지게 일해도, 모두가 고통받아도, 이 제국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유나는 고개를 들었다. 식료품 창고의 좁은 창문 너머로 벨라움 시내 가장 높은 곳에 솟아 있는 황궁이 보였다. 흰 대리석으로 지어진 웅장한 건축물.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햇빛조차 이곳의 잿빛 하늘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빛이었다. 그 빛은 감히 올려다볼 수조차 없는 권위와 오만함을 상징하는 듯했다.
분노가 유나의 심장을 갉아먹었다. 그 순간, 흐릿한 시야 한구석에 무언가 빛나는 것이 잡혔다. 철기병들이 집을 수색하며 뒤엎고 간 선반 아래, 흙먼지가 쌓인 틈새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유나는 조심스럽게 미나를 내려놓고 빛을 향해 기어갔다. 손을 뻗어 먼지를 걷어내자, 그녀의 손가락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손에 쥐어진 것은 한 송이 꽃잎 모양의 장식이었다. 푸른색 금속으로 만들어진 그것은 흙먼지 속에서도 기이할 만큼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손바닥 안에 올리자, 꽃잎 장식은 더욱 선명한 푸른빛을 내며 유나의 맥박과 함께 미약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유나는 홀린 듯 그 꽃잎을 바라보았다. 차갑던 금속이 점차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귓가에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속삭였다.
*‘일어나라… 아이야… 너는… 그들이 가두려 했던… 진정한 희망의 씨앗이다….’*
그것은 바람소리 같기도, 꿈결 같은 환청 같기도 했다. 그러나 유나의 손 안에서 빛나는 푸른 꽃잎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황궁을 올려다보았다. 황궁의 빛은 여전히 차갑고 오만했다. 하지만 유나의 손 안에서는, 그 작고 푸른 빛이 점차,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것이 대체 무엇일까.
유나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빛은, 결코 꺾이지 않을 것이었다.
마치 잿빛 하늘 아래, 금지된 희망이 움트기 시작하듯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