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밤의 방문객

고요는 금이 간 거울 조각처럼 산산조각 났다. 강민준은 늦은 밤, 적막한 아파트 거실 소파에 몸을 푹 파묻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길고 지루했던 회의와 상사의 잔소리가 온몸의 기운을 빨아갔다. 시계는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 창밖은 검은 장막이 드리워진 듯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간간이 멀리서 들려오는 차량 소리만이 이 도시가 아직 깨어있음을 알렸다.

“젠장, 피곤해 죽겠네.”

나른하게 중얼거리며 손에 들린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의미 없는 다큐멘터리 채널에서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가 하품하는 모습이 흘러나왔다. 그는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의 현재 심경을 대변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쨍그랑!

주방 쪽에서 날카로운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번쩍 눈을 떴다. 피로에 절어있던 몸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 아무도 없는 집에서, 이런 소리가 날 리가 없었다.

“누, 누구 있어?”

목소리가 바짝 말랐다. 그는 조심스럽게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거세게 쿵쾅거렸다. 분명 현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도둑인가? 아니, 도둑이라면 저렇게 요란하게 소리를 낼 리가 없지 않나.

다리에서는 알 수 없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한 발짝, 한 발짝. 주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납덩이를 매단 듯 무거웠다. 거실을 지나 복도를 꺾자, 주방이 눈에 들어왔다.

싱크대 위에 놓여있던 유리컵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 있었다. 물방울이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컵받침은 그 자리에 멀쩡히 놓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 컵만 톡 밀어서 떨어트린 것 같았다.

“젠장… 뭐야 이건.”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어이가 없었다. 술이라도 마신 건가? 아니, 저녁부터 쭉 집에만 있었다. 피곤해서 헛것을 보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유리 조각들을 조심스럽게 치웠다. 아무래도 몸이 너무 지쳐서 환각이라도 본 모양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그 불안한 예감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새벽 2시. 겨우 잠이 들기 위해 침대에 누웠을 때였다. 거실에서 쿵,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군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거실을 걷는 듯한 소리였다. 처음에는 위층 소리인가 싶었지만, 소리는 분명 민준의 아파트 내부에서 울리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서.

“누구냐고!”

민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방문을 박차고 나와 거실로 향했다. 거실의 스탠드 불빛은 희미하게 주변을 비추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쿵, 쿵 하는 발소리도 멈춰 있었다.

그는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공기가 전과는 다르게 차갑게 느껴졌다. 여름의 한밤중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한겨울 새벽녘처럼 서늘한 한기가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소름이 돋았다. 이건 단순한 피로가 아니었다. 이건 뭔가, 진짜였다.

다시 침실로 돌아와 문을 잠그려는데, 문득 욕실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분명히 닫고 나왔는데. 그는 심장이 발밑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끼며 욕실 문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때, 욕실 안에서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수도꼭지가 저절로 잠기는 소리처럼.

“안 돼… 이건 아니야.”

민준은 황급히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는 벽에 기대선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건 영화에서나 보던… 폴터가이스트 현상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기괴한 무엇일지도 몰랐다.

그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잠들면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은 막연한 공포에 시달렸다. 동이 트고, 창문으로 희미하게 아침 햇살이 스며들기 시작하자, 불안했던 공기는 거짓말처럼 다시 평범해진 것 같았다.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겨우 회사로 출근했다.

그날 저녁, 퇴근하고 돌아온 민준은 아파트 현관문을 열다 또다시 이상한 감각에 휩싸였다. 분명 아침에 잠그고 나갔던 현관문이 굳게 닫혀는 있었으나, 잠금장치가 열려 있었다.

“내가 정신이 나갔나…?”

민준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루 종일 이상한 일들만 겪으니 미쳐버릴 것 같았다. 현관문을 다시 굳게 잠그고 들어섰다. 거실은 어제와 다름없이 고요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고요는 언제든 깨질 수 있는 허상일 뿐이라는 것을.

그는 재빨리 샤워를 하고, 컵라면으로 대충 저녁을 때웠다. 그리고는 침실 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에 앉아 불안하게 휴대폰 화면만 응시했다. 밤이 오는 것이 두려웠다.

창밖이 완전히 어둠에 잠기고, 아파트 전체가 고요해질 무렵이었다.

똑. 똑. 똑.

침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숨을 멈췄다. 너무나 또렷한 소리였다. 문을 잠그고 있었으니, 누가 문을 두드릴 리 없었다. 혹시 이웃집인가? 하지만 노크 소리는 이웃집 문이 아닌, 바로 제 침실 문에서 울리고 있었다.

“누구…세요?”

말문이 막혔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노크 소리는 멈췄다. 하지만 곧, 문고리가 천천히, 아래로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끽, 끽, 끽. 낡은 문고리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문을 잠갔는데? 민준은 벌떡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잠금쇠가 제대로 걸려 있는지 확인하려는 순간, 문틈으로 희미한 틈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짙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기이한 형상이 비쳤다.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으나, 몸은 마치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듯 흐릿했고, 눈은 불타는 듯한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민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는 마치 공기 자체가 찢어지는 듯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너를 찾고 있다.*

소리는 민준의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것 같았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단순한 폴터가이스트가 아니었다. 이건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다른 차원에서 온,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의 세계가, 균열을 통해 침범당하고 있었다.

그 순간, 문이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안으로 벌컥 열렸다. 경첩이 뜯겨 나가고, 잠금쇠가 산산조각 났다. 검은 연기 형상이 침실 안으로 한 발짝 발을 내디뎠다. 어둠 속에서 붉은 눈이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민준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뒤로 넘어졌다. 그의 등 뒤로, 창문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밤하늘을 등지고 서 있는 검은 형상 뒤편으로, 아파트의 불빛들이 마치 먼지처럼 작아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의, 어둠에 잠긴 도시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것은 시작이었다. 평범한 아파트에서 벌어진 기괴한 현상은, 거대한 세계의 재앙을 알리는 서곡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에 사로잡힌 채, 민준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밤은, 이제 막 깊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