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비가 내렸다. 잿빛 빌딩 사이로 잿빛 안개가 자욱했고, 그 안개 속을 뚫고 잿빛 그림자 하나가 움직였다. 진우였다. 낡은 방수 재킷은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고, 삭은 철골 구조물 위를 걷는 그의 강화 부츠에서는 ‘철컥, 철컥’ 마른 소리가 났다. 산성비가 사이버네틱 안구에 설치된 필터막 위로 ‘타닥타닥’ 튀었다. 지독한 금속 산화물의 냄새와,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썩은 냄새가 뒤섞여 폐를 찔렀다.
“젠장, 이런 날씨에도 기어나와야 한다니.”
진우는 낮게 중얼거렸다. 보철 처리된 목소리는 기계적인 파열음이 살짝 섞여 있었다. 그는 도시의 가장 낮은 심장부, 버려진 구역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다고 악명 높은 ‘구역 7’에 있었다. 이곳은 한때 번성했던 첨단 바이오 기업의 연구소였지만, 대붕괴 이후에는 오직 잔해와 죽음만이 지배하는 폐허가 되었다. 하지만 죽음의 그림자 아래에는 늘 생존의 파편이 숨겨져 있는 법. 진우의 목적은 분명했다. 한정된 전력만으로도 몇 주는 버틸 수 있는 고성능 에너지 셀. 낡아빠진 그의 강화 팔을 가동시키기 위한 필수품이었다.
미로 같은 잔해 속에서 진우는 능숙하게 길을 찾았다. 그의 시신경 보철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열 감지를 통해 생체 신호를 포착했다. 물론, 이곳에는 살아있는 것만큼이나 죽어버린 기계들도 많았다. 잠복해 있는 감시 드론이나, 망가진 채로 폭주하는 자동 경비 로봇들이 더 위협적일 때도 있었다.
오랜 탐색 끝에, 진우의 시신경 보철에 푸른 빛이 깜빡였다. 목적지가 가까워졌다는 신호였다. 무너진 연구소의 지하층으로 통하는 비상 통로. 녹슨 철문은 가까스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끼이이익-‘ 끔찍한 소리를 내며 문을 열자, 시커먼 어둠이 그를 삼켰다. 진우는 소형 랜턴을 켜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지독한 습기와 곰팡이 냄새로 가득했다. 천장에서는 끊임없이 물방울이 떨어졌고, 바닥에는 끈적이는 슬러지가 고여 있었다. 진우는 강화 부츠로 물웅덩이를 가로지르며, 신경망에 연결된 데이터패드로 내부 지도를 열었다. 지도는 대붕괴 이전의 것이었지만, 예상했던 곳에 에너지 셀 보관함이 표시되어 있었다.
복도를 따라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정적.’ 그것은 늘 가장 위험한 신호였다.
그때였다. 시신경 보철이 갑작스럽게 붉은색 경고등을 깜빡였다. **’생체 신호 감지. 복수 대상.’**
진우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랜턴을 끄고 벽에 바짝 붙었다. 심장이 ‘쿵, 쿵’ 하고 귓가에 울렸다. ‘광견병 무리’인가? 아니면 ‘철의 심장’인가? 이 구역의 쥐새끼들, 그들은 늘 먹잇감을 노리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집중했다. 아주 희미하게, 저 안쪽에서 낮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그 노인네가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고. 여기에 뭐가 있긴 할 텐데.”
“닥쳐.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잘 찾아봐. 대장님 귀에 들어가면 네놈은 죽는다.”
진우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광견병 무리’의 악명 높은 잔당들이었다. 그들은 잔혹하기로 유명했고, 특히 먹잇감을 발견하면 끝까지 쫓는 습성이 있었다. 지금 그들과 싸우는 건 미친 짓이었다. 진우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은신’이 최우선이었다.
그는 어둠 속을 헤치며,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과는 반대로 움직였다. 복도 끝에 다다르자, 낡은 서버룸이 나타났다. 진우의 데이터패드가 ‘삑-‘ 하고 울렸다. 에너지 셀의 열 감지 신호가 이곳에서 가장 강하게 잡혔다. 그는 재빨리 서버룸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룸 안은 폐기된 서버 랙들로 가득했다. ‘윙-‘ 하는 희미한 전력 소모음만이 들릴 뿐, 인적은 없었다. 진우는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강화 팔을 뻗어 한 랙의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찰칵!’ 잠금장치가 풀리고 랙 안쪽에 숨겨진 작은 캐비닛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에는 진우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에너지 셀이 영롱한 푸른빛을 내며 놓여 있었다.
‘성공이다!’
진우가 셀을 집어 드는 순간이었다. ‘콰앙!’ 섬뜩한 소리와 함께 서버룸의 문이 박살 났다. 먼지와 잔해가 날아오르고, 그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하하! 이봐, 작은 쥐새끼. 감히 우리의 구역에 기어들어 와서 도둑질을 하려 하다니.”
광견병 무리의 두목, ‘렉스’였다. 거대한 체구에, 한쪽 팔에는 투박한 금속 갈퀴가 달린 강화 의수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두 명의 부하가 샷건을 겨누고 서 있었다.
진우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재빨리 몸을 돌렸다. 손에 든 에너지 셀을 재킷 안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당신들 것이 아니잖아.”
“아니지, 곧 우리 것이 될 거다. 그리고 네놈의 팔도.” 렉스가 음산하게 웃으며 강화 의수를 움직였다. ‘끼이이이익-‘ 섬뜩한 마찰음이 귓가를 긁었다.
“이봐, 쥐새끼. 곱게 내놔라. 그럼 고통 없이 죽여주지.”
진우는 피식, 썩소를 지었다.
“고통 없이 죽는 법은… 네놈들이나 알아봐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우의 강화 팔에서 ‘지이잉-‘ 하는 소리가 울렸다. 내장된 작은 칼날이 손목에서 튀어나왔다. 동시에 그의 시신경 보철이 적들의 움직임을 예측하기 시작했다. 화면이 순간적으로 느려지고, 각자의 공격 예상 경로가 붉은 선으로 표시되었다.
렉스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강화 의수 ‘강철 발톱’이 바닥을 긁으며 스파크를 튀겼다. 부하들이 샷건을 발사했다. ‘콰광! 콰광!’
진우는 몸을 낮춰 옆으로 구르며 총알을 피했다. ‘탁!’ 강화 부츠가 바닥을 박차고 튀어 오르며 렉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렉스가 강철 발톱을 휘둘렀지만, 진우는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그의 의수 팔뚝을 칼날로 긁었다. ‘치이익!’ 렉스의 의수에서 짧은 스파크가 튀었다.
“이런 건방진 놈!” 렉스가 격노하며 다시 발톱을 휘둘렀다.
진우는 그 틈을 노려 옆에 있던 폐기된 서버 랙을 발로 걷어찼다. ‘쿵!’ 육중한 랙이 렉스의 부하들이 서 있던 쪽으로 쓰러졌다.
“커억!” “크아악!”
부하들이 잔해에 깔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렉스가 잠시 주춤한 사이, 진우는 재빨리 몸을 돌려 서버룸 출구 쪽으로 내달렸다.
“어디 감히 도망을 쳐!” 렉스가 포효하며 진우의 뒤를 쫓았다.
진우는 무너진 복도를 질주했다. 그의 시야는 온통 경고음으로 가득했다. 부상당한 몸으로 렉스를 상대하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오직 ‘생존’만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철컥, 철컥!’ 강화 부츠가 폐허 위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콰앙!’ 렉스가 뒤에서 던진 파편이 벽을 강타하며 진우의 어깨를 스쳤다. ‘욱!’ 진우는 짧은 신음과 함께 비틀거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때, 진우의 시신경 보철이 저 멀리 ‘탈출구’를 표시했다. 지하수로로 통하는 비상구였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복도 끝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문고리를 잡고 ‘끼이이이익-‘ 힘껏 당겼다. 녹슨 철문이 겨우 열리고, 진우는 망설임 없이 아래로 몸을 던졌다. 둔탁한 충격이 온몸을 훑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차가운 하수구 물이 허리까지 차올랐다.
“젠장! 이 쥐새끼가!” 렉스의 분노에 찬 고함이 위에서 들려왔다.
진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철문이 ‘쿵!’ 하고 닫히는 소리가 멀리서 울렸다.
진우는 수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 내려갔다. 지독한 악취가 폐를 찢는 듯했지만, 살았다는 안도감이 그 모든 고통을 덮었다. 어두컴컴한 수로 한쪽 벽에 몸을 기댄 채, 그는 겨우 숨을 골랐다. 강화 팔은 작은 파열음과 함께 작동을 멈췄다. 어깨에서는 묵직한 통증이 밀려왔다. 렉스의 파편에 맞은 곳이 따끔거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재킷 안쪽의 에너지 셀을 꺼냈다. 푸른 빛이 어둠 속에서 오아시스처럼 빛났다.
“하아… 적어도 헛수고는 아니었군.”
진우는 피식 웃었다. 그의 손은 피로 얼룩져 있었지만,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이것이 진우의 삶이었다. 매일같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오직 ‘생존’이라는 단어 하나만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
그는 손에 든 에너지 셀을 한 번 응시한 뒤, 고개를 들어 암흑 같은 수로의 끝을 바라보았다.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내일도, 그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칠 것이고, 또 다른 그림자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 것이다.
“다음은 어디지…”
진우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그에게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