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낯선 균열
도시의 밤은 언제나 그랬듯 고단한 사람들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스물아홉, 이지우. 그녀는 오늘도 팍팍한 하루를 마치고 익숙한 냄새가 배어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어둠에 잠긴 거실이 묵묵히 그녀를 맞았다. 탁, 스위치를 올리자 형광등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번개처럼 번쩍이더니 이내 느릿하게 제 빛을 찾았다.
“후우…”
지우는 익숙하게 가방을 소파에 던져두고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열어 텅 빈 속을 확인하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녁을 대충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운 터라, 냉장고는 물병 몇 개와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한 반찬통 몇 개가 전부였다.
‘언제쯤 여유롭게 요리 같은 걸 해볼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사치는 아직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낡은 원룸 오피스텔에서 벗어나 겨우 얻은 이 아파트에서, 그녀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대출금을 갚아나가기에 바빴다. 삼 년 전, 거품이 잔뜩 낀 듯한 이곳의 전세금을 대출받아 입주했을 때만 해도 벅찬 행복감에 밤잠을 설쳤는데. 이제는 그저 하루를 버티는 쉼터일 뿐이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치고 나와 가운을 걸쳤다. 축축한 머리카락을 대충 수건으로 말리며 거실 소파에 앉았다. 무심코 테이블을 훑던 시선이 멈췄다. 어제 분명 커피를 마시고 빈 컵을 올려두었던 자리에, 웬 유리잔이 놓여 있었다. 물기가 살짝 맺혀 있는 걸 보니 방금 씻어둔 것처럼 깨끗했다.
‘내가 언제 유리잔을 뒀지?’
지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며칠 전 새로 장만한 예쁜 유리잔이었다. 손님이 올 때나 꺼낼 생각으로 찬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기억이 선명했다. 꺼낸 적도, 사용한 적도 없는데.
“아…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그녀는 뇌리를 스치는 의문을 애써 지웠다. 워낙 잠이 부족한 나날들이었으니, 어딘가 어설프게 잠결에 꺼내두었을 수도 있었다. 테이블 위 리모컨을 집어 TV를 켰다. 드라마 속 주인공의 감정적인 대사가 고요했던 공간을 채웠다. 지우는 이내 드라마에 몰입하며 유리잔의 존재를 잊었다.
며칠 뒤.
지우는 출근 준비를 하다 거실에서 휴대폰을 찾았다. 분명 소파 위에 두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가방 속, 코트 주머니, 침대 옆 협탁… 모든 곳을 뒤졌지만 허탕이었다. 늦겠는데! 초조해진 그녀는 마지막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설마 하며 싱크대 위를 보는데, 그녀의 휴대폰이 컵 건조대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뭐야, 이거?”
황당함에 지우는 어이가 없었다. 휴대폰을 싱크대 컵 건조대에 두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녀는 잠에서 깨자마자 주방에 한 발짝도 들이지 않았다. 혹시 어제 밤, 술에 취해 들어와 그랬나? 하지만 어제는 약속도 없이 곧장 퇴근했고, 술도 한 방울 마시지 않았다.
“내가 요즘 너무 피곤한가 보네.”
그녀는 억지로 이 상황을 납득하려 애썼다. 헛웃음을 흘리며 휴대폰을 들고 급히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 날 저녁.
퇴근 후 침대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인 지우는 이상한 소리에 잠이 깼다. ‘툭.’ 뭔가 가볍게 떨어지는 소리였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지우는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보니 밤 11시. 불을 켜지 않은 거실은 달빛조차 들지 않아 칠흑같이 어두웠다.
‘뭐지? 바람 소리인가?’
창문을 닫아두었으니 바람일 리는 없었다. 다시 ‘툭.’ 이번에는 좀 더 명확하게 들렸다. 딱딱한 것이 마룻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순간 등골에 서늘한 한기가 스쳤다. 지우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살짝 열었다. 좁은 틈으로 보이는 거실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거기… 누구 있어요?”
바보 같은 질문인 걸 알면서도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쏴아아아-’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모래가 바닥에 뿌려지는 듯한, 아니, 훨씬 더 섬뜩한 소리였다. 지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겨우 용기를 내어 거실 불을 켰다.
환해진 거실. 하지만 이상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떨어져 있는 물건도, 흐트러진 것도 없었다. 지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어. 이 아파트엔 나 혼자인데…’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불안한 시선은 좀처럼 거실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작은 화분 하나가, 스르륵 미끄러지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화분은 산산조각 났다. 흙과 식물의 파편이 마룻바닥에 흩뿌려졌다.
지우는 비명을 지를 뻔한 입을 틀어막았다. 분명, 누군가 테이블을 밀어 넘어뜨린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테이블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공중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화분을 밀어낸 것처럼.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녀는 뒷걸음질 치다 소파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심장이 귀청이 찢어질 듯 울렸다.
“이… 이게 뭐야…?”
낮은 신음과 함께 두려움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찾아들었다. 당장이라도 누구에게든 전화하고 싶었다. 그런데 손가락이 미처 화면을 누르기도 전, 갑자기 거실의 불이 ‘번쩍!’ 하고 꺼졌다.
어둠. 다시 찾아온 칠흑 같은 어둠이 지우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귓가에 차가운 속삭임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시작이야.”*
몸이 굳어버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지우는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공포에 떨었다. 그녀의 아파트가, 더 이상 그녀의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혹은 무언가에게 잠식당하기 시작한 낯선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우는 이를 악물었다. 두려움에 몸을 웅크린 채, 이 알 수 없는 존재가 다음에는 무엇을 할지 알 수 없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