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공상과학)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망각의 잔해 (殘骸)

**1화: 흔들리는 일상**

김지훈은 늘 그랬듯 깊은 새벽녘에 깨어났다. 잠이 든 것도, 그렇다고 깨어있는 것도 아닌 모호한 상태. 침실의 디지털 시계는 희미한 붉은색 숫자로 04:04를 가리키고 있었다. 으레 새벽에 잠이 깼을 때처럼, 그는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회색의 콘크리트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25층 고층 아파트, 혼자 사는 삶. 이따금 찾아오는 공허함 외에는 고요하고 안정적이어야 할 공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고요함 대신, 아주 미세한 진동이 침대 아래에서부터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지진인가? 그러나 진동은 이내 사라졌고, 침대 시트의 미세한 주름처럼 어렴풋한 불쾌감만 남겼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눈을 감았다. 아마도 옆집의 이른 아침 운동이거나, 위층에서 뭔가 떨어뜨린 소리일 것이다. 이 거대한 콘크리트 숲에서는 온갖 소음이 미세한 파동이 되어 전해지곤 했으니까.

다시 잠들려 했으나, 뇌의 한구석이 찜찜하게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결국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거실 창밖으로는 아직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고, 멀리 도시의 불빛들이 점점이 박혀 밤하늘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차가운 유리창에 손을 댔다가, 이내 등을 돌렸다.

식탁 위, 어제 저녁에 마셨던 머그잔이 평소와 다른 위치에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분명 식탁의 중앙, 그가 늘 놓던 자리에 두었을 터인데, 지금은 가장자리로 반 뼘 정도 밀려나 있었다.
“내가 건드렸나?”
지훈은 무심코 중얼거리며 머그잔을 다시 제자리에 옮겨놓았다. 피곤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가 기억 못 하는 순간에 무의식적으로 움직였을 수도 있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부엌으로 가 물을 한 잔 마셨다. 차가운 물줄기가 목을 타고 넘어갈 때, 주방 선반 위 진열되어 있던 장식용 작은 도자기 인형이 아주 미세하게, 정말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살짝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젠장,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그는 자신의 눈을 비비며 인형을 다시 보았지만, 인형은 아무런 움직임 없이 고요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

그날 오후, 퇴근 후 집에 돌아온 지훈은 현관문을 열다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문이 평소보다 훨씬 뻑뻑하게 열리는 것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 현관 센서등이 켜지지 않았다.
“뭐야, 고장 났나?”
스위치를 몇 번 눌러보았지만, 캄캄한 현관은 미동도 없었다. 그는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신발을 벗었다. 거실로 들어서자 거실등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드라마가 한창 시작될 무렵, 갑자기 화면이 지직거리더니 순식간에 암전되었다. 지훈은 당황하여 리모컨을 이리저리 눌러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잠시 후, 화면이 다시 들어왔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채널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채널이 바뀌기 직전, 아주 잠깐 화면에 모래 폭풍처럼 뿌연 노이즈가 가득했다.
“뭐지? 설마 방송 사고?”
그는 다시 원래 채널로 돌리려 했지만, 리모컨은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건전지가 다 된 것처럼 먹통이 되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리모컨의 건전지를 빼서 확인해보았다. 분명 어제 갈았던 새 건전지였다. 다시 끼워보니 리모컨은 거짓말처럼 정상 작동했다.

그는 괜히 찝찝한 기분이 들어 보던 드라마를 끄고 일찌감치 침실로 향했다.
침실로 가는 복도에는 서재 겸 작업실이 있었다. 문은 늘 닫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문이 10센티미터쯤 열려 있었다.
“내가 열어뒀나?”
지훈은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서재는 거의 쓸 일이 없어 늘 닫아두는 곳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재 안을 들여다보았다. 책상 위, 어제 정리해두었던 서류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책상을 훑어 쓸어버린 것처럼.
지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설마 도둑인가?”
그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없어진 물건은 없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침입의 흔적도 없었다. 그는 어깨를 감싸 안으며 몸을 떨었다.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졌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서류들을 주워 모으며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

그날 밤, 지훈은 잠을 설쳤다. 희미한 삐걱거림, 긁는 소리, 가끔은 속삭이는 듯한 낮은 소리가 밤새도록 들렸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다음 날 아침, 샤워를 하고 나오니 욕실 거울에 희뿌연 김이 서려 있었다. 평소에는 샤워 후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환풍기를 돌리는데, 오늘은 잊었나 싶었다.
그런데 거울 한가운데, 손가락으로 쓴 것 같은 글씨가 보였다.
*꺼져.*
지훈은 입을 쩍 벌렸다. 그의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어올랐다. 그는 거울에 맺힌 글자를 손으로 문질러 지웠다. 사라진 글자. 하지만 선명하게 각인된 공포감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평소 출근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렀지만, 더 이상 그 공간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

며칠 동안, 이상 현상은 점점 더 빈번해지고 노골적으로 변했다.
주방에서는 컵과 접시가 소리 없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거실에서는 책장의 책들이 스스로 튀어나와 바닥에 흩어졌다. 침실의 옷장은 덜컥덜컥 흔들리며 문이 반쯤 열리기도 했다. 심지어 잠결에 누군가 자신의 발목을 잡고 흔드는 것 같은 섬뜩한 감각에 깨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눈을 뜨면 아무것도 없었다.

지훈은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연락해 이상 현상에 대해 문의했다. 건물의 노후화나 배관 문제, 혹은 전력 시스템 오류일 가능성을 물었지만, 돌아온 답은 “단 한 건의 이상 보고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결국 휴가를 내고 집에 머물며 이 모든 것을 직접 확인하기로 결심했다.

어느 늦은 오후, 지훈은 거실 소파에 앉아 휴대폰 카메라를 켜놓고 집 안을 주시하고 있었다. 손에는 야구 방망이가 쥐어져 있었다. 무언가 나타나면 당장 휘두를 기세였다.
갑자기, 맞은편 벽에 걸려있던 액자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액자 속 풍경화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좌우로 흔들리더니, 이내 벽에서 튕겨져 나와 허공에 멈췄다.
지훈은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앞에서, 액자는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붙잡힌 것처럼 약 2초간 정지해 있었다. 그리고는 마치 누군가 내던지듯, 지훈의 바로 옆 소파 등받이로 날아왔다.
*콰앙!*
유리가 산산조각 났다. 지훈은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목구멍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심장은 고통스럽게 죄어왔다.

카메라에 모든 것이 녹화되었을 것이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액자가 허공에 뜬 순간부터, 모든 것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건…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지훈의 얼굴은 핏기가 가시고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때, 거실 바닥에 흩뿌려진 유리 파편들 사이에서, 가장 커다란 액자 유리 조각이 마치 의지를 가진 생명체처럼 천천히 옆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 가려져 있던 마루 바닥이 드러났다.
누군가 칼로 긁어낸 듯한, 깊은 흔적.
그리고 그 흔적은 명확한 형체를 띠고 있었다.
오래된 낙서처럼 보이는 글자들이었다.

지훈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흐릿하지만 선명하게 새겨진 단어였다.

`돌려줘.`

그의 온몸에서 소름이 돋아났다.
그것은 단순히 불운이나 장난이 아니었다.
이 아파트는, 그의 집은, 무언가에게 잠식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지훈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숨이 가빠왔다.

“대체… 뭘… 뭘 돌려달라는 거야…?”
그의 목소리는 희미한 속삭임에 가까웠다.

그 순간, 거실의 모든 불빛이 일제히 깜빡거리더니, 이내 완전히 꺼졌다.
어둠이 덮친 아파트에서, 지훈은 자신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마치 공기가 흔들리는 듯한 낮은 울림이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의 숨소리처럼, 혹은 무언가 거대한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처럼, 온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지훈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눈앞에는, 그가 늘 ‘집’이라 부르던 공간이, 낯선 존재의 시커먼 입처럼 벌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