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 녹슨 새벽**
차가운 젤 같은 감각이 전신을 감쌌다. 익숙한 불쾌감이었다. 이내 콧속으로 쇠 비린내와 먼지 냄새가 훅 끼쳐왔다. 눈을 뜨자마자 탁한 회색빛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 또 시작이군. 이현은 뻑뻑한 눈을 몇 번 깜빡이며 뿌옇게 흐려진 시야를 바로잡았다.
로그인 시스템은 늘 완벽하게 감각을 재현했다. 피부에 닿는 칼날 같은 바람, 발밑의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들이 만들어내는 자갈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정체 모를 짐승의 울음소리까지. 이 모든 것이 실감 나게 구현된 가상현실 속에서 이현은 오늘도 ‘생존’이라는 이름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한때 번화했을 거대한 도시의 외곽이었다. 이제는 뼈대만 남은 고층 빌딩들이 하늘을 긁을 듯 솟아 있고, 그 사이를 썩은 이빨처럼 메우고 있는 것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잔해들과 쓰레기 더미뿐이었다. 아스팔트는 녹아내리다 굳어버린 검은 피딱지 같았고, 가끔 그 위로 붉은 녹이 슨 금속 조각들이 박혀 있었다.
손목을 들어 올리자 투명한 홀로그램 창이 팝업 되었다.
[이현 (Lv. 7)]
[직업: 스캐빈저 (초급)]
[체력: 85/100]
[허기: 60/100]
[갈증: 45/100]
[피로: 70/100]
그리 나쁘지 않은 상태였다. 전날 간신히 찾아낸 통조림 한 개와 오염되지 않은 물 한 병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도시의 폐허는 자비가 없었다. 하루라도 방심하면 그대로 굶어 죽거나, 목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 허덕여야 했다. 혹은… 더 끔찍한 방식으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다.
“젠장, 오늘도 재수가 없으려나.”
이현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건조했고, 폐허의 바람 속에 쉽게 흩어졌다. 어깨에 멘 낡은 배낭을 고쳐 메고, 허리춤에 찬 녹슨 파이프를 꽉 쥐었다. 이 파이프는 그가 가진 유일한 무기이자, 숱한 위기에서 그의 목숨을 구해준 친구였다.
그는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쓸 만한 것’을 찾기 위해 발길 닿는 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부서진 상점가, 무너진 아파트 단지, 공허하게 입을 벌린 지하 주차장 입구까지. 이 폐허의 모든 공간은 잠재적인 보물 창고이자 동시에 죽음의 덫이었다.
멀리서 기계음이 들려왔다. 삐걱거리는 금속 마찰음. 이현은 본능적으로 몸을 숙여 잔해 뒤에 숨었다. 그의 시야에 희미한 잔상이 떠올랐다. ‘위험 지역: 감시 로봇 순찰 중’. 젠장, 저놈들은 정말 귀찮았다. 원래는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던 로봇이었겠지만, 이제는 녹슨 톱니바퀴와 광기로 무장한 살인 기계에 불과했다.
녹슨 몸체를 끌며 지나가는 로봇의 움직임을 살피던 이현은 간신히 좁은 골목으로 몸을 피했다. 골목 안은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습하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딛는 동안, 그의 눈은 끊임없이 주변을 훑었다. 버려진 공구, 찢어진 천 조각, 빈 물통… 모든 것이 자원이 될 수 있었다.
그때였다. 찌릿, 하는 작은 전류음이 귓가를 스쳤다.
[탐지: 금속 반응 미약하게 감지됨. (3시 방향, 10미터)]
이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스캐빈저 스킬 ‘탐지’였다. 이 기술은 그가 이 폐허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희망을 잃지 않고 끈질기게 발품을 팔면, 아주 가끔은 쓸 만한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3시 방향, 골목 끝으로 향했다. 부서진 벽돌 더미와 녹슨 철근이 뒤엉킨 곳이었다. 맨손으로 흙과 먼지를 헤치자, 차가운 금속 감각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이현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꺼냈다.
“이건…?”
그것은 반쯤 부식된 데이터 칩이었다. 낡고 훼손되었지만, 여전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현은 자신의 인벤토리 창을 열고 칩을 집어넣었다.
[알 수 없는 데이터 칩 획득.]
[정보를 판독하려면 전용 장비가 필요합니다.]
“젠장, 또 장비 타령이네.”
이현은 실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칩을 주운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판독 장비를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도심 깊숙한 곳, 위험천만한 지역에나 가야 겨우 몇 개 구할 수 있을까 말까 한 물건이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혹시라도 언젠가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
칩을 인벤토리에 넣자마자, 골목 안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끄으윽…’ 짐승이 긁는 듯한 소리였다. 이현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로봇이 아니었다. 로봇보다 더 피하고 싶은 존재. 바로 돌연변이였다.
그는 파이프를 꽉 쥐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돌연변이의 종류는 다양했다. 어떤 놈들은 빠르고, 어떤 놈들은 튼튼했으며, 또 어떤 놈들은 독성 가스를 내뿜기도 했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인간의 고기를 탐했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저벅, 저벅. 불규칙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현은 숨을 죽였다. 어둠 속에서 몸집이 거대한 그림자가 드러났다. 그것은 한때 개였을 생명체였다. 하지만 이제는 피부가 벗겨지고 뼈대가 뒤틀린 채, 끈적한 체액을 흘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은 녹슨 칼날처럼 빛났다.
[폐지 돌연변이 (Lv. 10)]
레벨이 3이나 높았다. 정면 승부는 피해야 했다. 이현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좁은 골목, 뒤쪽은 막다른 길이었다. 남은 선택지는 싸우거나, 죽거나.
“빌어먹을…!”
이현은 이를 악물었다. 파이프를 휘두를 준비를 했다. 돌연변이가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었다. 비릿한 입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현은 몸을 숙여 첫 번째 공격을 피했다. 돌연변이의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콰앙! 돌연변이가 균형을 잃고 벽에 부딪혔다.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이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모든 힘을 실어 파이프를 돌연변이의 옆구리에 내리찍었다. 뼈와 살이 으깨지는 둔탁한 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피해! 폐지 돌연변이가 15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돌연변이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이현은 피하지 않고 연이어 파이프를 휘둘렀다. 퍽, 퍽, 퍽! 세 번의 강타가 뼈대 깊숙이 박혔다. 돌연변이는 쓰러졌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질긴 생명력을 가진 놈이었다.
이현의 팔이 저릿했다. 체력이 빠르게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돌연변이가 다시 일어서려 하자, 이현은 온몸을 던져 녀석의 머리를 파이프로 내려쳤다. 쇠 비린내가 진동했다. 돌연변이의 몸이 경련하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폐지 돌연변이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Lv. 7 -> Lv. 8]
[체력이 32/100으로 감소했습니다.]
[피로가 급증했습니다.]
이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몸이 후들거렸다. 승리했지만, 기쁨보다는 안도감과 지독한 피로감이 밀려왔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그는 주저앉아 무릎에 팔꿈치를 기댔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를 가득 채웠다.
눈앞에 나타난 상태창은 그의 처참한 상태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휴식이 필요했다. 물도 마셔야 했고, 허기를 채워야 했다. 하지만 이 골목은 안전하지 않았다. 돌연변이의 피 냄새가 또 다른 위협을 불러올지도 몰랐다.
그는 힘겹게 일어섰다. 몸을 이끌고 다시 폐허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회색빛 하늘은 더욱 어두워졌고, 싸늘한 밤공기가 폐허를 감쌌다.
“젠장… 밤은 피하고 싶었는데.”
밤이 되면 돌연변이들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시야는 제한되고, 위험은 배가 되었다. 그는 무너진 건물 잔해를 훑으며 임시로라도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찾았다.
한때는 사무실이었을 법한 건물의 3층에서, 간신히 창문이 부서진 공간을 발견했다. 먼지와 거미줄로 가득했지만, 덩굴 식물들이 창문 역할을 해주어 외부의 시선을 어느 정도 가려주었다. 그는 낡은 천 조각들을 모아 바닥에 깔고 주저앉았다. 인벤토리에서 유일하게 남은 건조 육포 한 조각을 꺼내 천천히 씹었다. 퍽퍽하고 맛없는 음식이었지만, 목숨을 이어주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입 안의 침이 마르도록 육포를 씹어 삼키고, 그는 빈 물통을 만지작거렸다. 갈증은 이제 그의 가장 큰 적이었다. 내일 아침까지 이 갈증을 어떻게 견뎌낼지 막막했다.
창문 틈새로 보이는 폐허의 밤은 고요했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섬뜩한 울음소리. 그것은 폐허의 비명 같았다.
이현은 눈을 감았다. 게임이었지만, 현실보다 더 잔혹했다. 이곳에서 죽는다고 해서 현실에서 편안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현실의 삶은 더 팍팍해지고, 그의 가족에게는 더 큰 짐이 될 뿐이었다. 그는 반드시 살아남아야 했다. 이곳에서 무엇이든 얻어서, 현실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막막했다. 내일은 또 어떤 고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는 낡은 파이프를 가슴에 품고, 침묵의 밤 속으로 깊이 가라앉았다. 그의 유일한 꿈은, 그저 내일 아침의 해를 다시 보는 것이었다. 녹슨 폐허 위로, 차가운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