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끈적했고, 발밑의 축축한 흙은 불쾌한 비명을 지르듯 질척였다. 이진우는 허리춤에 찬 성물 나이프의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그림자 송곳니 심층. 미궁의 가장 깊고 위험한 구역 중 하나였다. 이곳에 발을 들인 인간 탐험가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살아 돌아온 자는 그보다도 적었다.
“젠장, 냄새 한 번 지독하네.”
코를 찌르는 곰팡이와 썩어가는 고기의 비린내가 진동했다. 퀘스트 마크는 저 더 깊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길드의 최상급 현상금, ‘밤의 여왕’의 심장석. 그게 있어야만 은퇴 후 지긋지긋한 이 던전 바닥을 벗어날 수 있었다. 몇 년을 뼈 빠지게 고생하며 얻은 명성과 피 묻은 돈으론 턱없이 부족했다. 이 한탕으로 모든 걸 끝내고 싶었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칙칙한 회색 암벽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조각된 듯한 거대한 석문이었다. 낡고 해진 문양 위로 푸르스름한 이끼가 두껍게 내려앉아 있었지만, 틈새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빛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빛? 이 던전 심층에서 그런 광원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경계심을 곤두세우며 이진우는 조심스럽게 석문에 다가갔다. 한쪽으로 비스듬히 열린 틈새로 안을 들여다보니, 거대한 원형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뭐야, 이건.”
경악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곳에는 거대한 흑요석 기둥이 솟아 있었고, 기둥의 정면에는 쇠사슬에 묶인 채 매달린 누군가가 있었다. 핏빛으로 물든 머리칼은 마치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고, 새까만 피부는 어둠 속에서도 기묘한 광채를 뿜어냈다. 뾰족하게 솟은 귀와 가느다란 팔다리, 그리고 굳게 닫힌 눈꺼풀 아래로 길게 늘어진 속눈썹은 그 존재가 인간이 아님을 명확히 알려주었다.
다크 엘프. 그것도 보기 드물게 순수한 혈통의 존재 같았다. 어째서 이런 곳에, 이런 식으로 묶여 있는 걸까. 그의 기억 속 다크 엘프는 오만하고 잔혹하며,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는 지하 세계의 지배자나 다름없었다.
갑자기, 거대한 공간을 가득 채우던 침묵이 깨졌다. 바닥에서부터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그 안개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였다.
“크르르… 침입자.”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뼈 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칠흑 같은 털과 핏빛 눈동자를 가진 거대한 그림자 늑대였다. 놈의 송곳니는 낫처럼 휘어져 있었고, 온몸에서는 독액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던전 심층의 수호자, ‘심연의 파수꾼’이었다.
“젠장, 이런 대어를 만날 줄이야.”
이진우는 즉시 전투 태세를 갖췄다. 성물 나이프가 손안에서 섬광처럼 번뜩였다. 파수꾼은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었고, 이진우는 몸을 낮춰 옆으로 비껴냈다. 칼날이 늑대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놈의 가죽은 단단했다.
그때였다. 쇠사슬에 묶여 있던 다크 엘프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의 입술이 희미하게 벌어지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고대어가 속삭이듯 흘러나왔다. 동시에 이진우의 심장 부근에서 섬뜩한 한기가 솟아올랐다.
“…조심해.”
놀랍게도, 그 한기는 곧바로 사라지고 머릿속에 명료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순간 파수꾼의 공격을 놓칠 뻔했다. 검은 늑대가 맹렬히 돌진해왔고, 이진우는 가까스로 몸을 비틀어 놈의 턱에 칼을 꽂아 넣었다.
크아아앙!
고통에 찬 포효와 함께 늑대가 뒤로 물러섰다. 이진우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놈의 목덜미를 깊숙이 찔렀다. 검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고, 늑대는 비틀거리다 이내 거대한 몸을 바닥에 내던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진우는 칼끝에 맺힌 피를 털어냈다.
“젠장, 이제 하다하다 다크 엘프의 목소리까지 듣는군.”
환청이라고 치부하려 했지만, 그 목소리는 너무나 선명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쇠사슬에 묶인 다크 엘프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지만, 이진우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서 미세한 떨림을 감지했다.
자신이 왜 이런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그냥 지나쳐도 될 일이었다. 다크 엘프는 인류의 적이었고, 그들은 인간의 목숨을 벌레처럼 여기는 종족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어떤 기이한 아름다움과, 깊은 고통의 그림자가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야, 너… 괜찮아?”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입에서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그녀의 굳게 닫혔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어둠보다 깊은, 그러나 동시에 별빛처럼 오묘하게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가 이진우를 향했다. 그 눈동자에는 놀라움, 경계심, 그리고 무언가 알 수 없는 깊이가 담겨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그의 눈에 닿는 순간, 이진우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에 빠졌다. 늑대를 상대하며 흘린 땀방울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 던전의 끈적한 공기마저도 순간 정지한 듯했다.
“인간… 어째서….”
그녀의 목소리는 아까와 달리 직접적으로 그의 귀에 울렸다. 메마르고 건조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깊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쇠사슬에 묶인 자신을 한 번, 그리고 이진우를 한 번 훑었다.
“네가 날 구한 건가.”
단도직입적인 물음이었다. 이진우는 잠시 망설였다. 구한 것이 맞지만, ‘구한다’는 표현은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그는 그저 본능적으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뭐, 보다시피.”
이진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넌 여기 왜 묶여 있는 거야? 다크 엘프가 이런 꼴을 당할 줄이야. 지하 세계의 지배자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의 말에 그녀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경멸인지, 혹은 자조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건… 너와 상관없는 일이다, 인간.”
차가운 어조였지만, 이전처럼 날카롭지는 않았다. 이진우는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 속에서 흔들리는 무언가를 보았다.
“상관없는 일이라… 난 마침 밤의 여왕의 심장석을 찾고 있었거든. 이 근처에 있다고 들었는데. 너 혹시 아는 거 없어?”
이진우는 최대한 무심한 척 물었다. 이 질문으로 그녀의 반응을 떠볼 생각이었다. 밤의 여왕은 이 던전 심층의 실질적인 지배자였고, 다크 엘프는 그녀의 하수인이거나 경쟁자일 수 있었다.
다크 엘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치 그의 말이 어떤 금기를 건드린 듯한 반응이었다. 그녀는 이내 시선을 돌려 흑요석 기둥 너머의 어둠을 응시했다.
“밤의 여왕… 너 같은 인간이 넘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글쎄, 그건 해봐야 아는 거지.”
이진우는 피식 웃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다시 바라봤다. 대체 왜 그녀가 이토록 무력하게 묶여 있는 걸까. 그리고 왜 하필 자신에게 이런 이상한 기시감과 동정심이 드는 걸까. 인간과 다크 엘프는 천성적으로 증오해야 할 종족인데.
“나는 에릴이다. 너는?”
다크 엘프, 에릴의 질문에 이진우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먼저 이름을 묻다니.
“이진우.”
짧게 답했다. 에릴은 그의 이름을 되뇌는 듯, 희미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이진우… 인간이여. 너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밤의 여왕은… 모든 침입자를 죽음으로 인도할 테니.”
그녀의 목소리는 경고이자, 동시에 어딘가 쓸쓸한 예언처럼 들렸다. 이진우는 그녀의 말에서 밤의 여왕이 단순히 강력한 괴물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다시 한번 에릴의 쇠사슬에 닿았다. 인간으로서라면 절대 생각하지 않았을 감정이 그의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 여자를… 구해야 하나?
인간과 다크 엘프. 서로에게 칼끝을 겨눌 수밖에 없는 운명. 하지만 지금, 이 어둠 속에서, 그는 쇠사슬에 묶인 이 이종족 여인의 보라색 눈동자에서 헤어날 수 없는 깊은 끌림을 느끼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과 함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