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파트 속 강철 심장
밤 11시, 고층 빌딩 숲에 박힌 유리와 강철의 도시 서울은 비로소 깊은 숨을 내쉬는 듯했다. 류진호는 창밖으로 펼쳐진 야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빠르게 흘러가는 차량의 불빛들, 그리고 그 위로 펼쳐진 무수한 별빛 대신 희뿌연 스모그가 드리워진 밤하늘. 그의 23층짜리 아파트 창문 밖 풍경은 언제나 변함없이 차갑고 고독했다.
지나치게 고요한 밤이었다. 언제나처럼 작업실이자 침실인 거실 한복판, 반쯤 해체된 채 각종 공구와 회로 기판이 널려 있는 작업대 앞에서 그는 냉기를 느끼고 있었다. 분명 에어컨은 꺼져 있었고, 창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런데도 등골을 타고 오르는 묘한 한기. 진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노트북 화면에 집중했다. 오늘까지 마무리해야 할 외주 프로젝트의 코딩이 아직 절반도 진행되지 않았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인공지능 프로그래머이자, 그보다 더 은밀하게는… 자칭 ‘개인용 고기동 전투 병기’를 설계하는 미친 엔지니어였다.
“젠장, 이 정도면 냉장고냐?”
투덜거리며 커피가 식었나 싶어 머그컵을 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착각이겠거니, 다시 키보드 위로 손을 올리려는 순간, 무언가 시야 한구석을 스쳤다. 작업대 가장자리에 놓여 있던 육각형 볼트 함이, 그의 손길이 닿지 않았는데도 스르륵, 한 뼘 정도 미끄러진 것이었다.
진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진인가? 아님 내가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봤나?”
그는 잠시 모든 작업을 멈추고 고요한 아파트 내부를 응시했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 환기구에서 미미하게 들리는 바람 소리, 그리고 그의 맥박 소리뿐. 완벽한 정적. 다시 볼트 함을 원래 자리에 놓았다. 이번엔 제대로 눈으로 확인하듯 손바닥으로 꾹 눌러보기도 했다.
몇 분 후, 다시 코딩에 열중하던 진호의 귀에 희미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슥, 스스슥.’ 시선이 저절로 향한 곳은 주방이었다. 식탁 위, 어젯밤 먹다 남긴 시리얼 박스가 마치 살아있는 듯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쿵!**
시리얼 박스가 바닥에 떨어지며 플라스틱 용기가 깨지는 소리가 적막을 찢었다. 내용물인 곡물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진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누구야!”
아무도 없었다. 그는 분명 혼자 살고 있었다. 잠겨있는 현관문, 굳게 닫힌 창문, 그의 집에는 그 외에 어떤 생명체도 존재할 수 없었다. 등 뒤로 다시금 싸늘한 냉기가 엄습했다. 단순한 착각이나 피로 누적이 아니었다. 이건 명백히, 누군가 그의 집에 침입했다는 증거였다. 보이지 않는 침입자.
진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손을 뻗어 책상 한구석에 놓인 그의 개인 호신용 공구함에서 묵직한 스패너를 꺼냈다. 손에 착 감기는 단단한 금속의 감촉이 그에게 작은 안도감을 주었다.
그때였다. 거실 중앙에 놓인 거대한 천막, 그 아래 가려져 있던 ‘그것’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웅—…**
낮고 깊은 공명음. 마치 거대한 기계가 잠에서 깨어나는 듯한 소리였다. 진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소리는 그의 심장을 직접 때리는 듯 진동했고, 아파트의 벽과 바닥을 통해 온몸으로 전해져왔다. 그것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순수한 힘의 발현이었다.
“설마… 네가 반응하는 건가?”
진호는 천막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그의 감각은 이미 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그 소리의 근원은, 명백히 천막 아래 봉인되어 있는 그의 전부이자, 그의 비밀인 ‘아스트라’였다.
다시 한번 냉기가 덮쳐왔다. 이번엔 더 강력했다. 진호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주방 쪽에서 들려온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식기 건조대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스테인리스 숟가락들이 하나둘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붙들린 것처럼, 허공에서 흔들리다가 일제히 진호를 향해 날아들었다.
**쨍그랑! 쨍그랑!**
진호는 스패너를 휘둘러 숟가락들을 쳐냈다. 금속성 파열음과 함께 숟가락들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성을 잃은 유령의 장난이었다. 폴터가이스트. 그러나 이렇게 강렬하고 공격적인 것은 처음이었다.
“젠장, 도대체 뭐야!”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스패너를 든 손에 땀이 흥건했다. 아파트 안의 모든 전등이 미친 듯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형광등에서 나는 ‘찌이익’ 하는 고주파음이 고막을 찢을 듯했다. 거실의 대형 모니터들이 번개처럼 번쩍이며 깨진 화면을 보여주었고, 그의 노트북은 아무 경고 없이 재부팅되기 시작했다. 전자기기들이 미쳐 날뛰는 광경은 흡사 사이버 재앙 같았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주방과 거실을 가로지르는 흐릿한 그림자. 연기처럼 일렁이다 사라지는 형체. 희미하게 인간과 비슷한 실루엣을 띠고 있었다. 너무나도 빠르게 지나쳐서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 **존재**했다.
그림자가 다가왔다. 차가운 공기가 진호의 뺨을 스쳤다. 마치 유령의 손길처럼.
**끼이이익-**
낡은 장롱 문이 저절로 열리고, 그 안에서 옷들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셔츠, 바지, 코트들이 허공에서 춤을 추듯 휘날리다가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마치 이 기괴한 존재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진호를 비웃는 듯했다.
“이 빌어먹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진호는 스패너를 내던지고, 천막 아래로 뛰어들었다. 천막을 걷어 올리자, 거대한 실루엣이 드러났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수많은 LED 인디케이터들이 섬뜩한 눈동자처럼 깜빡였다.
**그것은, 메카였다.**
그의 아파트를 지탱하는 철골 구조에 은밀히 연결된 거대한 격납고, 그 속에 웅크리고 있던 그의 비밀 병기, **아스트라**. 높이 4미터에 달하는 매끈한 은회색의 기체는, 평범한 아파트 내부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감을 내뿜었다. 접힌 상태의 관절과 수납된 팔다리, 그러나 언제든 튀어나갈 준비를 마친 맹수처럼 묵직하고 위압적이었다.
진호는 아스트라의 왼쪽 다리에 설치된 비상 해치로 접근했다. 해치를 열자, 내부에서 서늘한 기계 기름 냄새와 함께 오존 냄새가 섞인 공기가 뿜어져 나왔다. 조종석으로 통하는 통로였다.
“그래, 나도 더 이상 피하지 않아.”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함께 끓어오르는 전율이 담겨 있었다. 아스트라의 전원이 이미 자체적으로 가동되고 있었다.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아스트라의 에너지 코어를 건드렸거나, 혹은 아스트라 자체가 이 현상의 원인이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알 수 없는 존재로부터 이 아파트를, 그리고 그 자신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진호가 조종석으로 몸을 던졌다. 캡슐 형태의 조종석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그를 감쌌다. 전신에 연결되는 센서들이 미세한 진동과 함께 그의 신경계를 자극했다. 눈앞의 홀로그램 스크린이 번개처럼 켜지며 수많은 정보들을 띄웠다.
“시스템 기동, 에너지 코어 정상… 대기 모드 해제.”
그의 목소리가 조종석 내부에 울려 퍼졌다. 아스트라의 코어에서 터져 나오는 에너지가 기체 전체를 휘감았다. 은회색 외장 패널 사이사이에서 파란색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4미터 높이의 거대한 강철 거인이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크으으으으응-!**
아스트라의 어깨와 팔, 다리가 서서히 펴지기 시작했다. 숨겨져 있던 유압 실린더들이 굉음을 내며 확장되고, 기체의 각 부분이 맞물리는 소리가 아파트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 과정에서 아파트의 천장과 벽면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메카가 자신의 몸을 펼치자, 좁은 아파트 공간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폴터가이스트, 네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 집에서 난동 부릴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진호는 조종 스틱을 꽉 움켜쥐었다. 아스트라의 전면 카메라가 주변을 스캔하며 홀로그램 화면에 투사했다. 일반적인 시야로는 보이지 않는 파장의 흔적들이 화면에 붉은색으로 명멸했다. 그것은 아파트 전체에 퍼져 있는 기괴한 에너지의 잔재였다.
“감지 완료. 비정상 에너지 패턴, 유형 불명.”
그때였다. 아스트라의 어깨 패널이 완전히 펼쳐지기도 전에, 거실 중앙에서 폭발적인 에너지가 터져 나왔다. 가시적인 충격파가 아파트의 가구들을 산산조각 냈다. 진호의 눈에 희미하게 보이던 그 그림자가, 이번에는 더욱 선명하게, 반투명한 푸른빛을 띠며 아스트라의 눈앞에 나타났다.
**”크르르르르….”**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직접 울렸다. 그것은 어떤 물리적인 음성도 아니었고, 순수한 악의를 담은 정신적인 교감이었다. 형체는 인간형을 띠고 있었으나,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난 팔과 왜곡된 얼굴은 마치 고통받는 망령 같았다. 그것의 존재 자체가 공간을 비틀고 에너지를 흡수하는 듯했다.
“나타났군… 네놈의 정체가 뭐가 됐든, 내 아파트를 부수는 건 용납 못 해!”
진호는 조종 스틱을 앞으로 밀었다. 아스트라의 거대한 강철 팔이 굉음과 함께 뻗어나갔다. 그의 집에서 벌어지는 기괴하고 격렬한 전투의 서막이었다. 강철 심장을 가진 기계와, 보이지 않는 악의 존재가 격돌하는 순간이었다. 평범한 아파트에서의 일상은, 이제 완전히 박살 나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