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짙고, 별조차 제 존재를 숨긴 밤이었다.
메마른 강바닥을 연상시키는 갈라진 땅 위에 납작 엎드린 이한은, 차가운 흙의 기운을 폐부 깊숙이 들이켰다. 흙냄새, 그리고 그의 곁에 바싹 붙어 몸을 웅크린 동료들의 땀 냄새가 섞여 비릿했다. 저 너머, 밤의 장막을 찢고 황량한 들판을 가로지르는 제국의 수송대가 마치 거대한 지네처럼 꾸물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희미한 횃불들이 어둠을 갉아먹듯 흔들리며, 그 안에 실린 것이 무엇인지 짐작게 했다. 곡식. 우리에게는 피 같은 양식. 저들에게는 쓰레기만도 못한 재물.
“가까이 온다.”
이한의 옆에 바짝 엎드려 있던 정아가 속삭였다. 그녀의 손은 활시위를 단단히 쥔 채였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굳은살로 거칠었지만, 그 어떤 궁수보다도 섬세하고 예리한 감각이 깃들어 있었다. 스무 해 남짓 살면서 칼보다 활을 더 많이 잡았을 소녀.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보다 뜨거운 분노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라. 때가 아니다.”
이한은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모래알처럼 거친 숨을 타고 흘러나왔으나, 그 안에는 굳건한 바위 같은 결의가 서려 있었다. 천하를 호령하는 천룡 제국에 맞서는 들불단의 병사들은, 모두 이한의 그 바위 같은 뚝심을 믿고 따랐다.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낡은 농기구를 개조한 무기, 그리고 제국이 짓밟은 삶의 터전에서 피어난 한(恨)뿐이었지만, 그 한이 모여 불길이 되었다.
드디어 수송대의 선두가 매복 지점을 지나치기 시작했다. 묵직한 수레바퀴가 땅을 짓누르는 소리가 온몸의 뼈를 울리는 듯했다. 철컹이는 병장기 소리, 병사들의 거친 숨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의 고통을 모르는 듯한 그들의 태평한 발걸음이 이한의 심장을 죄어왔다.
‘저 안에, 우리가 굶어 죽어가는 동안 궁전에 쌓아둘 양식이 실려 있겠지.’
이한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팔뚝에 돋아난 핏줄이 울퉁불퉁하게 솟아올랐다.
수레의 절반 이상이 매복 지점에 들어섰을 때였다.
“지금이다!”
이한의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그의 손에 들린 낡은 괭이가 흙을 박차고 솟아올랐다.
동시에 주변의 갈라진 흙바닥에서 수십 명의 그림자들이 솟아났다.
“들불이 타오른다!”
“백성의 피로 세운 제국을 무너뜨려라!”
낡은 괭이와 낫, 돌멩이들이 맹렬한 기세로 수송대를 향해 날아들었다.
“습격이다! 방어해라!”
제국 병사들의 당황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횃불 아래, 철갑으로 무장한 병사들의 얼굴에 혼란과 공포가 스쳤다. 하지만 그들은 곧 대열을 정비하며 칼을 뽑아 들었다. 제국 최강의 군대라는 자부심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이한은 선두에서 돌격했다. 그의 몸은 마치 산짐승처럼 민첩했고, 괭이 자루를 휘두르는 팔에는 강철 같은 힘이 실려 있었다. 그는 앞을 막아서는 병사의 가슴팍을 괭이 끝으로 후려쳤다. 묵직한 둔기가 철갑을 찌그러뜨리며 병사의 몸을 뒤로 날려버렸다.
“흐아아아!”
그는 다시 포효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오직 양식을 지키는 적들뿐이었다.
옆에서 정아의 활시위가 쉬지 않고 울렸다. 쉭, 쉭! 어둠 속을 가르는 화살들은 정확하게 제국 병사들의 목이나 무릎 관절을 노렸다. 비록 살상력은 부족할지언정, 대열을 흐트러뜨리는 데는 충분했다.
“저 계집을 잡아라!”
한 병사가 정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정아는 민첩하게 몸을 틀어 화살을 피하고, 활시위로 병사의 얼굴을 후려쳤다. 잠시 비틀거리는 병사의 목에 이한이 휘두른 괭이 자루가 정확히 박혔다.
“고맙다, 대장!”
정아가 외쳤다. 그들의 등 뒤에서는 늙은 장인 어른이 이끄는 무리가 땅에 파놓은 함정으로 적들을 유인하고 있었다.
“크아악!”
함정에 빠진 병사들의 비명이 밤하늘을 갈랐다. 뾰족한 나무 말뚝들이 그들의 몸을 꿰뚫었다. 비록 잔인해 보일지언정,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저들이 우리의 가족을 굶겨 죽였으니, 우리도 저들의 목숨을 거둬야 했다.
하지만 제국은 거대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제국은 비단 물리적인 힘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었다.
“감히 미천한 벌레들이 제국의 명예를 더럽히는가!”
번개 같은 목소리가 밤의 공기를 찢고 내려앉았다. 동시에 수송대의 한가운데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쨍한 소리와 함께 이한의 눈앞에 선명하게 드러난 것은, 푸른빛 영기가 휘감긴 제국 무사의 모습이었다. 그가 칼을 휘두르자, 푸른 영기의 파편이 튀어나와 들불단원 두엇을 멀리 날려버렸다. 그들은 바닥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선천지기(先天之氣)를 익힌 자인가!’
이한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들불단의 대원들은 대부분 평범한 백성들이다. 제국의 무사들은 어릴 적부터 영기를 수련하며 무공을 익혔지만, 그들은 그저 흙 파먹고 사는 농민일 뿐이었다. 가끔 이한처럼 타고난 신체를 가진 자가 있거나, 아니면 한을 품어 일시적으로 힘을 얻는 자도 있었으나, 영기를 다루는 무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흩어져라! 저자를 피해라!”
이한은 외쳤다. 영기 무사는 들불단원들을 마치 파리처럼 휘두르는 칼날로 쓸어버렸다. 그의 움직임은 번개처럼 빨랐고, 그의 칼날은 닿는 모든 것을 두 동강 냈다. 공포가 들불단원들의 마음속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몇몇은 뒷걸음질 치려 했다.
“도망치지 마라! 저들은 우리를 영원히 굶겨 죽일 것이다!”
이한이 포효했다. 그의 눈은 핏발이 섰다. 그는 망설임 없이 영기 무사를 향해 돌진했다.
“대장!”
정아가 경악하며 외쳤다. 그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이한은 자신의 목숨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 저 지독한 강자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려야 했다. 그래야 다른 동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영기 무사는 코웃음을 쳤다. “하찮은 벌레가 감히 대적하려 하는가? 죽어라!”
그의 칼이 이한의 머리를 향해 맹렬하게 내리찍혔다. 푸른 영기가 칼날을 감싸며 살기를 내뿜었다.
이한은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칼날이 그의 어깨를 스치며 살점을 찢어발겼다. 뜨거운 피가 솟구쳤지만, 그는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는 괭이 자루를 휘둘러 무사의 빈틈을 노렸다. 퍽! 괭이 자루가 무사의 옆구리에 꽂혔지만, 무사의 몸을 감싼 영기 보호막에 부딪혀 튕겨져 나갔다. 효과는 미미했다.
그러나 이한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발버둥 치는 벌레처럼 무사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무사가 한쪽 다리를 들자, 이한은 필사적으로 버텼다.
“이런 미물! 놓지 못할까!”
무사가 짜증스러운 듯 이한을 걷어찼다. 이한은 그대로 튕겨져 나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온몸의 뼈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시야가 흐려지고 귀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가 벌어낸 짧은 순간은 헛되지 않았다.
“쏴라! 대장을 도와라!”
정아의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수십 발의 화살이 영기 무사에게 쏟아졌다. 비록 영기 보호막을 뚫지 못할지언정, 그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데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 순간, 늙은 장인 어른이 이끄는 무리가 미리 준비해둔 독 연막탄을 던졌다. 펑! 펑! 어둠 속에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콜록거리는 소리와 함께 병사들이 혼란에 빠졌다.
“이것은… 독 연기다! 물러서라!”
영기 무사조차 갑작스러운 연막에 잠시 주춤했다. 그의 눈에 이한과 들불단원들이 점차 흐릿해졌다.
“대장! 어서!”
정아가 이한을 부축해 일으켰다. 이한은 피투성이 어깨를 부여잡고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곡식! 곡식 수레를 빼앗아라!”
혼란스러운 틈을 타, 들불단원들은 거대한 수레바퀴를 밀며 필사적으로 양곡 수레를 숲 쪽으로 끌고 갔다. 병사들이 연막 속에서 길을 헤매는 동안, 들불단원들은 땀과 피로 얼룩진 얼굴로, 마치 생명줄을 잡듯 수레를 끌었다. 이한은 비틀거리는 몸으로 그들을 독려했다.
그들이 마침내 숲의 가장자리에 다다랐을 때, 뒤에서는 제국 무사의 분노에 찬 포효가 들려왔다.
“감히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너희 모두를 추적하여 씨를 말려버릴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연기 속에서도 섬뜩하게 들려왔다.
숲속으로 들어선 들불단원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손에는 피 묻은 무기 대신 묵직한 곡식 자루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승리의 기쁨보다 깊은 피로와 상실감이 더 크게 드리워져 있었다. 또 몇몇 동료들이 돌아오지 못했다.
이한은 쓰러지듯 숲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아가 그의 상처를 찢어진 옷으로 대충 싸맸다.
“대장… 괜찮으십니까?”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숲 너머, 다시금 어둠에 잠긴 들판을 향해 있었다.
승리였는가? 아니, 겨우 살아남았을 뿐이었다.
이 밤, 그들은 단 한 줌의 곡식을 얻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또 몇 명의 목숨을 잃었다.
제국은 여전히 건재하고, 그들의 탐욕은 끝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이한의 눈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니… 괜찮지 않다.”
그는 낮게 읊조렸다.
“우리는 아직 한참 모자라다. 저들의 목줄을 끊어낼 만큼 강해지지 못했다.”
정아는 아무 말 없이 이한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반드시 그리될 겁니다. 대장. 언젠가는.”
숲 사이로 희미하게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은 피로 얼룩진 들불단원들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그들의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등 뒤에는, 빼앗아 온 곡식 자루들이 묵묵히 쌓여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양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희망이자, 그들이 이 밤을 버텨낸 이유였다.
들불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천룡 제국의 황궁이 불타는 그날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