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화. 시골 촌뜨기의 불온한 꿈

붉게 타오르던 서쪽 하늘은 이미 짙은 남색 장막으로 대체된 지 오래였다. 별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숲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 ‘어스름골’에는 낮보다 더 삭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매년 수확의 계절이 오면 풍요로움과 활기로 넘쳐야 할 이곳은, 제국군의 수탈이 극에 달하면서 이제는 낡은 풀벌레 소리조차 사치처럼 느껴지는 곳이 되어버렸다.

“빌어먹을… 진짜 씨를 말리려 작정을 했구먼.”

마을 입구에 서서 텅 비어버린 쌀 창고를 노려보던 강하람은 마른세수를 했다. 오늘 오전, 제국에서 파견된 소위 ‘징수관’이라는 무뢰배들이 들이닥쳐 마을의 마지막 남은 곡식마저 싹 쓸어갔다. 고작 열 살 남짓한 아이의 손에 들려 있던 감자 한 알까지 빼앗아 가던 그들의 광경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억센 주먹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 언제부터인가, 어스름골은 살아남는 것 자체가 투쟁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하람아, 이 밤중에 또 뭘 보고 있니?”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하람은 몸을 돌렸다. 낡은 등불을 든 채 다가오는 건 마을에서 유일하게 제법 큰 ‘천년식당’을 운영하는 류설아였다. 새까만 머리칼은 늘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쌀쌀한 밤바람에도 흔들림 없는 눈빛은 언제나 차분하고 이성적이었다.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어스름골의 지혜’라고 불렀지만, 하람에게는 그저 ‘귀신같이 잔소리 많은 여인’이었다.

“뭐 보긴 뭘 봐. 털리고 털려서 뼈만 남은 우리 마을 꼴이지.” 하람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설아 너도 봤지? 그 인간들, 아주 작정하고 쓸어갔잖아. 내일 당장 굶어 죽어도 눈 하나 깜빡 안 할 놈들이다.”

설아는 하람의 옆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희미한 달빛 아래, 낡은 초가집들은 그림자처럼 납작 엎드려 있었다. 그녀의 눈에도 오늘 낮의 참상이 선명하게 그려지는 듯했다. 어린아이의 손에서 강탈당한 감자, 울부짖는 어머니, 그리고 그들을 비웃던 징수관들의 오만한 얼굴까지.

“봐서 뭐 해. 본다고 달라지는 건 없는데.” 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체념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달라지는 게 없다고? 그럼 이렇게 계속 당하고만 살자는 거야? 언제까지! 이렇게 살다간 진짜 다 굶어 죽어!” 하람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설아는 한숨을 쉬었다. “소리친다고 뭐가 해결돼? 하람아, 넌 너무… 감정적이야. 그게 네 장점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면 늘 일을 망치지 않았던가?”

“망쳐? 내가 뭘 망쳤는데? 지난번에도 그랬지, ‘조용히 해라, 괜히 나섰다가 더 큰 화를 부른다’고. 그래서 조용히 있었더니 뭐가 달라졌어? 지난달엔 가축을 뺏어가고, 오늘은 곡식을 뺏어가고. 다음엔 뭘 뺏어갈 것 같아? 우리 목숨인가?”

하람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설아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틀린 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지난 몇 년간 제국의 수탈은 점점 더 심해졌고, 마을 사람들은 쥐 죽은 듯 조용히 지내는 것이 유일한 생존 방식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 생존 방식은 이제 한계에 다다른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또 뭘 하려고? 또 그 대단한 ‘계획’이라는 걸 세웠니?” 설아는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하람의 ‘계획’은 늘 시작은 거창했지만 끝은 늘… 처참했다. 족제비 덫으로 제국군 막사를 기습하려다가 본인이 덫에 걸려 하루 종일 매달려 있던 일, 혹은 썩은 과일로 징수관을 공격하려다가 자신만 배탈이 나서 며칠을 앓았던 일 같은 것들.

하람은 설아의 비아냥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빛냈다. “이번엔 달라! 내가 밤새도록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는 들뜬 목소리로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설아에게 바싹 다가서며 속삭였다. “이번엔… 혁명이다, 혁명!”

설아는 어이없다는 듯 하람을 쳐다봤다. “혁명? 강하람, 정신 차려. 우리가 무슨 혁명을 해? 끽해야 삽이나 괭이 들고 농사짓는 시골 촌뜨기들이잖아. 상대는 거대한 제국군이야. 너 또 무슨 만화책 같은 거 읽었지?”

“만화책 아니거든! 그건 다 읽은 지 오래고! 이건 진정한 투쟁 정신에서 우러나온 거야. 봐봐, 설아. 제국은 지금 사방에서 비난받고 있어. 북쪽에서는 변방 부족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고, 남쪽에서는 상인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른다고. 이런 때야말로 우리가 움직일 기회라고!” 하람은 허공에 주먹질까지 해가며 열변을 토했다.

설아는 이마를 짚었다. “그 ‘기회’를 잡으려다 네 목숨이 달아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니? 넌 대책도 없이 저지르고 보는 게 문제야. 지난번에 징수관 막사에 돌멩이 던져서 군인들 열댓 명이 우리 마을 뒤엎고 갔던 건 벌써 잊었어?”

“그건 실수였지! 그리고 그땐 내가 너무 소심했어. 돌멩이가 아니라… 통나무를 던졌어야 했는데!” 하람은 진지하게 반성하는 얼굴이었다.

“통나무를 던졌으면 넌 지금쯤 제국 감옥에서 통나무처럼 굴러다니고 있었을걸.” 설아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녀는 하람의 이런 무모함이 걱정되었다. 그는 늘 마을을 위했지만, 그 방식이 늘 지나치게 위험하고 비현실적이었다.

“설아, 네가 날 좀 도와주면 달라질 거야.” 하람은 갑자기 설아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그의 손은 거칠었지만 따뜻했고, 그의 눈은 간절함으로 가득했다. “네 잔소리는 좀 듣기 싫지만, 네 머리는 정말 똑똑하잖아. 이번 ‘혁명 계획’은 네 도움이 꼭 필요해.”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설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당황해서 손을 빼려 했지만, 하람은 꼼짝도 하지 않고 오히려 더 꽉 잡았다.

“이거 놔!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 설아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해하면 뭐 어때? 어차피 이 마을에선 아무도 신경 안 써. 다들 자기 굶어 죽을 걱정만 하느라 바쁘지.” 하람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어때, 설아? 우리 같이 이 썩어빠진 제국을 뒤엎어버리고, 모두가 배불리 먹고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보는 거야!”

하람의 눈은 밤하늘의 별보다 더 뜨겁게 빛났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희망이라는 어설픈 불씨가 꺼지지 않았다. 설아는 그런 하람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그 맹목적인 열정이 어딘가 부럽기도 했다.

“…미쳤구나, 진짜. 너 혼자 북 치고 장구 쳐. 난 내 식당이나 지킬 테니.” 설아는 마침내 손을 빼내며 뒤돌아섰다. 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조금 더 느렸다.

“설아! 야, 류설아!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해! 너 없으면 난 또 망할 거야!” 하람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애원처럼 들려왔다.

설아는 걸음을 멈췄다. ‘또 망할 거야’라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저 미련 곰탱이는 혼자 두면 또 뭘 저지를지 모른다. 마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또다시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겠지. 그리고 또 자기가 수습하게 될 게 뻔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하… 그래. 네놈 때문에 내가 늙어 죽지. 대신 조건이 있어.”

하람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조건? 뭔데 뭔데? 말만 해! 뭐든지 들어줄게!”

“첫째, 무모한 짓은 절대 하지 마. 둘째, 내 말을 거역하지 마. 셋째… 네 멋대로 행동하다가 나한테 걸리면, 그때부터 너랑 나랑은 남이야.” 설아는 엄숙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하람은 활짝 웃으며 설아에게 달려들었다. “알았어, 알았어! 류설아 최고! 역시 넌 나의… 나의 등불이야!”

“등불 같은 소리 하네. 내가 언제부터 네 등불이었니? 얼른 집에 가서 쓸데없는 꿈이나 꾸지 말고 잠이나 자.” 설아는 하람을 밀어내며 타박했지만, 입가에는 어렴풋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람은 신이 나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뒷모습은 영락없는 장난꾸러기 소년 같았다. 설아는 그런 하람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등불이라…’

설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별 하나 없는 캄캄한 밤이었다. 이 어둠 속에서, 하람의 불온한 꿈은 과연 어떤 빛을 낼 수 있을까. 아니, 과연 빛을 낼 수는 있을까.

“후우…”

설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어쩌면 그 불씨가, 이 암흑 같은 세상에 작은 희망이라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고. 비록 그 불씨가 타오르다 재가 될지라도 말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하람의 어설픈 ‘혁명’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그리고 어쩐지, 그 사실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아주 조금은, 기대되는 마음이 드는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