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온의 심장, 강철의 칼날
밤은 아크로폴리스의 심장부를 집어삼켰다. 끝없이 솟아오른 마천루의 첨탑들은 하늘의 별을 가리고, 그 위를 수놓은 홀로그램 간판들은 현란한 빛을 토하며 도시 전체를 거대한 환영 극장으로 만들었다. 지상에서 아득히 멀리 떨어진 상층 구역의 사람들은 사이버네틱 아크를 유영하는 에어카의 불빛을 보며 무미건조한 웃음을 지었으리라. 그러나 이곳, 아크로폴리스의 그림자 아래, 도시의 하수구처럼 얽히고설킨 최하층 블록, 일명 ‘정크야드’에서는 네온의 빛조차 슬럼의 폐허를 제대로 비추지 못했다.
류성(柳星)은 차가운 금속 벽에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의 망막에 심어진 인포메이션 패드가 흐릿한 하늘의 별자리를 인식하고는 ‘알 수 없음’이라는 텍스트를 띄웠다. 인류가 더 이상 밤하늘을 육안으로 볼 필요가 없어진 지 오래였다. 인공위성과 드론이 만들어내는 광공해가 자연의 빛을 집어삼켰고, 사람들은 증강현실(AR) 필터로 가공된 디지털 별을 보며 감탄하는 시대였다. 류성은 그런 인위적인 것들을 혐오했다. 그의 육체는 이미 절반 이상이 사이버네틱 부품으로 대체되어 있었지만, 그의 심장만은 여전히 펄떡이는 살덩어리였고, 그의 의식은 모든 기계의 냉기를 거부했다.
“이봐, 류. 또 센티멘탈 모드냐?”
갈라진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류성의 맞은편, 고철 더미에 기대어 앉아있던 ‘구렌(九連)’이 이빨이 빠진 입으로 너털웃음을 지었다. 구렌은 한때 옴니코프의 보안팀을 지휘하던 베테랑 용병이었지만, 몇 년 전 임무 실패로 버려진 후 정크야드의 정보상이 되었다. 그의 한쪽 눈은 광학 렌즈로 대체되어 있었고, 팔뚝에는 불법 개조된 데이터 포트가 번쩍였다.
“센티멘탈이 아니라, 넌 이제 별도 못 알아본다는 사실이 슬픈 거지.” 류성은 짧게 대꾸했다. 그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의 낡은 검집을 더듬었다. 그 안에는 검이 없었다. 오래전, 그는 자신의 검을 잃어버렸다. 어쩌면, 자신을 잃어버린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쓸데없는 소리. 별보다 당장 내일 끼니가 더 중요한 게 우리네 인생 아니었냐? 그런데 오늘은 기분 좋은 소식이 있다.” 구렌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에 비열한 웃음꽃이 피었다. “최근에 도는 소문 들었지? ‘천하제일 무도회’ 말이다.”
류성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구렌을 응시했다.
“헛소문일 뿐이야. 그런 대회가 마지막으로 열린 게 언제인지 알아? 백 년도 더 전이다. 옴니코프가 모든 무력을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그런 대규모 무력 시위는 용납되지 않아.”
“‘용납되지 않아’라… 웃기는 소리. 옴니코프가 이번 대회를 직접 기획했다면? 그들이 직접 후원하고, 그들의 미디어 채널을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된다면?” 구렌은 눈을 가늘게 뜨며 류성의 반응을 살폈다. 그의 말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었다. 그의 정보망은 이미 진실의 촉수를 뻗고 있었다.
류성은 차가운 시선을 유지했다. “왜? 그들이 왜 그런 일을 해? 무림이라는 건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야. 인공지능이 조종하는 최첨단 무기가 모든 전쟁의 판도를 바꾼 시대에, 맨몸으로 싸우는 고수들의 대회가 무슨 의미가 있어?”
“의미? 하하하! 네가 알던 옴니코프는 이제 끝이야, 류. 정확히 말하면, ‘옴니코프’만이 끝이 아니지. 이 통합 연합 제국 전체가 벼랑 끝에 서 있어. 상층부에서는 이미 난리가 났어. ‘카오스 시그널’이라고 부르더군. 정체불명의 해킹으로 핵심 인공지능이 마비되고, 금융 시스템이 혼란에 빠지고… 세상이 미쳐가고 있어.”
구렌의 목소리에는 평소답지 않은 진지함이 섞여 있었다. 류성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사는 정크야드는 늘 혼란스러웠지만, 상층 구역의 질서는 철옹성 같았다. 그런 곳에 ‘카오스 시그널’이라니.
“그래서… 그게 무도회랑 무슨 상관인데?” 류성은 여전히 경계심을 놓지 않았다.
“상관있고말고! 그들은 혼란을 잠재울 강력한 ‘상징’이 필요해. 사람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절대적인 힘. 무림 고수들의 맨몸 격투는… 단순한 싸움이 아니거든. 그건 인류의 원초적인 힘에 대한 증명이야. 사이버네틱의 발달로 육체의 한계가 사라진 시대에, 순수한 기술과 정신력으로 겨루는 무도회는, 퇴보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구원’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거지.”
구렌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의 눈빛은 탐욕과 흥분으로 번뜩였다.
“그리고 이번 무도회의 승자에게는… 그저 명예나 상금이 전부가 아니야. 대회의 공식 명칭은 ‘천하제일 연합 수호 무도회’. 승자는 통합 연합 제국의 ‘수호자’ 칭호를 얻고, 모든 권한 위에 설 수 있는 막대한 힘을 부여받을 거라고 했다. 물론, 명분은 ‘혼란에 빠진 세계를 바로잡을 수호자’라는 거지.”
류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막대한 힘. 그것은 어떤 이에게는 유혹이요, 어떤 이에게는 저주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힘은, 분명 이 세계의 균형을 뒤흔들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문득 오래전, 자신의 스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_“무(武)는 곧 덕(德)이요, 덕은 곧 책임이다. 네가 가진 힘이 크다면, 그만큼 세상에 대한 책임도 커지는 법. 결코 그 힘을 사사로이 쓰지 마라.”_
그의 스승은 이미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린 존재였다. 무림의 시대가 저물고, 사이버네틱의 강철이 인간의 육체를 대체하면서, 스승의 가르침은 허무맹랑한 헛소리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지금, 그 헛소리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누가 참가하는데?” 류성은 나지막이 물었다.
“흐음, 궁금해? 대륙 각지에서 소문 듣고 몰려드는 고수들이 한둘이 아니지. ‘강철의 심장’ 박도현, ‘뇌전각’ 진해수, ‘칠성권’의 계승자라는 어린 소녀, 그리고… 옴니코프가 키워낸 최첨단 사이보그 무사들도 참가할 거라는 소문이 있어. 육체와 기계의 극한 대결이 될 거다. 네가 좋아할 만한 판이지 않나?”
구렌은 류성을 꿰뚫어 보듯 말했다. 류성은 오랫동안 자신의 무를 숨기고 살아왔다. 이 정크야드에서 그의 과거를 아는 자는 구렌뿐이었다. 류성은 한때 ‘하늘의 검’이라 불리던 무림의 마지막 계승자였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이유는…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픔 때문이었다.
“나는… 이제 싸우지 않아.” 류성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싸우지 않는다고? 네놈의 손은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는데? 그리고 이 소식, 널 위해 가져온 게 아니야. 놈들이 널 찾고 있다.” 구렌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정크야드의 하늘을 가르며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웅장하고 위압적인 형체의 드론 한 대가 빛을 뿜으며 류성 앞을 가로막았다. 드론의 중앙에는 홀로그램 패널이 떠올랐고, 그 안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듯한 한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짧게 깎은 머리,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뺨의 흉터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옴니코프의 최고 집행관 중 한 명이자, 과거 류성과는 악연이 깊었던 남자. ‘카이저’.
“류성.” 카이저의 목소리는 드론의 스피커를 통해 기계적으로 변조되어 들려왔다. “오랜만이다. 아니, 정확히는 오랜만에 너의 흔적을 찾았군.”
류성의 눈에 살기가 스쳤다.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드론을 노려봤다. “무슨 짓이지?”
“무슨 짓이라니? 네게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을 기회를 주러 왔다. 천하제일 연합 수호 무도회. 너의 이름은 이미 예비 참가자 명단에 올라와 있다. 거부할 수는 없을 거다.” 카이저는 비열하게 웃었다. “혹시라도 불참할 생각이라면… 이 정크야드에 숨어있는 네놈의 ‘유일한 친구’는 안전할 수 없을 게다.”
카이저의 시선은 잠시 구렌에게 향했다. 구렌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는 류성의 뒤에 숨으려는 듯 몸을 웅크렸다.
류성은 주먹을 꽉 쥐었다. 뼈 마디가 딱, 하는 소리를 냈다.
“비겁한 놈들….”
“비겁하다고? 우리는 이 세계의 질서를 유지할 뿐이다. 네놈의 무가 필요할 뿐이지. 받아들여라, 류성. 너는 선택받았다. 이 썩어가는 세계를 구원할, 단 하나의 칼날이 될 기회를 얻었다.” 카이저의 말은 협박이자, 동시에 알 수 없는 예언처럼 들렸다.
드론은 마지막 경고음을 남기고 밤하늘로 사라졌다. 정크야드에는 다시 고요가 찾아왔지만, 류성의 내면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평생을 피해왔던 과거가, 다시 그의 발목을 잡으러 온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망칠 수 없었다. 자신만이 아니라, 구렌의 목숨까지 걸려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썩어가는 세계를 구원할 칼날’이라는 카이저의 말이 묘하게 그의 심장을 울렸다. 그는 진정,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침묵해야 하는가?
류성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네온 빛으로 물든 아크로폴리스의 거대한 그림자가 그의 눈동자에 어른거렸다. 그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손은 다시 한번 허리춤의 빈 검집을 더듬었다. 텅 비어 있었지만,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검의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젠장….” 류성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내 그의 눈빛에 차가운 결의가 서렸다.
“구렌.”
“어, 어… 왜?” 구렌은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보를 구해와. 천하제일 연합 수호 무도회의 모든 정보를. 그리고… 내 이름으로 참가 신청서를 넣어라.”
구렌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의 입이 벌어졌지만,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류성은 고철 더미에 기대어 앉아 있던 자신의 몸을 일으켰다. 그의 그림자가 정크야드의 폐허 위에 길게 늘어졌다.
“오랜만에… 먼지 쌓인 칼날을 갈아봐야겠군.”
그의 등 뒤에서, 아크로폴리스의 네온 빛이 마치 거대한 피눈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