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 오페라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차디찬 우주. 그 심연의 적막 속을 가르며 한 조각의 철선이 미끄러져 나갔다. 빛의 속도와는 거리가 먼, 겨우 관성에 몸을 맡긴 채 표류하는 작은 우주선이었다. ‘망령(Revenant)’. 카엘은 그렇게 불렀다. 그의 낡은 함선이자 그의 전부였다.

조종석의 낡은 계기판은 희미한 초록색 불빛을 깜빡였다. 먼지 낀 강화유리 너머로 억겁의 시간을 품은 별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이곳은 성계 변방의 버려진 구역, 잊힌 자들의 묘지이자, 그가 살아가는 유일한 무대였다. 카엘은 턱을 괸 채 홀로그램 스크린을 응시했다. 수백 개의 데이터 라인이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제피르….”

나직이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는 거친 사포로 긁은 듯 메말라 있었다. 그 이름은 카엘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 박힌, 뽑아낼 수 없는 독이었다. 한때는 누구보다 믿었고, 그의 등을 기꺼이 맡겼던 유일한 친구. ‘성계의 방패’라 불리던 최정예 기동함대, ‘아이기스’의 쌍두마차. 제피르와 카엘은 전설이었다. 그들의 합동 작전은 언제나 승리했고, 그들의 전술은 교본에 실릴 정도였다.

…모든 것이 바뀌기 전까지는.

거대한 검은 홀이 그의 함대를 삼키던 그날, 잔해와 비명 속에서 카엘은 보았다. 조난 신호를 무시하라는 제피르의 싸늘한 명령이 홀로그램으로 선명하게 떴을 때.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지만, 지시를 내리는 제피르의 눈빛은 한없이 차가웠다. 마치 벌레를 보듯, 경멸과 무관심만이 가득했다.
함선이 파괴되고, 그는 차가운 우주로 내던져졌다. 동료들의 절규와 폭발음이 귓가에 울렸다. 자신을 향해 빠르게 멀어지던 제피르의 함선, ‘광휘의 깃발’. 그 거대한 함선은 그의 눈앞에서 사라지면서 그와 그의 동료들을 영원한 어둠 속에 버려두었다.

“크윽…!”

카엘은 고개를 젓고는 관자놀이를 세게 눌렀다. 망각하려 해도, 그날의 기억은 매번 새로운 상처처럼 그의 정신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는 죽지 않았다. 기적처럼 살아남아 우주를 표류했고, 온몸이 산산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홀로 자력으로 수리 포드에 도달했다. 그때부터 그의 모든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

복수.

“드디어… 잡혔군.”

카엘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번졌다. 스크린에 포착된 작은 점 하나. 은하계 최북단 개척지에서 출발해 중앙 성계로 향하는 제피르 휘하의 고위 간부 수송선이었다. ‘밤의 사냥개’라는 별명이 붙은 정보국 수장, 아크투루스. 그는 제피르의 최측근이자, 과거 아이기스 함대에서 제피르 다음가는 권력을 휘두르던 자였다.

[대상, ‘어둠의 전령’함. 예상 항로 이탈률 0.003%. 고정 항로 유지 중.]

낡은 인공지능 ‘그림자’의 무미건조한 음성이 좁은 조종실에 울려 퍼졌다. 그림자는 카엘이 주워 온 고물 부품으로 급조한 AI였다. 최신 보안 시스템을 뚫기 위해 비정규적인 루트로 데이터를 추출하고 분석하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예상 도착 시간?”
[7시간 23분 14초 후, 에리두 성계 인근 워프 게이트 통과 예정.]

아크투루스가 중앙 성계로 향하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주로 변방의 정보망을 관리하는 데 집중했다. 필시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가거나, 아니면 제피르 본인이 특별한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카엘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제피르는 네가 죽은 줄 알겠지. 아무도 내가 살아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거야.”

카엘은 피식 웃었다. 한때 제국의 영웅이었던 자신은 이제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복수심만이 그의 숨통을 쥐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조작반의 낡은 버튼을 눌렀다. 낡은 함선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긴 잠에서 깨어나는 듯했다. 엔진이 공회전하며 미약한 진동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그림자. 목표 함선 경로 최종 확인. 우회 기동 개시.”
[확인. 경고: 해당 지역은 제피르 성계의 통제 범위 내에 있으며, 순찰함의 밀집도가 높습니다.]
“알아.”

카엘은 거울처럼 매끄러운 조종간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손끝에 전해지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은 그의 심장을 더 빠르고 격렬하게 뛰게 만들었다.
그의 함선, 망령은 정규 우주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외부 장갑은 이곳저곳 기워 붙인 흔적이 역력했고, 추진 엔진은 비규격 부품들로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하지만 카엘의 손에서 망령은 어떤 최신예 전투함보다도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맹수로 변모했다.

“저 어둠의 전령을 뚫고, 아크투루스의 머릿속을 털어 줄 거다.”

카엘은 스크린에 번쩍이는 좌표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맹렬한 불꽃으로 타올랐다.
몇 시간 후, 망령은 거대한 소용돌이 은하의 외곽, 짙은 성간 먼지로 뒤덮인 지역에 잠입했다. 이곳은 순찰함들의 감시망이 닿기 어려운 사각지대였다.

[경고. 중력장이 불안정합니다. 항법 장치에 부하가 걸리고 있습니다.]

그림자의 경고에도 카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혼란스러운 환경이야말로 그에게는 최적의 사냥터였다.
저 멀리, 점멸하는 워프 게이트의 빛이 보였다. 그 빛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는 ‘어둠의 전령’함. 수송선이라기보다는 작고 날렵한 전투함에 가까운 외형이었다. 은색으로 번쩍이는 표면은 최신 스텔스 기술과 강화 장갑으로 무장되어 있음을 암시했다.

“저건 분명히 급파된 함선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위장 전술을 쓰지는 않을 테니.”

카엘은 심호흡을 했다. 그의 낡은 함선은 그림자처럼 어둠에 녹아들었다. 엔진 소음은 거의 들리지 않았고, 배출되는 플라즈마 파장은 극도로 억제되었다.
‘어둠의 전령’함이 워프 게이트의 경계선에 다다랐을 때, 카엘은 마지막 점검을 마쳤다.

“그림자, 최종 분석 결과는?”
[성공률 62%. 교전 시 승리 확률 38%. 생존 확률 15% 미만.]

냉혹한 숫자들이 카엘의 도전을 꿰뚫어 보았다. 하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삶은 이미 15%보다 더 낮은 확률의 연속이었다.

“충분해. 돌격.”

카엘의 짧은 명령과 함께 망령의 숨통이 트였다. 낡은 엔진에서 섬광이 뿜어져 나오며 함선은 맹렬한 속도로 전방을 향해 쇄도했다.
어둠을 찢고 튀어나온 망령은 ‘어둠의 전령’함의 후미에 정확히 접근했다.
‘어둠의 전령’함의 센서가 뒤늦게 반응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미확인 비행체 접근! 방어막 가동! 반격 준비!]

함선 내부에 비상 경보가 울리고, 방어막이 번쩍이며 활성화되었다. 하지만 카엘의 망령은 이미 그 방어막에 바싹 달라붙어 있었다.
카엘은 망령의 특수 기능, ‘심층 침투 모듈’을 작동시켰다. 함선의 전면부가 녹아내리는 듯한 징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에너지를 흡수하는 흡착판을 전개했다.

“뚫어라!”

함선이 전령함의 선체에 강력하게 달라붙었다. 충격에 전령함이 휘청거렸다.
[경고! 적 함선, 방어막에 직접 접촉! 침투 시도 중!]

함교에서 아크투루스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울렸다. “대체 무슨 함선이야?! 당장 떨어뜨려!”
전령함의 주포가 포문을 열었지만, 망령은 이미 전령함의 선체와 한 몸이 되어 버린 상태였다. 아군 함선에 대고 포격을 할 수는 없었다.
카엘은 망령의 드릴 암을 작동시켰다. 거대한 드릴이 굉음을 내며 전령함의 강화 장갑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고, 금속이 찢어지는 비명이 우주에 울려 퍼졌다.

[경고! 선체 침투 시작! 12초 후 내부 진입!]

“젠장! 내부에 병력 투입해! 저 미친놈을 막아!” 아크투루스는 격노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당황스러움이 역력했다. 적어도 이런 기습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카엘은 드릴이 뚫어낸 통로를 통해 강화복을 입은 채 전령함 내부로 진입했다. 그의 손에는 낡았지만 강력한 플라스마 라이플이 들려 있었다.
내부는 비좁고 어두웠다. 비상등의 붉은 불빛만이 깜빡였다.

“제피르의 개새끼들… 환영 인사는 잘 받았고.”

카엘은 중얼거리며 복도를 따라 전진했다. 어디선가 달려드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전령함의 경비병들이었다. 그들은 최신형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카엘은 망설이지 않았다. 플라스마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기자, 맹렬한 에너지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쩌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첫 번째 경비병의 방어막이 파괴되고, 그의 몸이 불꽃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두 번째, 세 번째. 카엘의 움직임은 과거 아이기스 함대 최강의 돌격대장이었던 시절과 다름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맹렬하고 잔인했다. 복수는 그에게 새로운 능력을 부여했다.
그는 마치 우주선의 구조를 꿰뚫고 있는 것처럼 정확히 목표 지점을 향해 나아갔다. 아크투루스의 지휘실. 그곳에 분명 원하는 정보가 있을 터였다.

[경고! 목표, 지휘실 복도 진입!]

마침내 지휘실 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두꺼운 강철 문이었다. 하지만 카엘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는 플라스마 라이플을 조준하여 문의 중앙을 정확히 쏘았다. `콰아앙!` 하는 폭발음과 함께 문이 녹아내리며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아크투루스! 네 놈, 감히…!”

문을 부수고 들어선 순간, 아크투루스의 격노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크투루스는 지휘실 안에서 권총을 든 채 카엘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두어 명의 경비병이 더 있었다.

“오랜만이다, 아크투루스.”

카엘은 헬멧을 쓴 채 낮게 말했다.
아크투루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마치 유령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이… 이 목소리는… 설마… 카엘? 네가 어떻게…!”

경악으로 얼어붙은 아크투루스의 눈동자를 보며 카엘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래, 나다. 네 주인님께 안부 전해라. 내가 돌아왔다고.”
카엘은 플라스마 라이플을 들어 아크투루스를 향해 겨냥했다.
아크투루스는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지만, 이미 늦었다.

`쉬이이익- 콰직!`

에너지 볼트가 그의 어깨를 강타했고, 아크투루스는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치명상은 아니었다. 카엘은 그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나머지 경비병들은 공포에 질려 총을 겨누지도 못했다. 카엘은 그들의 머리 위로 위협 사격을 가하며 무릎을 꿇리게 만들었다.

“정보 단말기를 열어. 네 주인이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세상이 전부 알게 될 거다.”

카엘은 쓰러진 아크투루스의 옆에 다가가 그의 정보 단말기를 강제로 열었다. 피 묻은 손으로 접속 비밀번호를 해제하고, 내부 데이터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는 제피르가 저지른 모든 죄악의 증거를 찾아내야 했다. 그가 어떤 음모를 꾸몄고, 왜 자신을 버렸는지. 모든 것을 밝혀내야만 했다.

[시스템 메시지: ‘일급 기밀 데이터’ 파일 발견.]

그림자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울렸다. 카엘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이거였군.’
그는 파일을 열었다. 수많은 암호화된 문서들과 영상 기록들이 쏟아져 나왔다. 제피르가 중앙 성계의 최고 권력자와 결탁하여, 카엘과 그의 함대를 제거하고 아이기스 함대의 모든 지휘권을 장악하려 했던 음모의 증거들. 그리고 더 나아가, 거대한 성계를 장악하려는 은밀한 계획들까지.

카엘은 이빨을 악물었다. 그의 눈은 복수심으로 이글거렸다.
“제피르… 네가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듯이, 나도 너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갈 거다.”

그는 정보 단말기에서 데이터를 추출하기 시작했다. 이 정보는 제피르를 파멸로 이끌 강력한 무기가 될 터였다.
어둠 속에서 다시 한번, 망령이 날개를 펼쳤다. 이번에는 훨씬 더 강력한 추진력과 함께.
그의 복수는 이제, 시작되었다.
별들이 흩뿌려진 암흑 속에서 카엘은 홀로 서 있었다. 그의 그림자는 더욱 깊고 길게 드리워졌다. 긴 여정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결코 멈추지 않을 맹렬한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