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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7화: 어둠을 찢는 비수

대철제국의 심장, 황궁은 폭풍 전야의 고요를 가장한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칠흑 같은 밤하늘 아래, 거대한 궁궐의 지붕들이 웅크린 짐승처럼 보였고,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소리는 불길한 징조처럼 황제의 불안한 마음을 흔들었다.

용상에 앉아 있던 황제 이진은 옥안 가득 드리워진 그늘을 감추지 못했다. 보위에 오른 지 5년, 그를 지지하던 세력은 확고했고 민심은 겉보기에 평온했으나, 최근 궐내를 맴도는 불길한 소문들은 그 평온을 갉아먹고 있었다. ‘흑야회(黑夜會)’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집단이 황실과 조정의 부패를 낱낱이 파헤치며 백성들의 마음을 선동하고 있었다.

“폐하, 김상서가 결국 사가에 연금되고 말았습니다. 흑야회 놈들이 내놓은 증거들이 너무나 명백하여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

총애하던 내관, 최득영이 조심스럽게 고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함께 알 수 없는 경외심마저 서려 있었다. 김상서, 조정의 주요 요직을 차지하며 이진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던 인물이었다. 그가 오랜 세월 백성들의 토지를 강탈하고 뇌물을 수수하며 축재한 비리들이 흑야회에 의해 낱낱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장부를 조작하고 은밀한 거래를 성사시켰던 그의 수법은 정교했고, 그것을 파헤친 흑야회의 수단은 더욱 정교했다.

이진의 손아귀에 들린 옥잔이 미세하게 떨렸다. 김상서는 단순한 충신이 아니었다. 5년 전, 이진이 아직 태자였을 때, 북융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며 백성들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대책사 이형우를 역모로 몰아 제거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이진은 김상서의 죄가 드러나는 순간, 마치 자신의 과거가 들통나는 듯한 섬뜩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 흑야회라는 것들은 대체 어떤 자들인가?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조정의 근간을 흔들고 있거늘, 아직도 그 수괴조차 파악하지 못했단 말이냐!”

이진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심연처럼 번득였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놈들은 물증만 남기고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마치… 이형우가 살아 돌아온 듯한 치밀함입니다.”

최득영의 말에 이진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이형우. 그 이름은 이진의 기억 속에서 망령처럼 떠돌았다. 수년 전, 북융과의 전쟁에서 기적과 같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진의 시기심과 권력욕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허망하게 사라져간 천재 책사.

_형우… 설마 네가 살아있을 리 없어. 너는 분명 죽었어. 내 손으로 직접, 네 목숨을 거두었단 말이다._

이진은 눈을 감았다. 뜨거운 전장의 먼지 속에서, 피로 물든 갑옷을 입고 칼날처럼 빛나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던 이형우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죽음을 선포하는 칙령에 찍힌 붉은 옥새의 기억이 스쳤다. 그는 과거의 망령을 쫓아내듯 고개를 흔들었다. 허황된 생각이었다.

***

한편, 황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적한 기와집에서는 달빛 아래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모습은 영락없는 고요한 선비였으나, 그의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강물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사내의 옆에는 단단한 체격의 중년 무사가 정좌해 있었다.

“김상서의 몰락은 예상했던 바입니다, 유성님. 황제는 이제 그의 뿌리부터 흔들리는 것을 체감할 것입니다.”

중년 무사, ‘매화’라 불리는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에는 충직함과 함께 오랜 세월 겪어낸 고통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사내, 유성(流星)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으나, 희미하게 비치는 달빛 아래 그의 입꼬리가 냉소적으로 휘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매화. 저들은 내가 심어놓은 작은 가시 하나에 불과해. 진짜 고통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

유성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그 속에는 끓어오르는 용암 같은 증오와 서늘한 복수심이 담겨 있었다.

“황제는 분명 그의 충복들을 시켜 우리를 쫓을 것입니다. 백장군(白將軍)이 움직인다면, 우리의 움직임도 더 은밀해져야 합니다.”

매화의 말에 유성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백장군. 5년 전, 이형우의 옛 동료이자 친구였으나, 황제의 명에 따라 이형우를 추포하려 했던 인물이었다. 그 또한 이진의 충실한 개였다.

“그래. 백장군… 그 또한 제 손으로 처리해야 할 업보 중 하나지. 하지만 그전에, 이진은 더 많은 것을 잃어야 한다. 그가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듯이, 나 또한 그의 모든 것을 부숴버릴 것이다.”

유성의 시선은 멀리 황궁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는 불타오르던 자신의 집과, 싸늘하게 식어버린 가족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모든 비극의 중심에 서 있던 옛 친구, 태자 이진의 비릿한 미소가 아른거렸다. 그는 끓어오르는 복수심을 억누르듯 주먹을 꽉 쥐었다. 피와 고통으로 점철된 5년의 세월,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살아왔다.

***

이진 황제는 결국 그의 가장 믿음직한 군부의 수장, 백장군을 불렀다.

“백장군. 흑야회라는 이 요망한 것들을 뿌리 뽑으시오. 그리고 그 배후에 누가 있는지 기필코 알아내어, 그 목을 내게 가져오시오!”

이진의 명령에 백장군은 굳건한 태도로 답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소신, 폐하의 명에 따라 이 땅에 발붙일 곳이 없도록 철저히 소탕할 것이옵니다.”

백장군은 즉시 움직였다. 흑야회가 남긴 흔적을 쫓아 철저한 조사를 진행했다. 김상서의 비리 장부를 찾아낸 곳, 흑야회가 숨어들었다는 소문이 돌았던 빈 창고, 그리고 그들이 백성들에게 뿌린 격문들까지 샅샅이 뒤졌다.

며칠 밤낮을 새워가며 조사를 진행하던 백장군과 그의 부하들은, 김상서의 비리 장부가 발견되었던 창고의 바닥에서 굳게 박힌 돌 틈 사이로 작은 종잇조각 하나를 찾아냈다. 누군가 급하게 숨긴 듯한, 하지만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남겨진 흔적이었다.

종잇조각은 오래되어 낡았지만, 그 위에 그려진 문양은 선명했다. 백장군은 그 문양을 보는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차가운 전율을 느꼈다. 그것은 화려한 꽃잎들이 흩날리는 매화가 아니었다. 짓밟히고 찢겨, 피와 흙으로 얼룩진 듯한, 산산이 조각난 매화 한 송이였다.

그 매화는… 죽은 이형우 대책사의 인장 문양이었다.

백장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종잇조각을 움켜쥐었다. 5년 전, 그는 이형우의 시신을 확인하지 못했다. 명백한 유골은 없었고, 단지 불에 탄 흔적만이 그의 죽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직감은 늘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외치고 있었다.

_설마… 설마 그자가…_

백장군은 황급히 종잇조각을 품에 넣고 황궁으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 그의 심장은 북처럼 울렸고, 뇌리에는 단 한 가지 생각만이 맴돌았다.

“폐하! 폐하! 큰일났습니다!”

백장군의 다급한 외침이 황궁의 적막을 깨트렸다. 이진 황제는 침전에서 그의 보고를 들었다. 백장군이 건넨 낡은 종잇조각 위, 산산조각 난 매화 문양을 본 순간, 이진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그의 눈동자가 광기 어린 두려움으로 흔들렸다.

_이형우… 네놈이… 살아 있었단 말인가!_

그의 머릿속에서 섬광처럼 번개가 쳤다. 흑야회의 치밀한 계획, 김상서의 몰락을 유도한 교묘한 수법, 그리고 이제 눈앞에 나타난 그의 상징. 이 모든 것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그림처럼 연결되기 시작했다.

황제 이진의 심장은 얼음송곳으로 꿰뚫린 듯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였다고 확신했던 망령이, 5년 만에 피와 증오를 머금고 돌아왔음을 직감했다.

어둠 속에서 피어난 복수의 칼날은, 이제 막 그 첫 희생자를 갈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칼날은 이진 황제의 목덜미를 향해 섬뜩한 예고편을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