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어둠이 지배하는 황량한 도시의 그림자 아래, 낡은 지하 배수로 터널은 유일한 안식처였다. 차갑고 습한 공기가 폐부를 찌르는 곳. 녹슨 철근과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 사이로 스며드는 미약한 빛줄기가 전부인 공간. 그곳에서 윤슬은 웅크려 앉아 작은 불씨를 애써 지키고 있었다. 닳아 해진 장갑을 낀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기름이 다 말라버린 양초는 켜지 않은 지 오래였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온기는 이 손안의 불씨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등 뒤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공기의 흐름에 윤슬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익숙한 무게감과 낮은 울림에 긴장을 풀었다.

“왔어? 많이 기다렸어.”

윤슬이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카이드였다. 그의 몸은 인간보다 훨씬 강인하고 거친 비늘로 덮여 있었지만, 윤슬에게는 그 어떤 인간보다도 부드럽고 다정한 존재였다. 그의 눈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듯했고, 마치 밤하늘의 별을 품은 듯 깊었다.

카이드는 말없이 그녀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흙먼지가 잔뜩 묻은 시든 열매 몇 개와 말라비틀어진 풀뿌리였다. 오늘은 수확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늦었지. 오늘은… 수확이 적었어.”

낮고 굵은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윤슬의 심장을 울렸다. 다른 이들에게는 괴물의 목소리로 들릴지 몰라도, 윤슬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선율이었다.

“괜찮아. 너만 무사하면 돼.”

윤슬은 그의 거친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의 비늘은 차가웠지만, 그 아래 느껴지는 온기는 어떤 불꽃보다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카이드는 가져온 열매를 윤슬에게 내밀었다. 윤슬은 열매 하나를 받아 한 입 베어 물었다. 쌉쌀하면서도 달큰한 맛이 희미하게 퍼졌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였다.

“어둠이 짙어지고 있어. 그들의 순찰이… 늘었다.”

카이드의 목소리에는 미약한 불안감이 스며 있었다. ‘그들’이란 인간을 뜻했다. 이 황폐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인간 무리이자, 카이드 같은 이종족을 ‘변형체’라 부르며 무자비하게 사냥하는 존재들. 그리고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카이드와 함께 다니는 윤슬을 발견한다면, 그녀 또한 가차 없이 처단할 터였다.

“알아. 우리도 더 깊이 숨어야겠지.”

윤슬은 애써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심장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카이드는 그런 그녀의 불안을 눈치챘는지, 조심스럽게 윤슬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그녀의 손을 완전히 감쌌고, 뼈마디가 도드라진 거친 감촉이 전해졌다.

“네 손은… 차가워.” 윤슬이 웅얼거렸다.
“내 종족의 체온은 인간보다 낮으니까.” 카이드가 답했다.
“하지만 난 이 온기가 좋아. 내겐 가장 따뜻한 손이야.”

윤슬의 말에 카이드의 눈빛이 흔들렸다. 인간과 이종족. 존재 자체가 죄악시되는 그들의 사랑은, 세상의 모든 규칙과 상식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체온이 주는 위안에 의지하며, 이 좁고 어두운 터널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그들은 너를 괴물이라 부를 테고, 나를 배신자라 낙인찍겠지.*

윤슬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잔혹한 상상을 애써 지웠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시선이 아니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살아있게 하는 존재. 카이드, 오직 그뿐이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 배수로 터널의 입구 쪽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불규칙적이고 둔탁한 소리. 한두 명이 아니었다. 여러 명의 발소리였다. 윤슬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카이드의 몸이 순식간에 경직되었다. 그의 비늘 덮인 등 근육이 단단하게 솟아올랐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숨어!”

그의 목소리는 낮게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소리 같았다. 윤슬은 그의 말에 따라 작은 불씨를 재빨리 흙으로 덮어버렸다. 희미한 불꽃이 꺼지자, 터널은 완전한 암흑에 잠겼다. 카이드는 윤슬을 품에 안고 가장 깊숙하고 어두운 벽의 틈새로 몸을 숨겼다. 그의 팔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고, 단단한 가슴에 그녀의 얼굴이 파묻혔다. 윤슬은 그의 차가운 피부가 닿는 곳마다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지만, 동시에 강력한 보호감을 받았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거친 숨소리와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낮게 웅얼거리는 인간의 목소리들이 터널 안을 채웠다.

“이 근처에서 변형체 흔적을 봤다는 보고가 있었어.”
“확실한가? 이 오래된 하수도는 위험하다.”
“확실해. 그 괴물들은 어디든 숨을 수 있어. 인간의 탈을 썼을지도 모른다.”

윤슬의 몸이 소스라치게 떨렸다. 인간의 탈을 썼을지도 모른다는 말. 그들은 카이드 같은 이종족이 인간으로 위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이 윤슬을 발견하면 어떻게 될까. 카이드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그녀 또한 변형체와 한패로 몰려 죽음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카이드는 윤슬의 떨림을 감지했는지, 그녀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극도의 경계심이 윤슬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둠 속에서, 윤슬은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눈을 질끈 감았다. 쿵, 쿵, 쿵. 심장이 귀를 때리는 듯했다.

발소리는 그들의 은신처 바로 위를 지나갔다. 낡은 철골이 삐걱거리는 소리, 부츠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그들이 들고 있는 손전등의 희미한 불빛이 틈새로 스며들어 한순간 카이드의 비늘 덮인 팔을 비추었다가 사라졌다. 윤슬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대로 심장이 멈춰버릴 것 같았다.

길고 긴 시간이 흐른 뒤,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목소리도 희미해졌다. 마침내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터널은 다시 고요한 어둠에 잠겼다.

카이드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윤슬도 억눌렀던 숨을 터트렸다.

“이번엔… 정말 위험했어.” 윤슬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이곳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 카이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쪽 숲으로 가야 해. 그곳엔… 우리의 흔적이 없어.”

남쪽 숲. 그곳은 도시의 잔해보다도 더 위험하다는 소문이 자자한 곳이었다. 거대하게 변형된 맹수들이 우글거리고, 잃어버린 고대 문명의 저주가 남아있다는 미지의 땅. 윤슬은 한순간 주저했다.

“그곳은… 더 위험할지도 몰라.”

카이드는 어둠 속에서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 안에는 결연함과 함께, 오직 윤슬만을 위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어디든, 너와 함께라면.”

그의 말에 윤슬의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뛰었다. 두려움에 떨던 마음속에 용기가 차올랐다. 그래, 어디든, 그와 함께라면.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그녀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녀가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카이드뿐이었다.

윤슬은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 차갑고 단단한 그의 비늘 덮인 뺨, 솟아오른 턱선, 그리고 빛나는 눈동자. 금지된 접촉, 세상이 결코 용납하지 않을 사랑의 맹세.

카이드의 눈은 슬픔과 강렬한 보호 본능으로 빛났다. 바깥세상이 그들에게 어떤 시련을 던져줄지 알 수 없었다. 인간과 이종족의 사랑은, 그들에게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죄악이었다. 하지만 윤슬의 심장은 카이드를 택했고, 카이드의 냉정한 체온 속에서 가장 뜨거운 사랑을 발견했다.

어둠 속, 둘은 서로의 존재에 의지하며 조용히 일어섰다. 새로운 도피를 위해, 미지의 위험 속으로. 그들의 손은 굳게 맞잡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