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슬립 (시간여행)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01. 낡은 종이와 푸른 눈동자

묵은 먼지 냄새는 나에게 위안이었다. 누군가는 기침을 하거나 눈살을 찌푸리겠지만, 나는 이 퀴퀴하고 건조한 공기 속에서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꼈다. 서울 시내 한복판, 고층 빌딩 숲 사이에 박힌 채 빛바랜 이끼처럼 존재감을 잃어가는 한국 고문헌 연구소. 나의 직장은 그 연구소의 가장 깊숙한 곳, 지하 3층에 위치한 서고였다.

이름하여 ‘망실 자료 보관실’. 그 누구도 찾지 않거나, 혹은 찾아서는 안 될 자료들이 잠들어 있는 곳. 나는 그곳의 유일한 관리자, 채원이다.

시계는 밤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연구소의 모든 직원들이 칼퇴근을 종용하는 요즘 시대에, 밤늦도록 홀로 남아 고서(古書)와 씨름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 돋보기 너머로 글자를 해독하는 나의 눈은 가늘게 찌푸려져 있었다. 오늘은 특별히 발굴된 지 7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백야의 기록’이라는 고서를 분석 중이었다. 한자가 주를 이루지만 중간중간 정체를 알 수 없는 상형문자들이 뒤섞여 있었다. 언뜻 보면 그림 같기도 한데, 그 속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질서는 마치 태고의 비명을 담고 있는 듯했다.

“하아… 또다시 난관이군.”

나는 돋보기를 내려놓고 지끈거리는 미간을 문질렀다. 서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자 알 수 없는 문양들이 더욱 조밀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전까지의 내용이 어떤 고대 왕조의 흥망성쇠를 담고 있었다면, 이 마지막 장은 마치 다른 세계의 지도를 그리는 듯했다. 특히 가장 중앙에 그려진 거대한 나무와 그 아래 무릎 꿇은 듯한 형상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다섯 개의 별 모양 문양이 눈에 띄었다. 그 문양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것은 희미하게 푸른빛을 띠는 가는 선이었다.

손가락으로 그 푸른 선을 덧그려 보았다. 아주 가는 종이였지만, 섬세한 붓질로 그려진 선에서는 기묘하게도 미열이 느껴지는 듯했다. 착각인가 싶어 다시 한 번 손끝으로 스치듯 만졌다. 그때였다.

서고의 모든 불빛이 일순간 깜빡이더니, 완전히 암흑 속으로 가라앉았다.

“젠장, 또 정전인가?”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한 달에 몇 번씩 있는 일이었다. 낡은 건물이라 전기 사정이 좋지 못했다. 익숙하게 핸드폰 플래시를 켜려는데, 손 안에서 쥐고 있던 ‘백야의 기록’이 은은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내가 만지고 있던 푸른 선에서부터였다. 얇게 빛나던 선은 점점 굵어지더니, 서책 전체를 감싸는 강렬한 푸른 광채로 변했다.

“이게… 대체 무슨…”

당황한 나는 책을 놓으려 했지만, 손에 들러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심장은 쿵, 쿵, 쿵, 하고 불규칙하게 뛰어댔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빛은 점차 서고 전체를 채웠고, 나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오직 푸른 빛과, 점점 증폭되는 이명(耳鳴)만이 존재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온몸의 세포가 하나하나 분해되었다가 다시 재조립되는 듯한 끔찍한 고통. 사방에서 무수히 많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속삭임 같기도 하고, 비명 같기도 한 소리들이 귓가를 난도질했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무너지는 듯한 아찔한 감각 속에서 나는 그저 무릎을 꿇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으윽…!”

고통은 마치 번개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리고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더 이상 익숙한 서고에 있지 않았다.

차가운 흙바닥. 코끝을 스치는 것은 비릿한 흙내음과 풀내음이었다. 머리 위로는 빽빽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고, 저 멀리서는 이름 모를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달빛은 없었지만, 나뭇잎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별빛이 기이할 정도로 밝았다. 내 손에는 ‘백야의 기록’이 여전히 들려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푸른빛을 내지 않았다. 그저 낡은 종이일 뿐이었다.

“이게… 뭐야…?”

더듬거리며 일어섰다. 내 몸은 묘하게 가벼웠고, 옷차림은… 찢어지고 더러워져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정전, 그리고 푸른 빛. 그 이후의 일은 전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꿈을 꾸는 걸까? 아니, 피부로 와닿는 차가운 공기와 발 밑의 흙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숲속이었다. 인적 없는 깊은 숲. 낯선 공포가 목을 조여왔다. 나는 핸드폰을 찾아 주머니를 뒤적였다. 다행히 있었다. 그러나 전원은 들어오지 않았다.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이곳에는 전파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문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원시림. 순간, 나뭇가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짙은 어둠 속, 나무들 사이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얼어붙었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섬뜩한 기운에 몸이 경직되었다. 맹수일까? 곰? 늑대?

그림자는 천천히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드러나는 윤곽은 인간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거대했고, 짐승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정교했다. 그리고 마침내, 달빛 대신 쏟아지는 별빛 아래 그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숨을 들이켜고 얼어붙었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과 닮았지만 사람이 아니었다. 키는 족히 2미터는 넘어 보였고, 다부진 몸 위에는 짐승의 털가죽으로 만든 듯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피부는 태닝한 듯 건강한 구릿빛이었고, 턱선은 날카롭게 깎아놓은 조각상 같았다. 머리카락은 길고 검었으며, 아무렇게나 묶여 있었지만 거친 야성미를 풍겼다.

하지만 나를 가장 압도한 것은 그의 눈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그곳만이 빛나고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밤하늘의 은하수를 담은 듯한… 푸른색 눈동자.

그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깊은 눈빛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공포보다 더 강렬한 어떤 감정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는 천천히 나에게로 다가왔다.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마치 그림자가 미끄러지듯. 그의 얼굴에 어떠한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무표정,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경계심이 또렷했다.

“누구냐, 너는.”

낮게 깔리는 목소리. 내가 아는 한국어가 아니었다. 발음 자체가 달랐다. 분명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묻는 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채원이에요. 여긴 어디죠…?”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 푸른 눈동자가 더욱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경계심 가득한 시선으로 내가 들고 있는 ‘백야의 기록’을 한 번 훑어보더니, 다시 내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였다. 숲의 모든 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 새소리, 벌레 소리, 모든 것이 정지했다.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고, 마치 누군가가 숨을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정적이 흘렀다.

그는 천천히, 한 발짝 더 나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이 허리춤에 걸린 거대한 단도를 향해 움직였다.

“인간… 네가 이곳에 발을 들인 것이냐.”

이번에도 알 수 없는 언어였지만, 내 심장은 그 말이 가진 의미를 정확히 꿰뚫었다. ‘인간’이라는 단어. 그리고 ‘이곳에 발을 들인’이라는 경고. 그의 눈빛은 더 이상 단순한 경계가 아니었다. 명백한 적의였다.

“이곳은… 인간의 땅이 아니다.”

그의 목소리는 숲의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 동시에 그의 푸른 눈동자가 형언할 수 없는 빛을 뿜어냈다. 그는 나를 죽일 참이었다. 나는 확신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손에 들린 ‘백야의 기록’에서 다시금 푸른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금지된 땅에 발을 디딘 인간.
종족의 경계를 넘어선 만남.
이것이 내가 마주한 새로운 세계의 첫 페이지였다.
그리고 나는, 그 첫 페이지에서부터 죽음의 위협에 직면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나를 꿰뚫는 칼날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