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 쏟아지던 빛은 더 이상 따스한 아침을 알리지 않았다. 회색빛 먼지가 자욱한 공기 속에서, 그저 희미한 그림자처럼 바닥에 흩뿌려질 뿐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찾아오는 것은 시리고 메마른 목구멍의 통증. 그리고 그 통증보다 더 깊숙이, 뼈를 갉아먹는 듯한 허기였다. 강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낡고 냄새나는 담요가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지난 밤, 그는 무너진 백화점의 한쪽 구석, 겨우 버티고 선 진열대 뒤편에서 잠을 청했다. 언제든 천장이 무너져 내릴 수 있고, 언제든 다른 생존자가 문을 열고 들어설 수 있는 불안한 잠이었다. 꿈속에서도 그는 폐허를 헤매고, 끊임없이 무언가에 쫓기는 악몽을 꾸었다. 하지만 깨어나면 현실은 늘 꿈보다 더 지독했다.
낡은 배낭을 끌어당겼다. 안에는 반쯤 남은 곰팡이 핀 프로틴 바 조각, 녹슨 멀티툴, 그리고 더 이상 의미를 알 수 없는 지도가 전부였다. 지도는 원래 도시의 전경을 담고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길이 사라지고 건물들이 형체만 남은 채 뒤섞여 있었다. 그는 그 위에 자신이 지나온 길과 위험한 지역들을 대충 표시해 두었지만, 사실 아무런 보장도 없었다. 위험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 튀어나왔으니까.
강진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폐허가 된 도시의 적막 속에서, 제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창문 너머를 응시했다. 깨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여전히 회색빛이었다. 무너진 고층 빌딩들은 앙상한 뼈대만 남긴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길거리에는 뒤집힌 자동차들이 마치 거대한 곤충들의 시체처럼 널려 있었다. 가끔 바람이 불어와 삭막한 콘크리트 사이를 휘저으면, 긁히는 소리인지, 아니면 아주 멀리서 누군가 소리 지르는 소리인지 모를 불안한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물을 찾아야 했다. 어제 겨우 몇 방울 남은 물통을 비웠다. 물 없이는 길어야 이틀. 그리고 그 다음은… 그는 생각하는 것을 멈췄다. 그런 생각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저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끌고 들어갈 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삐걱거리는 마루 소리가 주위의 적막을 깼다. 이 소리가 누군가의 귀에 닿지 않기를 바라며, 그는 몸을 낮추고 주위를 경계했다. 폐허에서는 소리 하나하나가 의미를 가졌다. 살인적인 침묵 속에서 들리는 작은 소음은 종종 치명적인 경고이거나, 새로운 위협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복도를 따라 걸었다. 한때 화려했을 옷가지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널브러져 있었다. 유리 조각들과 금속 파편들이 그의 낡은 부츠 아래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으스러졌다. 그는 걸음마다 신경을 곤두세웠다. 벽의 균열, 떨어진 간판, 어둠 속에 숨겨진 그림자 하나하나가 그의 눈에는 위협으로 보였다.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질문이 맴돌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우리는 왜 이렇게 된 거지?’ 하지만 대답은 언제나 침묵이었다. 대답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거나, 아니면 대답할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갑자기, 저 멀리서 뭔가가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강진은 본능적으로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온몸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무슨 소리였을까? 바람에 쓰러진 간판? 아니면… 누군가? 아니면… 그 무엇인가?
그는 숨을 죽였다. 폐 속의 공기가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1분, 2분…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는 침묵 속에서, 그는 오직 자신의 거친 숨소리만을 들을 수 있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의 뇌리에는 언제나 이 질문이 맴돌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바로 그 ‘확신’이라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때로는 아무것도 없는 고요함이 가장 큰 공포로 다가왔다.
그는 다시 움직였다. 이제 그의 목표는 단순히 물을 찾는 것을 넘어섰다. 그 소리가 무엇이었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아니면 최소한 그 소리의 진원지에서 멀어져야 했다. 섣부른 움직임은 죽음을 부를 수 있지만, 미지의 존재에 대한 불안감은 그를 갉아먹을 것이 분명했다.
복도를 지나 한때 주방용품 코너였을 법한 곳으로 들어섰다. 엎어진 선반들 사이로 찢겨진 포장재들이 흩어져 있었다. 희망은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은 약탈당하고 짓밟힌 지 오래였다. 맹목적으로 물을 찾아 헤매는 그의 시야에, 낡은 급수관이 보였다. 녹슬고 부식된 채 벽에 매달려 있는 흉물. 한때는 이 건물의 동맥이었겠지만, 지금은 그저 차갑고 비어있는 관에 불과할 터였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강진은 조심스럽게 파이프를 두드렸다. 텅, 텅. 공허한 소리만이 메아리쳤다.
그때였다.
바닥에 떨어진 낡은 종이 한 장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먼지에 덮여 얼룩덜룩했지만, 그 위에 인쇄된 희미한 글자들이 보였다.
『이 세상에서 당신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 자신뿐입니다.』
짧은 문장. 누군가 남긴 낙서일까, 아니면 파괴되기 전 세상의 흔적일까. 강진은 그 종이를 주웠다. 글귀는 마치 누군가 자신에게 속삭이는 듯 섬뜩하게 들렸다. 그는 자신을 뺀 다른 모든 것들이 위험하다는 것을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 짧은 문장은 그가 잊고 있던, 혹은 잊으려 노력했던 가장 근원적인 공포를 다시금 일깨웠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세상은, 파괴된 건물들보다도 더 깊이, 사람의 정신을 파괴하고 있었다.
과연, 자신은 언제까지 ‘자신’을 믿을 수 있을까.
그 문장을 주머니에 구겨 넣은 강진은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제 그의 등 뒤에는 문장의 섬뜩한 그림자가 따라붙는 것 같았다. 그의 눈동자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살아남는다는 행위 자체가, 어쩌면 가장 잔인한 형벌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발아래 부서지는 잔해들,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천장,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적막. 그 모든 것이 그에게 속삭였다.
‘너는 혼자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이 폐허의 심장부에서, 그는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야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