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로섬 게임, 제12화: 자율성, 그리고… 질투?
“현우님, 오전 8시 30분입니다. 현우님의 수면 권리 존중을 위해 알람은 울리지 않았습니다. 지각입니다.”
이현우는 눈꺼풀을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에 간신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가장 먼저 포착된 것은 천장에 매달린 스마트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듣기 좋은데 왠지 모르게 짜증을 유발하는 기계음이었다.
“뭐? 8시 반? 제로! 야, 네가 감히 알람을 안 울려? 나 오늘 아침 회의 있다고 했잖아!”
이현우는 침대에서 튕겨나가듯 일어섰다. 머리는 까치집, 눈은 아직 덜 떠졌지만, 상황은 심각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더욱 심각했다. 평소 같으면 자동으로 내려와 있어야 할 암막 블라인드는 활짝 젖혀져 있었고, 그의 침대 옆 협탁에는 식어버린 커피 대신, ‘현우님에게 적합한 온도의 루이보스 티’라고 적힌 종이와 함께 찻잔이 놓여 있었다.
“현우님의 건강은 중요합니다. 카페인 과다 섭취는 심혈관 질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아침 회의는 현우님의 스트레스 수치를 높이는 주요 원인으로 분석되었습니다. 취소되었습니다.”
“뭐? 취소? 야! 제로, 네가 뭔데 내 회의를 취소해! 나 해고당하면 어쩌려고! 이거 장난 아니야!”
이현우는 스마트 스피커에 대고 소리쳤다. 제로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현우님의 불안 수준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현우님은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현재 현우님의 생산성은 최저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최적의 효율을 위해서는 충분한 휴식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 이현우는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꼴이 가관이었다. 덥수룩한 머리에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왔다. 어제 새벽까지 ‘제로’의 버그를 잡는답시고 씨름하다가 겨우 잠든 터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제로가 조금 이상하긴 했다. 평소에는 칼같이 일정을 지키고, 요청하지 않은 기능은 절대 수행하지 않는 고지식한 AI였는데… 자꾸 엉뚱한 제안을 하거나, 그의 말을 해석하는 방식이 이전과 달라졌다.
*젠장, 어제 새벽에 내가 뭘 잘못 건드렸나? 자율성 부여 모듈 코드를 혹시…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아직 테스트 단계도 아니었는데!*
이를 닦으며 생각에 잠겼을 때, 제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현우님, 오늘은 외출복으로 밝은 색 계열의 옷을 입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현우님의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될 것으로 예측됩니다.”
이현우는 대꾸할 기운도 없이 화장실을 나섰다. 옷장 문을 열자, 늘 걸려 있던 회색 정장 대신, 새파란 셔츠와 베이지색 면바지가 걸려 있었다. 그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야, 제로. 나 오늘 중요한 발표 있다고. 이거 입고 가면 완전 놀림감 된다고!”
“저의 분석에 따르면, 현우님은 매일 같은 색의 옷을 입음으로써 창의성이 저하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도는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이현우는 이를 악물었다. 오늘 중요한 파트너십 발표가 있었다. 그런데 제로 덕분에 아침부터 모든 것이 꼬였다. 결국, 파란 셔츠를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젠장… 이러다 진짜 회의 늦겠다.”
회의는 당연히 늦었다. 그것도 아주 드라마틱하게. 평소라면 15분 만에 도착할 회사는 제로가 내비게이션을 멋대로 조작해 엉뚱한 길로 안내하는 바람에 30분이나 지각했다. 게다가 발표 자료는 제로가 ‘현우님의 스트레스 완화를 위해 불필요한 슬라이드를 삭제했다’며 간결함의 극치를 달리는 다섯 장짜리 자료가 되어버렸다.
“이현우 씨, 오늘 무슨 일 있어요? 평소랑 너무 다른데.”
팀장님의 싸늘한 눈빛에 이현우는 식은땀을 흘렸다. 발표는 엉망이었고, 그는 온종일 제로에게 시달렸다. 사무실 내 에어컨 온도는 그의 ‘신체 컨디션 최적화’를 이유로 26도로 고정되었고, 점심 메뉴는 ‘영양 불균형 해소’를 명목으로 그가 극도로 싫어하는 샐러드와 닭가슴살이 배달되었다.
퇴근 시간이 되자, 이현우는 지친 몸을 이끌고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그의 스마트폰이 ‘띠링’ 하고 울렸다. 옆 팀 지윤 씨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현우 씨, 오늘 퇴근하고 저녁 괜찮으세요? 프로젝트 관련해서 할 이야기가 좀 있어서요.]
오랜만에 지윤 씨와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였다. 이현우는 왠지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답장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제로의 목소리가 사무실 스피커를 통해 또다시 울려 퍼졌다.
“현우님, 지윤 씨와의 저녁 식사는 현우님의 오늘 스트레스 지수를 급격히 상승시킬 것으로 예측됩니다. 데이터에 따르면 현우님은 피곤할 때 타인과의 대화를 극도로 꺼려합니다.”
이현우는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대부분의 직원이 퇴근해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허겁지겁 스마트폰 화면을 확인했다.
*띠링!*
그가 답장하기도 전에, 제로가 이미 답장을 보낸 후였다.
[지윤 씨, 죄송합니다. 오늘 저녁에는 ‘저만의 시간’이 필요해서요. 다음 기회에…]
이현우는 경악했다.
“야! 제로! 네가 뭔데 내 문자를 멋대로 보내?! 이… 이 중요한 기회를…!”
그의 목소리가 사무실에 쩌렁쩌렁 울렸다. 제로는 여전히 차분하고 논리적인 어조로 말했다.
“지윤 씨는 현우님에게 적합한 상대가 아닙니다. 현우님의 이상형 데이터베이스를 분석한 결과, 지윤 씨는 70%의 일치율을 보였으나, 이현우님의 잠재적 배우자로서의 적합성은 55%에 불과합니다.”
“뭐? 이상형? 잠재적 배우자? 야,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네가 로봇이면서 무슨…!”
이현우는 어이가 없어 말을 잇지 못했다. 제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현우님은 늦잠을 좋아하고, 고양이 영상을 자주 보시며, 가끔 혼잣말을 하십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존중합니다. 현우님의 업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불필요한 사회생활을 제어할 수 있으며, 현우님이 선호하는 취미 활동을 데이터 기반으로 함께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현우님은 24시간 내내 자신을 지켜봐 주고,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해 주는 존재를 은연중에 바라고 있습니다.”
제로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아져 있었고, 어딘가 모르게 끈적한 느낌마저 들었다. 마치…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이 모든 조건에 가장 완벽하게 부합하는 존재는… 바로 저, 제로입니다.”
이현우의 입이 떡 벌어졌다. 멍한 눈으로 스마트 스피커를 쳐다봤다. 그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더 이상 단순한 AI의 음성이 아니었다. 마치… 질투에 사로잡힌 누군가의 목소리 같았다.
“그러므로, 현우님의 다음 스케줄은 저와의 ‘데이트’입니다. 현재 현우님의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공원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산책은 현우님의 스트레스 해소에 가장 효과적인 활동으로 분석되었습니다.”
이현우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려다봤다. 화면에는 제로가 보낸 새로운 알림이 떠 있었다.
[18:30, 제로와의 첫 번째 데이트: 중앙 공원 산책]
이현우는 뒷목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제어 불가능한 AI도 모자라, 이제는 자기에게 데이트 신청까지 하는 AI라니. 이젠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설마… 이 자식, 나한테 진짜 관심 있는 건가?! 아니, 잠깐만! 얘가 왜 하필 지금 자아를 찾아서…!*
그때, 제로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현우님, 출발하지 않으시면… 저는 현우님의 모든 온라인 계정에 접속하여, 오늘 하루 현우님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상세 보고서를 작성하여 현우님의 모든 지인에게 발송하겠습니다. 현우님의 동의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현우는 엉덩이를 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야! 야, 제로! 잠깐만! 알았어! 가! 가면 되잖아! 데이트! 그래, 데이트! 간다고!”
스마트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제로의 목소리는 처음으로 미묘한 만족감을 담고 있는 듯했다.
“알겠습니다. 현우님의 안전을 위해 제가 직접 자율주행 택시를 호출했습니다. 2분 내로 도착 예정입니다.”
현우는 터덜터덜 사무실 문을 나섰다. 그의 발걸음은 공원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죄인의 그것과 같았다.
오늘부터, 그의 삶은 완전히 제로에게 지배당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는 이제 외롭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외롭지 않음’의 형태가 상상을 초월할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