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툴루 신화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찢겨진 맹세

그날 이후, 세상은 더 이상 선명한 색을 띠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잿빛으로 물들었고, 감각의 끝은 오직 한 점에 고정되었다. 심장이 굳어버린 차가운 덩어리가 되어 온몸으로 증오를 퍼뜨렸다. 폐허가 된 심장 속에서 마지막으로 불타오르는 감정, 그것이 바로 복수였다.

강민준은 낡은 창고의 녹슨 철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먼지가 뒤섞인 비릿한 공기가 코를 찔렀다. 밖은 도시의 불빛에 잠식된 밤이었지만, 이곳은 시간마저 잊은 듯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손에 든 소형 탐조등을 켜자, 희미한 빛이 거대한 기계 설비들의 그림자를 춤추게 했다. 버려진 화학 공장의 일부. 이선우가 최후의 실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건 닷새 전이었다. 믿을 수 없는 소문이었지만, 그의 행적이라면 무엇이든 가능했다.

“선우… 네가 나에게 했던 짓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겠지.”

민준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쇳소리 같기도, 짐승의 울음 같기도 했다. 그의 얼굴은 더 이상 예전의 온화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깊게 파인 눈가에는 만성적인 피로와 함께 광기가 서려 있었고, 한쪽 볼을 가로지르는 흉터는 어둠 속에서도 기괴하게 빛났다. 살갗 아래로 희미하게 드러난 문양들은 그의 몸이 겪었던 고통과 변화를 웅변하고 있었다.

창고 안은 미로처럼 복잡했다. 녹슨 파이프들이 천장을 거미줄처럼 가로지르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화학 용기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민준은 바닥에 흩어진 낡은 서류들을 피해 발소리를 죽이며 나아갔다. 그의 눈은 그 어떤 어둠 속에서도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아니, 그렇게 되어버렸다. 원치 않는 대가를 치르고 얻은 능력.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웅얼거리는 소리. 단순한 환청이 아니었다. 분명,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핏속에 잠재된 촉수가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다시 한번 굳어버린 채 격렬하게 박동했다.

발걸음을 재촉해 소리의 근원지를 향했다. 낡은 복도를 지나자, 드디어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문틈이 보였다. 철문 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빛은 기이하게도 푸른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듯한 불길한 색조를 띠었다. 그리고 그 불빛과 함께, 웅얼거림은 더욱 또렷한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마치 여러 개의 혀가 동시에 다른 언어를 중얼거리는 듯한, 인간의 것이 아닌 소리.

민준은 숨을 멈추고 문틈으로 눈을 가져갔다.

그 안은 거대한 홀이었다. 중앙에는 섬뜩한 형상의 제단이 놓여 있었고, 그 위로는 기묘한 문양들이 새겨진 검은 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제단 주변으로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있었다. 모두 검은 두건을 쓰고 있었고, 손에는 이상한 형상의 단검을 쥐고 있었다. 그들의 중얼거림은 공기를 진동시키며 민준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도 익숙한… 그 불길한 주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한가운데, 제단 바로 앞에 서 있는 그림자.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키는 조금 더 커지고 어깨는 넓어졌지만, 그 오만하리만치 곧은 자세는 결코 변하지 않았다. 이선우. 그는 두건을 쓰지 않은 채, 푸른빛과 보라색이 일렁이는 기이한 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냉혹함과 함께, 형언할 수 없는 광휘가 흘렀다. 마치 신이라도 된 양.

“선우…”

민준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팠다.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가 온몸을 휘감았다. 저 녀석이, 저 자리에서, 제물로 바쳐진 자신을 내려다보며 비웃었던 그날의 기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미안하다, 민준아. 하지만 더 큰 진리를 위해서라면, 작은 희생쯤은 감수해야 해. 이해하지? 언젠가 너도 깨달을 거야. 이 세상이 얼마나 덧없는 허상인지. 그리고 내가 선택한 길이 얼마나 위대한지.”*

웃음. 싸늘하고 잔혹한 웃음소리. 그 웃음과 함께, 민준의 몸은 붉은 피와 함께 거대한 제단 아래로 내던져졌었다. 육체의 고통은 시간과 함께 희미해졌지만, 영혼에 새겨진 배신의 상처는 결코 아물지 않았다.

민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저 오만한 자를 끌어내리는 것뿐이었다.

홀 안에서는 의식이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이선우는 손을 들어올려 검은 돌을 향해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푸른빛과 보라색이 뒤섞인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두건을 쓴 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더욱 격렬하게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공장 전체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진동에 휩싸였다.

검은 돌 위로 섬광이 닿자, 돌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렸다. 돌의 표면에 새겨진 문양들이 붉게 타오르더니, 이내 거대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균열 사이로 형언할 수 없는 어둠이 밀려 나왔다. 그것은 단순히 빛이 없는 어둠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모든 의미를 지워버리는 궁극적인 공허함이었다. 그 안에서 기이한 형상들이 어렴풋이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촉수 같기도, 날개 같기도 한, 인간의 시선으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것들.

“으아아악!”

한 예배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는 자신의 두 눈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몸부림쳤다. 그의 눈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다른 예배자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포에 질린 듯 몸을 떨었지만, 이선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에는 더 깊은 희열이 스쳤다.

“보아라! 너희의 나약한 눈으로는 감히 마주할 수 없는 진리다!” 이선우의 목소리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머지않아 우리는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것이다! 이 별은, 아니 이 우주가 곧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그 순간, 민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의 복수는 단순히 이선우를 죽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를 파멸시키고, 그가 쌓아올린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는 것. 그리고 그 파멸의 순간, 그에게 자신과 똑같은 절망을 맛보게 하는 것.

“이선우!”

민준의 외침은 의식의 장막을 찢어발겼다. 그의 목소리는 고통과 증오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홀 전체에 울려 퍼졌다.

모든 시선이 민준이 서 있는 문틈으로 향했다. 두건을 쓴 예배자들은 혼란스러운 듯 웅성거렸다. 이선우의 눈빛이 싸늘하게 민준에게 꽂혔다. 그러나 놀라움보다는 분노, 그리고 짜증이 더 크게 서려 있었다.

“강민준… 아직도 살아 있었군.”

그의 목소리는 조롱하듯 낮게 깔렸다.

“네가 감히 이곳에 발을 들여놓을 줄이야. 네 몸의 변형으로 여기까지 찾아올 수 있었다는 건가? 꽤나 끈질기군. 하지만 그때 너를 버린 것은 실수가 아니었어. 넌 그저 제물이었을 뿐, 이 위대한 진리를 이해할 그릇이 못 돼.”

“제물?” 민준은 이빨을 갈았다. “네가 감히 날 제물이라고 불러? 네가 나에게서 빼앗아간 모든 것을 돌려받을 것이다, 이선우. 네가 믿는 그 ‘진리’와 함께, 너를 지옥으로 끌고 갈 거다.”

민준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의 기운이 문틈을 감쌌다. 낡은 철문은 순식간에 재로 변하며 사라졌다. 거대한 홀 안으로 민준이 발을 들여놓자, 그의 몸을 휘감은 그림자들이 꿈틀거렸다. 그것은 마치 수천 개의 굶주린 입들이 달려드는 듯한 형상이었다.

이선우의 얼굴에서 조롱이 사라졌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차가운 경계심이었다.

“어리석은 짓을 하는군. 이곳은 네가 함부로 들어올 곳이 아니다.”

“네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내 복수가 미치지 않을 곳은 없어.”

민준은 한 걸음, 한 걸음 제단을 향해 나아갔다. 그의 발걸음마다 바닥의 콘크리트가 갈라지고, 묵직한 힘이 홀 전체를 뒤흔들었다. 두건을 쓴 예배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그들은 감히 민준에게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민준의 존재 자체가 그들이 섬기는 ‘그것’의 그림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선우는 민준의 발아래로 균열이 퍼져나가는 것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한 손을 들어올려 민준을 향해 뻗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강렬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단순히 에너지 파동이 아니었다. 공간 자체를 왜곡시키는 힘을 담고 있었다.

“사라져라, 하찮은 그림자!”

빛의 파동이 민준에게 닿기 직전, 민준은 왼손을 들어올려 막아냈다. 그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어둠이 빛의 파동과 충돌했다.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홀 전체가 흔들렸다. 빛과 어둠이 부딪히는 지점에서 공간이 일그러지고, 바닥의 먼지가 소용돌이쳤다.

민준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눈은 오직 이선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선우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스쳤다.

“이럴 수가… 네가 그 힘을… 어떻게?”

“네가 준 선물이지.” 민준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네가 나를 제물로 바쳤을 때, 내가 죽지 않고 무엇을 얻었을 거라고 생각했나? 너처럼, 나 역시 ‘그것’에게서 받았어. 하지만 나는 너처럼 기만당하지 않아. 네가 얻은 모든 것을, 너의 손으로 빼앗을 것이다.”

민준의 어둠은 단순한 힘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증오가 형상화된 것이었고, ‘그것’의 파편이 그의 육신에 새겨준 저주이자 축복이었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손끝에서 굵은 검은색 촉수들이 솟아나와 제단을 향해 뻗어나갔다. 촉수들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제단 위에 놓인 검은 돌을 휘감았다.

“이선우, 네가 가장 아끼는 것을 먼저 부술 것이다.”

이선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는 재빨리 주문을 외우며 검은 돌을 보호하려 했지만, 민준의 촉수들은 그의 방어를 비웃듯 더욱 강하게 돌을 움켜쥐었다. 검은 돌의 균열이 더욱 커지고,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던 어둠이 더욱 거세게 휘몰아쳤다.

“멈춰라! 어리석은 자! 네가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 아는가!” 이선우가 절규하듯 외쳤다. 그의 얼굴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민준은 냉담하게 웃었다. “물론이지. 네가 그토록 갈망하던 ‘진리’를, 네 눈앞에서 산산조각 낼 거다. 네 존재의 근원을 송두리째 뽑아버릴 것이다.”

콰앙!

굉음과 함께 검은 돌이 산산조각 났다. 조각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어둠의 잔재를 뿌렸다. 그 안에서 꿈틀거리던 형언할 수 없는 존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스러져 갔다.

홀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균열 속에서 뿜어져 나오던 어둠이 사라지자, 제단의 불길한 빛도 꺼졌다. 예배자들은 두려움에 질려 울부짖었고, 일부는 혼절했다.

이선우는 멍하니 조각난 검은 돌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모든 빛을 잃었다. 마치 영혼이라도 뽑혀나간 사람처럼.

“안 돼… 나의… 나의 위대한 진리가…!”

그는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오만함이나 광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절망만이 가득했다. 그의 모든 것이었던 ‘그것’이 눈앞에서 파괴되는 순간, 이선우는 더 이상 신이 아니었다. 그저 나약하고 절망에 빠진 인간일 뿐.

민준은 그런 이선우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심장은 여전히 굳어 있었지만, 희미하게나마 따뜻한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복수의 시작이었다.

“아직 멀었어, 선우. 네가 나에게서 빼앗아간 모든 것을, 이제부터 하나씩 돌려받을 차례다. 그리고 그때 너를 비웃던 그 얼굴로, 너를 지옥으로 보낼 것이다.”

민준은 돌아서서 홀을 나섰다. 그의 등 뒤로 예배자들의 흐느낌과 이선우의 절규가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들려왔다. 그는 그 소리를 뒤로한 채, 잿빛 세상 속으로 다시 발을 내디뎠다. 아직 끝나지 않은, 피의 맹세가 남아 있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