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돌무더기 위로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고통에 절어 한참을 헤매던 의식이 겨우 빛을 찾아 떠올랐을 때, 카인은 자신이 여전히 지옥의 문턱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몸의 뼈마디가 부서진 듯 비명을 질렀고, 찢어진 살점 사이로 스며드는 한기가 오장육부를 얼렸다. 썩어가는 흙냄새와 자신의 피비린내가 뒤섞여 역겨움을 토해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들어 올렸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무너져 내린 고대 신전의 잔해였다. 부서진 기둥들은 괴물의 뼈처럼 앙상하게 솟아 있었고, 이끼와 덩굴이 휘감은 벽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상형문자들이 음산한 기운을 내뿜었다. 어둡고 축축한 땅, 그리고 그 위를 덮은 회색빛 하늘. 마치 세상이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든 색을 잃은 것만 같았다.
*죽지 않았군.*
사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이 기적이었다. 아니, 기적이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까웠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보다는, 왜 아직 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에 대한 절망이 더 컸다.
그때, 찢어진 상처에서 다시금 뜨거운 피가 울컥 솟구쳤다. 마치 상처 자체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맥동하며, 잊고 싶었던 순간을 강제로 떠올리게 했다.
***
그날 밤은 붉었다. 용의 뿔 요새는 불길에 휩싸였고, 성벽 위로는 검과 검이 부딪치는 끔찍한 쇳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카인은 선봉에서 적장의 목을 베고, 피 튀는 전장을 휩쓸었다. 그의 검 ‘여명’은 절망적인 전세 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발했다. 그의 옆에는 언제나처럼 루시안이 있었다. 그의 가장 친한 벗이자, 그의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유일한 동료.
“카인! 후방에 적군 증원이다! 위험해!”
루시안의 다급한 외침에 카인은 고개를 돌렸다. 수십 명의 적병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루시안에게 명령했다.
“내가 막을 테니, 너는 병사들을 이끌고 본진으로 철수해라!”
“하지만 형님! 혼자서는…!”
“명령이다, 루시안! 무사히 살아남아라!”
카인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병사들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미끼가 되려 했다. 루시안은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처럼 충직함과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알겠습니다, 형님! 꼭 살아남으십시오!”
루시안은 병사들을 이끌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카인은 그들의 등 뒤에서 맹렬히 적들과 맞섰다. 검은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고, 그의 몸에도 수많은 상처가 새겨졌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루시안과 병사들이 안전하게 물러날 때까지, 그는 혼자서 지옥을 막아낼 참이었다.
수십 명의 적병이 쓰러지고, 카인마저 지쳐 무릎을 꿇으려던 찰나였다.
*촤악!*
등 뒤에서 섬뜩한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고통이 척추를 꿰뚫었다. 심장이 멈추는 듯한 충격에 카인은 비틀거렸다. 믿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등 뒤에는 루시안이 서 있었다. 그리고 루시안의 손에는… 카인의 심장을 꿰뚫은 검이 쥐여 있었다. 카인에게 선물했던, 그와 똑같이 ‘여명’이라 이름 붙인 루시안의 검이었다.
“루… 시안…?”
카인의 입에서 피 섞인 신음이 터져 나왔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동료들의 시체가 즐비한 전장에서, 가장 믿었던 친구가 자신에게 칼을 겨누고 있었다. 루시안의 얼굴에는 더 이상 충직함도, 안타까움도 없었다. 차갑고 비열한 미소만이 번져 있었다.
“형님이라니, 이제 와서 그런 호칭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루시안의 목소리는 너무나 잔인할 정도로 평온했다.
“멍청한 형님은 언제나 그렇게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죠. 그 덕분에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 감사해야 할까요?”
피와 흙으로 얼룩진 카인의 시야가 흐려졌다. 루시안의 뒤편으로, 아까 후퇴했던 병사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적군과 다를 바 없이 차가웠다. 모두 루시안의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함정이었다.
“왜… 왜 이러는 거야…?”
카인이 겨우 입술을 움직여 물었다.
루시안은 검을 깊숙이 찔러 넣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형님이 가진 모든 것이 탐났습니다. 그 빛나는 명성도, 모두의 신뢰도, 그리고… 그 자리도요.”
검이 뽑히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카인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루시안은 쓰러지는 그를 아무렇지도 않게 발로 찼다. 핏물 고인 바닥으로 내팽개쳐진 카인의 눈에, 루시안이 하늘을 향해 외치는 모습이 들어왔다.
“저를 따르십시오! 제가 형님을 죽이고,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겠습니다!”
병사들의 환호성이 요새를 뒤흔들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카인의 귀에는 지옥의 아우성처럼 들렸다. 루시안은 발밑의 그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영원히 썩어가십시오, 형님. 세상은 이제 저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피투성이인 카인을 들어 올려, 불타는 요새 아래의 깊은 협곡으로 던져 버렸다.
***
차가운 빗방울이 얼굴을 때렸다. 루시안의 비열한 미소,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울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그 기억은 카인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그와의 우정도, 나눈 맹세도, 함께 흘린 피와 땀도.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는 죽어 마땅했다. 아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 모든 것을 잃었다. 명예도, 지위도, 친구도, 심지어 살아야 할 이유마저도.
하지만 그때였다.
어둠이 속삭였다.
*죽어선 안 돼.*
*이대로 사라지는 건 너무 하찮은 결말이야.*
*그 자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잊히는 것을 용납할 텐가?*
환청인가? 아니면 끓어오르는 분노가 만들어낸 망상인가? 카인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했다. 고통에 찌든 정신에 선명하게 박혀들었다.
*원한은 살아남아라. 절망은 힘이 되리라.*
*네가 잃은 것을 되찾고 싶다면… 기꺼이 심장을 내어줄 수 있겠는가?*
*그를 파멸시킬 힘을 원한다면… 어둠과 계약하겠는가?*
카인은 비명을 지르려 했다. 하지만 목에서는 피 섞인 쉰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온몸의 기력을 끌어모아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흘렀지만, 그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눈앞의 모든 것이 흐려지고, 환영이 아른거렸다. 어둡고 거대한 그림자가 자신을 향해 팔을 뻗는 듯했다. 그것은 지옥의 문턱에서 자신을 유혹하는 악마의 손길이었다.
*그래…*
카인의 입술이 겨우 움직였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는 기꺼이 그 손을 잡았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죽어서는 안 될 이유는 분명했다.
*살아남아 복수하겠다.*
*루시안, 네가 나에게서 빼앗아간 모든 것을… 몇 배로 돌려받을 것이다.*
*네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나는 너를 따라갈 것이다.*
복수심이 불타올랐다.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지는 그의 얼굴은 증오로 일그러졌다. 그의 눈동자에, 죽음보다 더 깊은 어둠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고대 신전의 잔해 위로, 절망 속에서 태어난 새로운 파멸의 서곡이 울려 퍼지는 듯했다.
이 지옥에서, 카인은 기꺼이 악마가 되기로 맹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