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 핏빛 그림자**
잿빛 도시의 실루엣이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건물들은 뼈대만 남은 채 하늘을 찌르고, 그 사이를 흐느적거리는 그림자들이 채우고 있었다. 축축한 바람이 썩은 흙먼지와 비릿한 피 냄새를 실어 날랐다. 강민준은 허물어진 고가도로 아래, 서연과 함께 몸을 웅크렸다. 차가운 쇠붙이의 감촉이 거친 손바닥에 닿았다. 녹슨 낡은 권총의 무게감이 익숙했다.
“서쪽 구역, 경비 드론 3대. 움직임은 불규칙적입니다.” 서연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의 눈은 망원경을 통해 어둠 속을 꿰뚫고 있었다. 밤하늘의 희미한 달빛 아래, 멀리 보이는 불빛이 희망인 동시에 절망의 심연이었다. 저곳이 박선우의 ‘새벽 요새’였다.
2년. 지옥 같은 2년이었다.
그날의 기억은 민준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불타는 상점가, 무너지는 건물들, 그리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좀비 떼. 그 혼돈 속에서, 그는 가장 믿었던 친구의 손에 등을 떠밀려 나락으로 떨어졌다.
“미안하다, 민준아…! 나도 살아야 해…!”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박선우의 비명 같은 외침. 그 외침과 동시에 등 뒤에서 느껴졌던 강한 충격. 그리고 그의 손을 놓아버린 선우의 눈에 비치던 잔인한 생존 본능. 민준은 살점 뜯기는 고통 속에서, 절규하며 좀비 떼에 파묻혔다. 그 속에서 그는 죽음보다 더한 지옥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는 살았다.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기적처럼 살아남아 기어 나왔다. 박선우. 그 이름을 되뇌일 때마다, 그의 심장은 차가운 얼음처럼 굳어졌다. 피가 끓는 대신, 분노가 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알아.” 민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감정을 억눌러온 사람의 목소리였다. “오늘 밤이다.”
서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민준의 과거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의 눈 속에 담긴 집념과 고통을 이해했다. 민준의 복수는 그녀의 삶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차분하게 요새 주변의 경계 상태를 브리핑했다.
“남동쪽 폐건물 옥상, 저격수 시야 확보. 하지만 움직임이 둔합니다. 아마도 교대 시간인 듯합니다. 서쪽 외벽은 비교적 한산하지만, 무인 감시탑이 30분 간격으로 순찰합니다. 하수도를 이용한 침투는 불가능합니다. 최근 보수 공사가 있었는지 굳게 잠겨 있습니다.”
민준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주변 지도를 머릿속에 그렸다. 폐허가 된 도시는 그에게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좀비 떼를 피하고, 감시의 눈을 피하는 방법은 그의 몸에 새겨진 본능이었다.
“저격수는 내가 맡는다. 서쪽 외벽, 감시탑이 다음 순찰을 시작하기 전에 침투한다.”
그는 허리춤에 찬 낡은 나이프를 만졌다. 칼날은 그의 지문처럼 익숙한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먼저, 서연이 신호탄처럼 연막탄을 던졌다. 쉭 하는 소리와 함께 회색 연기가 자욱하게 퍼져나갔다. 민준은 연막이 시야를 가리는 틈을 타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민첩한 움직임으로 폐건물의 잔해와 부서진 차량들을 넘나들었다. 그의 발소리는 마치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저격수가 있는 폐건물 옥상으로 향하는 길은 좀비 무리가 우글거리는 위험한 통로였다. 민준은 조용히 그림자 속에 숨어들었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거슬렸지만, 그의 심장은 이미 차가운 강철로 단련되어 있었다.
첫 번째 좀비. 그는 순식간에 다가가 나이프를 정확히 뇌수에 박았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좀비는 힘없이 쓰러졌다. 다음 좀비는 목덜미를 부여잡고 벽에 처박아 조용히 제압했다. 피 냄새가 진동했지만, 민준의 표정은 흔들림 없었다. 그의 손은 이미 무수히 많은 생명을 끊어냈고, 이제 와서 이런 시시한 살육에 동요할 일은 없었다.
옥상에 도착하자, 망루에 웅크리고 있던 저격수가 연막탄 때문에 당황한 듯 허둥대고 있었다. 녀석이 총을 고쳐 쥐려던 찰나, 민준은 이미 그의 뒤에 서 있었다.
“크흑…!”
뒤에서 날아든 주먹이 저격수의 목덜미를 강타했다. 녀석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풀썩 쓰러졌다. 민준은 그의 소총을 빼앗아 쥐었다. 무게감이 꽤 있었다. 잠시 후, 멀리서 감시탑의 붉은 불빛이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진입한다.” 민준이 무전기로 짧게 말했다.
“서쪽 외벽, 안전 확보.” 서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마치 거미처럼 건물 외벽을 타고 올랐다. 낡은 쇠사다리, 부서진 환기구, 콘크리트 틈새. 그의 손과 발은 갈고리처럼 모든 곳을 움켜쥐었다. 2년 동안, 그는 이런 죽음의 벽을 수없이 기어올랐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복수하기 위해.
안전하게 벽을 넘어 요새 안으로 진입했다.
바깥의 황폐함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곳이었다. 전기가 들어오고 있었고, 희미하지만 난방이 되는 듯 온기가 느껴졌다. 복도를 따라 걸으니,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쳐 보였지만, 바깥 세상의 공포에 비하면 그들은 이곳에서 ‘인간다운’ 삶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여전히 경계심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박선우의 지배가 어떤 식인지를 짐작게 하는 부분이었다.
민준은 어둠 속을 유령처럼 움직였다. 이곳의 지형은 서연이 미리 확보한 도면과 거의 일치했다. 가장 높은 건물, 요새의 중심부. 그곳이 박선우의 거처였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랐다. 층을 오를수록, 건물은 더욱 깨끗하고 정돈된 모습을 보였다. 마치 이곳만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복도 끝, 견고한 강철문이 보였다. 문 옆에는 작은 전자 패널이 박혀 있었고, 그 위로 흐릿하게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총수 박선우 집무실’**
그 세 글자가 민준의 심장을 강하게 울렸다. 복수심으로 차가웠던 그의 눈이, 순간적으로 붉게 타올랐다.
그 순간, 그의 시선은 바닥에 떨어진 낡은 군용 나이프집에 멈췄다. 오래되어 가죽이 헤지고 모서리가 닳은 물건.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함에, 민준은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손끝에 닿는 감촉은 너무나 생생했다.
_“야, 민준아! 이거 봐라. 이거 우리 아버지 유품인데, 네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서.”_
_낡은 나이프집을 건네주던 선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앳된 얼굴에는 순박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는 그때, 선우를 진정한 친구로 믿었다._
_“이거 위험하잖아. 네가 가지고 있어.”_
_“됐어, 됐어. 내가 쓰면 왠지 아까워. 넌 워낙 손재주가 좋으니까. 이런 건 네 손에 있어야 빛을 발하지!”_
_그때는 그런 순수한 우정이 영원할 줄 알았다. 폐허가 되기 전, 평범하고 따뜻했던 날들의 조각._
하지만 기억은 이내 지옥 같은 현실로 되돌아왔다.
_“민준아, 미안하다…!”_
_선우의 비명이 귓가를 찢었다. 콰앙!_
_등 뒤에서 밀려드는 엄청난 충격. 눈앞이 번쩍였다. 비틀거리는 몸이 통제력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거친 손이 허공을 휘저었지만,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_
_그리고 그의 눈에 비친 것은, 그를 밀쳐낸 선우가, 필사적으로 철문 너머로 달려가는 뒷모습이었다. 민준의 손이 좀비 떼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마지막까지 붙잡으려 했던 선우의 소매자락을 놓쳤다._
_으드득! 으드득!_
_살점이 찢기는 고통이 전신을 덮쳤다. 민준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수많은 손들이 그의 몸을 움켜쥐고, 이빨이 살을 파고들었다.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그때 민준이 보았던 선우의 얼굴은, 더 이상 친구의 얼굴이 아니었다. 살기 위해 동료를 제물로 바치는, 짐승의 눈빛이었다._
_그 고통 속에서, 민준은 선우에게 복수하리라 맹세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의 영혼은 피와 증오로 다시 태어났다._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손에 쥔 나이프집이 파편처럼 느껴졌다. 그의 손에 들린 나이프가 더욱 단단히 쥐어졌다.
그래, 바로 이것. 이 감정이었다.
그를 여기까지 오게 한, 순수한 증오.
그는 무심하게 나이프집을 바닥에 던졌다. 가죽이 낡아 빠진 그것은 의미 없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더 이상 과거의 조각에 얽매일 이유는 없었다.
총수 박선우의 집무실 문틈으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안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만하고 거만한 어조였다.
“…겨우 그 정도 좀비도 못 막나? 멍청한 것들 같으니. 병력이 차고 넘치는데, 고작 몇 마리 처리 못 해서 보급로가 막혀? 다시는 그런 보고가 올라오지 않도록 해라.”
익숙한 목소리.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만만하고, 타인을 얕보는 듯한 어조.
민준의 눈은 얼음처럼 차갑게 빛났다. 그가 문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손잡이의 차가운 금속이 그의 손바닥에 닿았다.
안에서 박선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젠장, 귀찮게시리. 차라리 저 멍청한 것들 대신, 제대로 된 놈 하나라도 더 있었으면…”
달칵.
문이 천천히 열렸다.
어둠 속에 서 있던 민준의 그림자가, 환한 방 안으로 길게 드리워졌다.
방 안에는 박선우가 푹신한 의자에 앉아, 고급스러운 양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호화로운 집무실 안에는 바깥의 끔찍한 현실과는 동떨어진, 안락함이 가득했다.
유리잔을 들어 올리던 선우의 시선이, 문틈으로 들어온 그림자에 닿았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잔이 손에서 떨어지며 깨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박선우.”
민준의 목소리는 지옥에서 들려오는 듯, 낮고 냉랭했다.
어둠 속에 가려진 얼굴. 하지만 그의 눈은 선우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2년. 지옥에서 돌아온 내가, 널 위해 준비한 선물을 받아라.
강민준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올라갔다.
복수의 서막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