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회색빛 하늘은 언제나처럼 두터운 먼지 구름에 덮여 있었다. 지상은 폐허의 도시. 과거 ‘서울’이라 불리던 거대한 콘크리트 숲은, 이제는 앙상한 뼈대만을 드러낸 채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삐뚤어진 철근들이 하늘을 향해 비명을 지르는 듯 솟아 있었고, 부서진 유리 조각들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람에 흩날렸다.

김지혁은 낡은 방진 마스크를 고쳐 썼다. 턱까지 내려온 마스크는 거친 숨결을 걸러내느라 축축했지만, 익숙한 냄새였다. 잿빛 먼지와 곰팡이, 그리고 알 수 없는 부패의 냄새. 그가 기억하는 세상의 전부였다. 배낭은 어깨를 짓눌렀고, 한 손에 든 쇠 지지대는 언제든 덮쳐올 미지의 존재에 맞설 유일한 무기였다.

오늘은 낡은 도서관 건물이었다. 한때 지식의 보고였을 이곳은, 이제는 균열과 붕괴의 위협이 도처에 도사리는 죽음의 미궁이었다. 건물 외벽은 거대한 해일이라도 휩쓸고 간 듯 일그러져 있었고, 내부는 책더미와 무너진 서가,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잔해들로 가득했다. 지혁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바닥에 깔린 유리 조각과 책장 파편들이 밟힐 때마다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젠장, 아무것도 없잖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벌써 세 시간째 헤매고 있었지만, 찾은 것이라고는 곰팡이 핀 통조림 캔 두 개와 너덜너덜해진 물통이 전부였다. 이런 황량한 곳에선 더 이상 영양가 있는 것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그의 눈은 주변을 끊임없이 살폈다. 붕괴 위험뿐만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존재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기형적으로 변이된 쥐 떼, 빛을 싫어하는 육식성 곤충들, 그리고… 가끔 나타나는 그림자 괴물들까지.

그는 부서진 서가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먼지 쌓인 책더미를 발로 헤쳐 나갔다. 대부분은 종이 본연의 형태마저 잃어버린 채 부스러지거나 곰팡이 슬어 있었다. 그때, 그의 시야에 낯선 것이 들어왔다. 서가 뒤편,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큼지막한 목제 상자였다. 다른 책들이나 가구와는 다르게, 검붉은 색을 띠고 있었고 표면에는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건 또 뭐야…?”

호기심이 발동했다. 지혁은 쇠 지지대로 주변의 잔해들을 밀어내고 상자에 가까이 다가섰다. 나무는 세월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단단해 보였다. 손끝으로 문양을 더듬자, 차가운 나무의 감촉 아래로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심장 박동처럼.

상자 위쪽에는 쇠로 된 잠금장치가 굳게 닫혀 있었다. 낡고 녹슨 자물쇠였지만, 억지로 열기에는 너무 튼튼해 보였다. 지혁은 주머니에서 작은 공구들을 꺼냈다. 낡은 만능 나이프와 핀셋, 그리고 가는 철사 조각 몇 개. 능숙하게 자물쇠 구멍에 철사를 밀어 넣었다. ‘딸깍’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굳게 잠겨 있던 자물쇠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내부에서는 상자의 크기에 비해 의외로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검은 벨벳 천이 깔려 있었고, 그 중앙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은 돌 하나가 놓여 있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돌멩이 같았지만, 빛을 반사하는 표면은 마치 밤하늘의 흑요석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광택을 띠고 있었다.

지혁은 조심스럽게 돌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촉감이었지만, 돌이 손에 닿는 순간 찌릿한 전류가 온몸을 스쳤다. 동시에, 뇌리에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고대의 상형문자 같은 기호들, 흐릿한 그림자 같은 형상들, 그리고… 마치 수천 년 전의 속삭임처럼 아득하고 몽롱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_…근원술…_

환청이었을까? 지혁은 눈을 깜빡였다. 주변은 여전히 폐허였고, 그는 혼자였다. 손에 든 돌은 아무런 변화도 없이 고요했다. 착각이었나. 하지만 방금 느꼈던 그 찌릿한 감각과 환청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그는 돌을 좀 더 자세히 살폈다. 완벽하게 매끄러운 표면 어디에도 흠집 하나 없었다. 그리고 돌 밑에 깔려 있던 벨벳을 들어 올리자, 그 아래에 또 다른 것이 있었다. 낡은 가죽으로 엮은 듯한 작은 수첩이었다. 두께는 얇았지만, 역시나 표면에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고대의 언어인가?

수첩을 펼쳤다. 안쪽에도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이 가득했다. 그림인지 글자인지 모를 상형문자들도 보였다. 종이는 부스러질 듯 낡아 있었지만, 잉크는 신기하게도 선명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혁은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어떤 단어도, 어떤 문장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이 수첩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중요한 무언가가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듯한 강렬한 끌림을 느꼈다.

그때였다.
_쿠구궁!_
건물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철근이 무너지고 콘크리트 조각이 떨어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지혁은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뭐야… 또 무너지는 건가?”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굉음과 함께 섞여 들어오는, 짐승의 울음소리. 날카롭고 섬뜩한 그 소리는 이 폐허에서 익히 들어왔던 ‘그림자 사냥꾼’들의 것이었다. 놈들은 어둠 속에서 살아가며, 미약한 소리나 진동에도 반응해 사냥감을 찾아다녔다. 이 낡은 도서관은 놈들의 좋은 은신처가 될 수도 있었다.

지혁은 재빨리 검은 돌과 수첩을 배낭에 집어넣었다. 지금은 탐구할 때가 아니었다.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사냥꾼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들은 생각보다 빨랐다.

_타닥! 타닥!_

어둠 속에서 발굽 같은 것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다. 지혁은 쇠 지지대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젠장, 이런 빌어먹을!”

그는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짚어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어둠 속에서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검은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인간의 형상과 비슷했지만, 왜곡되고 뒤틀린 팔다리, 그리고 이빨을 드러낸 기형적인 얼굴은 공포 그 자체였다. 날카로운 발톱이 공기를 가르며 지혁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지혁은 간발의 차이로 몸을 비틀어 피했다. 쇠 지지대로 반격했지만, 그림자 사냥꾼은 놀라운 민첩성으로 공격을 피하고는 이내 다른 방향에서 덮쳐왔다. 놈들은 두 마리였다. 번뜩이는 눈빛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도망갈 곳이 없었다.

궁지에 몰린 순간, 지혁은 반사적으로 배낭 속의 검은 돌을 꺼내 들었다. 차가운 돌이 손에 닿자마자,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전류가 온몸을 휘감았다. 동시에, 머릿속에서 아까 들었던 그 속삭임이 마치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_…집중하라…_

그는 살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외침에 따라 돌을 꽉 움켜쥐었다. 그림자 사냥꾼 하나가 코앞까지 다가와 그르렁거렸다. 역겨운 악취가 코를 찔렀다. 절망적인 순간, 지혁은 무의식적으로 돌에 모든 의식을 집중했다. 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 그리고 그 돌이 가진 알 수 없는 힘에 대한 희미한 기대감.

바로 그때, 그의 손에 들린 검은 돌에서 푸른빛이 번쩍하고 터져 나왔다. 강렬한 빛은 어둠을 갈랐고, 빛과 함께 알 수 없는 파동이 주변을 휩쓸었다. 그림자 사냥꾼들은 마치 투명한 벽에라도 부딪힌 듯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잠시 동안 그들은 혼란에 빠진 듯 멈칫거렸다.

지혁은 자신의 손에 들린 돌과 눈앞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그림자 사냥꾼들을 번갈아 보았다. 푸른빛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후끈거렸다. 그의 눈에는 경외심과 함께 알 수 없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이 돌… 이 힘은 대체 뭐지?

혼란에 빠진 사냥꾼들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그를 향해 달려들 기세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짧은 순간이나마 생긴 도주할 기회였다. 그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손에 든 검은 돌을 다시 배낭 깊숙이 쑤셔 넣고는, 부서진 서가 사이의 좁은 틈을 향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폐허 깊은 곳에서 발견한 고대의 유물이, 그의 생존을 위한 새로운 길을 열어줄 것임을 직감하며.